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빌립보서 4장 10-12절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 강림 이후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이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복음의 확장을 방해하려는 사탄이 공격이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의 중심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이 연구하고 믿어왔던 율법이 바른길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성경을 다시 연구했고 그 모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남은 모든 생애를 자신이 발견하고 깨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감당했던 선교 사역은 혼자만의 사역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은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항상 예루살렘 교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가 선교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많은 교회가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복음으로 세워진 수많은 교회와 그 선교 사역을 함께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의 현장에는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제1차 선교 여정에 함께했던 바나바가 있습니다. 제2차 선교 여정에 동참했던 실라와 누가와 디모데가 있습니다. 선교 여정에서 만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이 바울의 선교에 동참했습니다.
결국 바울의 선교 여정에 동참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멀리서 기도로 동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선교 여정에서 필요한 물질을 공급함으로 동역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선교 사역의 기본은 자비량이었습니다. 그는 장막 만드는 일을 통해서 선교 여정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물질로 돕는 교회와 개인들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의 선교는 더욱더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복음 전파로 인해 세워진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도하고 마음만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 사역에 필요한 물질로도 동참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기뻐한다”라는 것은 ‘기쁨으로 가득 찼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크게”라는 것은 ‘대단히 많이, 격렬하게’라는 뜻입니다. 결국 지금 바울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큰 기쁨이 “주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기쁨은 세속적인 측면, 즉 자신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 나오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쁨은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토록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이 이토록 감출 수 없는 기쁨의 근원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본문 10절에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는 표현은 마치 봄에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즉 나무가 한겨울에는 거의 죽은 모습처럼 보입니다. 아무런 생명력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몸이 되면 그 죽은 것처럼 보였던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납니다. 이를 통해서 다시금 생명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바울은 지금 이러한 상황을 비유로 하면서 빌립보 교회와 자신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에는 억누를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의 선교 사역 초기에는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에게 물질적인 후원을 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변하면서 이것이 중단되었습니다. 특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후원하는 일이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있었지만,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후원하는 일을 멈춘 것은 바울을 향한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식었다든지 마음이 멀어져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울을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후원금을 가지고 갈 만한 사람이 없었다든지, 아니면 갈 수 있는 환경에 조성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전 세계 어디든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은행을 통해서 돈이 오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은행을 통해서 쉽게 후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후원금을 전달하고자 하면 반드시 사람을 통해서, 누군가가 그 후원금을 가지고 직접 찾아가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가 아무리 사도 바울을 후원하고자 할지라도 누군가가 빌립보에서 로마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이 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전적으로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빌립보에서 로마로 가는 여행 또한 쉽지 않았습니다. 육지로 간다든지, 배를 타고 가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길도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처럼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에바브로디도라고 하는 빌립보 교회의 지도자를 통해서 이 일을 이룬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힘을 다하여 연보를 했고, 그 후원금을 에바브로디도의 손에 들려서 로마의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에게까지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는 단지 그 후원금을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로마에서 바울을 돌보는 일까지도 감당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는 자신들이 바울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증명했습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바울을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바울에 대한 사랑은 “배려와 돌봄”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를 더 쉽고 근본적으로 설명한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바울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 사랑을 표현할 길이 지금까지 막혀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그토록 크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사랑을 확인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의 기쁨은 물질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기쁨은 빌립보의 성도들 안에 있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바울은 억누르지 못할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의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세워가고,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는 반드시 물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물질은 성도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성도들 안에 있는 사랑의 표현이 더 중요합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는지를 표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안에 이러한 사랑과 헌신이 있다면 물질적인 헌금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행한 사랑과 헌신, 교회를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복음을 향한 사랑과 헌신이 없기 때문에, 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표현이 풍성하게 드러날 때, 교회와 성도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있게 됩니다.
Ⅱ.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본문 11-12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분명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많은 교회의 후원을 받으면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일을 해서 돈을 벌었고, 그 돈을 자신의 사역에 사용했었습니다. 그런데 옥에 갇히면서 이러한 경제적인 기초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에게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빌립보 교회의 후원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라는 표현은 ‘내가 궁핍한 상황에서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에게 보내진 물질적인 후원 때문에 기뻐한다고 하는 오해를 막기 위해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바울을 향한 이러한 오해와 비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돈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가이사에게 재판을 청구할 정도의 재산이 있었고, 또한 많은 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분명 궁핍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궁핍으로 인해 교회들에서 후원을 받지 않았고, 또한 후원을 요청하지도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바울은 그 궁핍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비결, 곧 “자족(自足;αὐτάρκης)”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은 복음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얼마나 많은 고난과 비천에 처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은 바울이 원해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바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그에게 가해진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비천함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풍부함도 있었습니다. 물론 바울의 이 풍부함에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바울의 이 풍부함은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누렸던 풍부함을 가리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가 복음 사역을 감당하기 전에 누렸던 풍부함도 아닙니다. 이는 철저하게 그가 복음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누렸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자족은 자신이 처하는 그 비천이나 풍부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물질의 소유 여부에 따라서 만족을 누리지만, 지금의 바울은 이러한 외적인 요인이나 환경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발걸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걸음이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닥치는 이러한 외적인 환경은 그의 마음에 있는 기쁨을 좌우하는 요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모든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비결(秘決)을 배우다”라는 표현은 ‘비법을 전수하다, 성스러운 비밀을 가르치다’라는 뜻인데, 당시의 문헌을 보면 이는 고대의 신비종교에서 어떤 특권층에 가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의식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따라서 이 비결을 배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당시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 용어를 통해서 자신이 그 비결을 배우는 과정에 결코 쉽지 않았음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 비결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라 그 출처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비결을 직접 전수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기쁨은 이 “자족” 때문입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자족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으셨지만, 모든 것을 누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비결을 배웠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이 자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 자족을 누리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배워야 할 덕목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자족”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족은 세상 사람들의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외부의 환경으로 인한 자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족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는 영원한 유업이 보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이 세상의 것을 다 포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기쁨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기쁨은 성도의 표징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의 일로 인해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은 우리를 잠깐은 슬퍼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잠깐은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이고 영원한 기쁨은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더 풍성해 집니다. 우리의 기쁨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에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질 때 더 풍성해 집니다. 우리의 현실은 때때로 우리를 비천하게 합니다. 때때로 우리를 풍부하게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체로 인해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 기쁨의 제목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올바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이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이 기쁨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이 무엇인지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이 있을 때 우리는 교회를 위해서 헌신할 수가 있습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족함을 누리며,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