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πάντα σχύω ν τῷ ἐνδυναμοντί με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특별히 좋아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구절들을 암송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때때로 우리는 그 구절들을 떠올리며 힘을 얻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마냥 좋아하기도 합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록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 어떤 구절 하나, 단어 하나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참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은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을 대함에 있어서 철저하게 말씀의 기록자인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깨닫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말씀을 기록하시고 나에게 전달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내 삶 속에 녹아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내 안에서 역사할 수 있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합니다. 나아가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둠이 관영한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부패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본문은 헬라어 6단어로 이루어진 아주 짧은 구절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분 이 구절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너무나 많이 오해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도깨비방망이처럼 사용합니다. 이 말씀을 만능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조심해야 합니다. 아니 버려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이러한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문의 말씀은 앞에서 바울이 이야기했던 자족(自足;ατάρκης)”이라는 표현과 연관된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자족은 당시 헬라의 철학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였습니다. 저들은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환경을 극복할 수 있고, 그 어떤 환경에서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바울의 자족은 저 헬라의 철학에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아는 데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비록 물질적으로는 가난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습니다(2:3). 바울은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성도들에게 주기 위해 가장 좋은 것으로 예비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습니다(고전2:9). 따라서 바울은 언제 어느 상항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만족함을 느낄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 모든 일들 뒤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바르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은 언제나 만족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날마다의 삶에서 만족함을 느끼고 있습니까? 나의 삶에서 얼마만큼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바울이 왜 이토록 만족함을 느끼는 삶을 살고 있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왜 바울이 그토록 만족함을 누렸는지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리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성도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는 초능력자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 어떤 행위도 다 용납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의미는 더욱 아닙니다. 지금 바울이 자족의 비결을 이야기하고 있는 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초능력자가 됩니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을까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다 해도 괜찮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마도 이 세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위해서 발버둥을 칠 것입니다. 아마 자신의 전 삶을 다 버리고 오직 예수를 믿기 위해서 달려들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다 예수를 믿는 결과를 낳을 수는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오해하기 쉬운 구절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12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76절에서는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우리가 믿음만 있으면 초자연적인 일, 즉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라 할지라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산을 옮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뽕나무를 바다에 심을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있었던 제자들은 모든 일을 다 해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들에게도 넘을 수 없는 문제들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학적인 표현으로만 치부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우리기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을 수행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표현대로 많은 병자들을 치유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습니다. 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도 극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사도행전적인 역사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지, 그 믿음을 가지고 능력을 나타내는 일을 강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에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신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사는 과정에서 예수님의 그 말씀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경험한 그 일들을 가지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것(πάντα)”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다만 모든 상황, 즉 모든 좋은 환경과 모든 나쁜 환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일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여기까지 달려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 모든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복음을 위해 달려오는 동안 참으로 건너기 힘든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기는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모든 일들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겨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자신있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10절에서 바울은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48-9절에서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한없이 약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무시합니다. 우리를 비난합니다. 우리를 박해합니다. 저 세상은 우리를 우겨싸서 우리를 답답하게 합니다. 우리를 거꾸러뜨리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주 강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긴 존재들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우리를 공격해도 우리는 거뜬히 이길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위해 살아갈 때,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아갈 때, 우리가 교회를 위해 살아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면 우리는 많은 환경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좋은 환경을 만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나쁜 환경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환경에 의해서 우리의 길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좋은 환경을 만났다고 거기에 안주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쁜 환경을 만났다고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도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본문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자라고 했습니다. 사실 본문에 내가 할 수 있다(σχύω)”라고 하는 표현은 능력을 가졌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자신이 배워서 가진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연습을 통해서 닦은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오랜 경험을 통해서 적응한 것도 아닙니다. 바울의 그 능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힘이나 능력이 아닌 자신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다 보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선배들의 모습을 통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오랫동안 교회에 다닌 사람들은 교회의 일들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아주 능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람의 믿음이 좋아서 일을 잘 처리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또한 본인은 자신이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서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 아집과 결합하면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의 논리와 방법만을 주장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이고, 자신의 방법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엄청난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는 결코 어떤 한 사람의 논리나 방법으로 진행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이나 교회를 향하여 아주 귀중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는 기준입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이 능력을 주시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의 성경에서는 뒤에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첨부해 놓음으로 그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첨부가 없다고 할지라도 능력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기에 거기에 대해서 논쟁하지 않습니다.

 

 

또한 안에서(ν)”라고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안에(in)’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때때로 말미암아, 통해서(through)’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결국 본문에서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라는 뜻과 함께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그 주님의 능력을 우리의 능력으로 나타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15:4).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에 대해서 분명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12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큰 일은 질적인 면에서의 더 큰 일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한 의미라면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질적인 것이 아니라 양적인 의미로 쓰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 그리고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지역보다 더 넓은 지역,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3년이라는 짧은 시간과 팔레스타인이라고 하는 좁은 지역에 활동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오늘의 우리는 더 긴 시간과 더 넓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더 큰 일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국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입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결코 나 자신이 뛰어나고, 나 자신이 지혜롭고, 나 자신의 능력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성취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그리스도인은 위대한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 믿음으로 세상을 정복합니다. 따라서 그 믿음을 가진 자들은 위대합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로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이겨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통해서 드러나게 하십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를 믿는 자임을 자부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거나 좌절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서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함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