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
빌립보서 4장 17-20절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성도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은 어떤 일을 할 때, 그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 둡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인본주의 사상이 대세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즉 자기만족이라고 하는 기준을 따라서 그 일을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일이 좋아도 자기에게 만족을 주지 않을 것 같으면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반대할지라도 자신이 좋으면 그 일을 기꺼이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삶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되면 이는 거의가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언제가 죄악과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 없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생각과 행동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나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고 믿는다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라 믿음이 깊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범사에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몸부림쳐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기쁨을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자신에게 선교의 후원금을 보내 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감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보내 준 사랑의 연보는 바울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로 하여금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수밖에 없게 했습니다. 나아가 빌립보 교회를 축복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그 후원을 단순한 물질적인 후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후원이 단순히 바울에게 기쁨을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후원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후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을까요?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너희에게 풍성한 열매가 있기를.
본문 17절에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사랑이 담긴 그 풍성한 물질적 후원에 대해서 깊은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큰 기대입니다. 즉 바울의 궁극적인 관심은 자신의 풍요로움이 아닙니다. 자신의 유익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풍요와 유익에 더 큰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무에서 먼저 바울은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οὐχ)”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강한 부정어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자신이 빌립보 교회의 후원을 은근히 기대하며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바울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후원을 강요하는 탐욕주의자라고 하는 비난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바울의 관심이 교회나 성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보내 주는 선물에만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교회가 보내 주는 물질적인 후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과 풍성한 삶이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열매(καρπός)”는 비유적으로 ‘어떤 투자를 통해서 얻어지는 배당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연보를 하고 후원을 한 것은 일종의 자기 자신들을 위한 영적인 투자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투자에 대해서 이익이 발생하고 더 풍성해지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영적인 투자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투자에 대해서 이익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 이익은 세상적인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물질적인 투자를 했지만, 저들이 거두는 열매는 영적인 유익입니다. 따라서 이 유익은 세상적인 계산에 의해서 거두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유익은 세상에서 향유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교회와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후원이 단순하게 바울이라고 하는 한 개인을 후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고상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고, 확장해 가십니다. 그리고 이 역사에 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동참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기쁨으로 이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화의 이러한 동참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나가는 위대한 역사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확장되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여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즉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권면한 것처럼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는 삶의 지향점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고전 10:31).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을 지십니다. 따라서 이 투자에는 손실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시간을 투자하든지, 물질을 투자하든지, 몸을 투자하든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투자에 대해서 풍성한 열매를 보장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기쁨만 추구하면 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면 됩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구별하면 됩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Ⅱ.향기로운 제물이다.
본문 18절에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에서도 상업적인 용어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보내 준 후원에 대해서 분명하게 답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라는 표현은 본래 ‘내가 이미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는 상업적인 거래가 있을 때, 영수증의 맨 끝에 기록하는 전문적인 상업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이 표현을 조금 더 깊은 의미로 사용해서 “나는 빚진 것은 완전하게 다 받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모든 교회에 동일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와 성도는 바울을 통해서 영적인 유익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는 바울에 영적인 빚을 진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는 이 빚을 갚아야 하는데,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물질적인 후원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로부터 풍성한 후원을 받았습니다. 본문에서 “풍부한지라(περισσεύω)”라는 표현은 ‘넘치다, 남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자신에게 베푼 정성과 사랑의 후원이 자신의 기대를 넘어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빌립보 교회의 후원이 바울의 모든 필요를 완전하게 충족시키고 남았다고 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에게는 풍족함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상반되는 것입니다. 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남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아도 모자라는 상황일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풍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입니다. 즉 실제로 쓰고 남는다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계속해서 고백한 것과 같이 자신은 모든 상황에서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바울에게 있어서 풍족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의 후원이 없다 할지라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이 풍성함을 단지 빌립보 교회가 보내 준 물질로 인함이 아닌 저들의 뜨거운 사랑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물질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선물입니다. 하지만 저들의 그 뜨거운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바울에게 있어서 더 큰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후원에 대해서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라고 했습니다. 이는 분명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창세기 8장 21절에서 홍수 후에 방주에 나온 노아가 제단을 쌓았을 때,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9장 18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리는 번제에 대해서 “이는 여호와께 드리는 번제요 이는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드리는 제사와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후원이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그 “제물(θυσία)”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래 이 제물은 ‘희생 제사’를 가리킵니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의 잡아 그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짐승이 희생되기 때문에 희생 제사라는 표현이 붙여졌습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주어진 선물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물은 자신의 생명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드려진 것입니다. 또한 저들의 후원은 분명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을 위해 보내진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서 “제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었습니다. 이 후원금에는 저들의 믿음이 담긴 것이요, 헌신이 담긴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바울에게 보내지는 선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은 분명 구약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헌금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누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기신 것 가운데 일부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드립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며 드립니다. 나의 생명을 대신해서 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확장시키기 위해서 드립니다.
결국 우리가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의 기쁘심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도록 드려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예물을 향기로운 예물로 받으십니다.
Ⅲ.하나님이 풍성하게 갚으시리라.
본문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축복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자신을 풍족하게 채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저들의 모든 쓸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채우시리라(πληρώσει)”라는 것은 ‘가득하게 채우실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을 위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후원이 하나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한 바울은 이에 대해서 하나님의 따뜻한 은총이 저들에게 풍성하게 임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곤고에 처했을 때 도와준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들의 필요를 풍족하게 채워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는 분명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약속은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하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는 분명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아마 바울도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서 성취되기를 간구하며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채우심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성도의 모든 것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성도와 그리스도 예수는 불가분의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관계입니다(요14:20).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특히 영적인 것, 우리의 구원과 관계된 것,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관계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주어집니다(엡1:4-14).
또한 하나님의 이 채우심은“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입니다. 여기의 “영광”은 우리가 장차 누릴 천국의 영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 땅에서의 영광스러움입니다. 또한 여기의 “풍성함”은 하나님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채워주시는 정도를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은 많은 것 가운데 일부분을 채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있어서 마음껏 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시편 50편 10-12절에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한 풍성함을 지니신 분입니다. 지금 바울은 하나님의 이 풍성함을 따라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을 간구하며 선포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쩨쩨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기쁘심을 따라 우리에게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색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믿을진대, 그리고 그 하나님이 풍성함으로 채워주심을 믿을진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믿음으로 고백하며, 헌신하며, 드리면 됩니다.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본문 20절에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서신을 끝맺는 부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이는 자신이 고백이기도 하면, 또한 빌립보 교회를 향한 권면이기도 합니다. 즉 자신의 모든 것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기를 소망하며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도 자신들의 모든 삶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리기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임을 늘 기억하며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드리는 자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과 헌신과 충성에 더 풍성한 것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기쁘심을 위해 살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