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4장 1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성도 여러분! 사실 본문 빌립보서 4장 1절은 문맥상으로 3장에 속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새로운 권면을 시작하는 표현이 아니라 3장에 등장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교훈의 결론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빌립보 교회가 저 거짓 교사들의 교훈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먼저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육체를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자랑거리를 내세우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본받아 우리 자신이 부활에 이르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음으로 반도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직 구원의 완성이 이른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준비된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가 떠나는 곳일 뿐입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요, 나그네의 삶입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이 낮은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죄와 사망에 매이는 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ὥστε)”라는 표현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근거로 이후의 권면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 영광스러운 변화를 소망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굳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보다 강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보다 화려하게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저들의 시선으로 본다면 우리의 빈약함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믿음을 지키기 어려워집니다. 우리의 소망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경주는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굳게 붙든다면 우리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을 이 세상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들의 눈으로 볼 때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어리석은 것이요, 허황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이 소망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비교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도전 앞에서도 우리는 이 소망을 더 분명하게 붙잡고 달려가야만 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나의 사랑을 받는 자들아.
본문 1절에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사용한 호칭은 간단했습니다. 1장 12절과 3장 13절. 17절에서는 “형제들아”라고 했습니다. 3장 1절에서는 “나의 형제들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아주 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한 친밀감과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단순히 자신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장황한 표현을 사용했다고 하기에는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너무 크다고 할 것입니다. 이 표현 속에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이 가지고 있는 마음, 기대하고 있는 마음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이 표현을 통해서 바울의 마음에 특별하게 자리하고 있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1.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사랑”이라는 표현과 “사모”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우리말의 성경은 바울의 마음을 완전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경은 바울의 편에서 빌립보 교회를 사랑하고,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사모한다는 의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이와는 반대의 의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을 받는”, 그리고 “사모함을 받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바울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모한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가 나의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사모함을 받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사랑 고백은 빌립보서 전체에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사랑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 가운데서 책망이나 경고가 없는 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베푸는 무한한 사랑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는 저들에게 완전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서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 다른 서신에 나타나는 것처럼 책망하거나 경고하는 장면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부드럽고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저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에 대해서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로 인해서 큰 기쁨을 누리고 있음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억누를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사랑이라는 표현과 사모함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자신의 사랑이 깊고 또 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자체가 바울에게 있어서 기쁨의 근원이요,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어떤 사물, 어떤 상황, 어떤 결과보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인해 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비록 빌립보의 성도들이 성숙하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문제와 갈등을 안고 있다 할지라도 바울은 저들로 인해서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저 빌립보의 성도들이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면류관은 왕이 쓰는 왕관이나 순교자들에게 약속된 면류관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잔치 자리에 참여한 손님들의 머리에 씌워주는 화관이나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한 자에게 주어지는 화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면류관은 “영광스러운 자랑거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예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등장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20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라고 말함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강한 신뢰감과 자랑스러움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전도자나 목회자에게 있어서 전도하고 양육한 성도는 자신의 영적 열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열매는 자신의 육적 자식에 못지않은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또한 이 영적 열매는 이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의미로 멈추지 않습니다. 이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설 때에도 영광스러운 열매로 기억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면류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자신이 저들로 인해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칭찬과 상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고, 빌립보의 성도들을 말씀으로 양육한 그 사역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그러한 사역이 성공적이었고,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었음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이토록 깊은 사랑의 표현과 소망의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만큼 빌립보 교회와 자신과의 관계가 아름다운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앞부분의 고백은 바울의 가슴 속에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가득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의 고백은 자신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목회자의 자랑과 기쁨은 성도에게 있습니다. 목회자는 주님께서 맡기신 양 떼를 주님의 마음으로 양육하는 자입니다. 때로는 성도들의 잘못이 자기 잘못인 것처럼 가슴에 안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성숙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큰 기쁨을 누리고 넘치는 감사를 고백하기도 합니다. 이는 목회자에게 있어서 장차 주님 앞에 설 때에 받을 상급이 바로 성도들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들이 주님께 드릴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큰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와의 관계를 바르게 맺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관계여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Ⅱ.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본문 1절에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3장 전체의 결론이라고 할 것입니다. 성도가 주 안에 굳게 서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여기에서 “서라(στήκετε)”라는 명령은 문자적인 의미로는 ‘확고하게 서 있으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경건과 정직으로 계속해서 굳게 서 있으라’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잠을 자고 싶은 유혹에도 불구하고 초소를 지켜야 하는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는 군인처럼, 혹은 저 앞에 있는 결승점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고통을 인내하면서 끈기있게 최선을 다하는 경주자처럼 그리스도인 다운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달려가는 과정에는 많은 장애물들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때로는 그 장애물 때문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잠깐 우리의 시선이 곁으로 벗어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믿음과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의 잘못된 시선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달려가게 하십니다. 우리 앞에 있는 부름의 상을 위하여, 우리의 영원한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 “이와 같이(οὕτως)”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앞에서 말한 바울의 의도를 따라 두 가지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너희에게 권면한 바와 같이”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설교의 첫 부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빌립보서 3장은 빌립보 교회 안에 침투한 두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고와 성도들의 올바른 믿음에 관하여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저 거짓 교사들로 인해 흔들리고 혼란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실례로 소개하면서까지 거짓에 흔들리지 말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바울 자신이 권면한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권면합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바른 복음 위에 바로 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왜 흔들릴까요? 우리의 삶이 왜 그렇게 어지러울까요? 원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없기에 흔들립니다. 그 복음에 대한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흔들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복음을 바로 알고, 바로 깨닫고, 바로 믿고, 바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저 한낱 세상의 많은 사상이나 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복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저 교회에서나 듣는 이야기로 치부한다면 우리는 그 복음을 믿을 수 없고, 그 복음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인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늘 바울이 “주 안에 서라”라고 권면하는 것은 바로 그 복음 위에 바로 서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바로 믿고 고백하며, 그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이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 복음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 복음 때문에,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수많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때문에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안에서 낳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자신이 권면한 내용들을 붙잡고 견고하게 설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너희가 천국의 시민권자를 가진 자처럼”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3장 마지막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로 고백하는 성도는 하늘의 시민권자라고 했습니다. 비록 몸은 이 땅에 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임을 믿는 자라면 이 사실에 대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저 거짓 교사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하늘의 시민권에 대해서 모르는 자들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지 못합니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소망도 없습니다. 소망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견고할수록 우리의 삶은 견고해집니다. 소망이 분명할수록 우리의 삶은 분명해집니다. 우리에게 저 하늘의 시민권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이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것에 대해서 유혹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미련을 가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것, 더 고귀한 하늘의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하늘의 시민권자임을 믿는다면,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감을 소망한다면 우리는 굳게 서야 합니다. 이 세상의 거짓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서 집을 예비해 놓고, 면류관을 준비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그날에 우리에게 주실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확실합니까? 우리의 소망은 분명합니까? 아직도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소망하는지 모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금 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세워야 합니다. 나 자신을 복음 앞에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나의 주고 고백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우리의 삶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복음 안에서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요, 목적입니다. 이것이 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나는 누군가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바른 복음 위에서 바른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복음 안에서, 분명하고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나로 말미암아 기쁨을 주는 성도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나를 인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서 굳게 서고, 저 하늘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감으로 장차 주님 앞에 설 때에 큰 칭찬과 영광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