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뿐입니다
누가복음 9장 28-36절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성도 여러분! 올해 2024년 우리 광성교회는 「우리의 시선, 오직 예수」라는 표어를 가지고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작년 송구영신 예배는 히브리서 12장 2절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만이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예수만이 우리의 믿음을 완성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만이 우리의 구원자요,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를 바라봄으로 우리의 믿음을 지키게 되고, 예수를 바라봄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올 한 해를 지나오는 동안 우리의 시선은 얼마나 예수님을 향해 맞추어져 있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느라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산 시간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말로는 예수님을 바라본다고 했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아닌 나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본 우리의 삶은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2024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이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만을 바라보자」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는 우리가 자꾸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또한 자꾸 그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주장할 때까지 그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는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할까요? 말끝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면서 그 예수만 바라보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을까요? 이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구원, 우리의 사명, 우리의 영원한 소망, 이 모든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다면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없는 믿음, 예수가 없는 구원, 예수가 없는 우리의 삶, 예수가 없는 소망이 무슨 의미입니까? 결국 오늘 우리의 존재 의미도 예수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숨을 쉬며 사는 것도 예수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일이라고 하는 소망을 가지는 것도 예수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다른 것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예수가 아닌 다른 것을 붙잡으려고 합니다. 예수 아닌 다른 것에 소망을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에게 허무함만 안겨줄 뿐입니다. 예수가 없는 인생의 결국은 거기에 이르고 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세 제자(베드로, 야고보, 요한)와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에서는 “높은 산”이라고 소개하고 있고, 이를 토대로 해서 이 산에 헤르몬산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어느 산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산에 어느 산이냐 하는 문제는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 산 위에서 예수님과 관련되어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왜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착하고 집중하는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분을 따라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2024년을 마감하는 주일에 올해의 주제를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오직 예수뿐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29절에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도하는 그 시간에 엄청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모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용모가 변화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동일한 광경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7장 2절에서는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었다는 것은 그분의 형체가 변화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몸집이 커졌다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모습처럼 변화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얼굴에서 햇빛과 같은 강력한 빛이 발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예수님의 용모는 제자들의 눈에 띌 정도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다른 하나의 변화는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동일한광경을 기록한 마가복음 9장 3절에서는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광채는 마치 금속을 문질러서 번쩍거리고 빛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옷에서 이러한 광채가 났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느끼는 그러한 광채가 아닌 아주 신비한 광경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예수님의 변화는 단지 예수님의 육신이나 옷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분명 예수님 안에 충만하게 내재하고 있는 신성(神性)이 표출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영광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광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것이요,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장면을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은 성막, 또는 성전과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광야에서 성막을 완성했을 때, 하나님이 영광이 성막 안에 충만했습니다(출40:35).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했을 때, 성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습니다(왕상8:11).
그런데 이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영광이 표출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9절 이하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채가 여호와의 영광에서 투영된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모세의 얼굴을 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설 때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는 그 자신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수건으로 그 영광을 가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광채는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체로부터 표출된 영광의 광채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입은 옷이 그 광채를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옷조차도 그 광채의 영향으로 밝게 빛날 뿐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광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본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빌2:5). 그리고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일로 말미암아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 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천상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요한은 그 모습을 요한계시록 1장 13~16절에서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장면을 종합한다면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비록 그분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고, 사람의 모습으로 살고 계시지만, 그분 안에는 신성(神性)으로 충만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 만물과 그 가운데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통치주이십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과 그분에게서 나타났던 그 광채는 예수님의 신적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이요, 그 모습은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장차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이요, 그 백성들과 함께 영원한 천국에서 왕노릇 하실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Ⅱ.예수님만이 구속자이십니다.
본문 30~31절에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자들에게 더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영광스럽게 변화된 예수님 앞에 갑자기 두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 두 사람은 바로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예수님이 변화된 이 장면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다고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들이 예수님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분명 예수님과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모세는 비록 죽었지만, 유대인들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믿는 자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자로(왕하2:11), 유대인들은 그가 다시 올 것이라고 대망하고 있던 선지자입니다(말4:5, 막9:11).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했던 자들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목격했고(출31:18),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했던 사람입니다(왕상19:8).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을 선지자, 곧 메시야를 예언했습니다(신18:5). 그리고 엘리야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인물로 예언된 사람입니다(말4:5). 이처럼 이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이 변화된 이 장면에서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의미는 모세가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이요,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그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 모든 내용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었습니다(마5:17),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구약과 단절된 분이 아니라 연속되는 분이요, 성취라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서 복음은 성경 안에서 결코 모순이 없음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이 두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타나서 나눈 대화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원문에서 보면 여기에는 아주 특이한 세 가지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표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장차 ~하실”이라고 번역된 단어(ἤμελλεν)입니다.
이 단어의 본 뜻은 ‘임박한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일이 확실하게 일어날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시는 사건은 반드시,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것임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것을”이라고 번역된 단어(πληροῦν)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 ‘계속적으로 채워짐을 통하여 성취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정’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약속된 미래를 향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감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의지적 죽음임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세 번째는 “별세”라고 번역된 단어(ἔξοδον)입니다.
이 단어는 ‘~으로부터 벗어남’을 가리키는 단어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이 땅의 삶으로부터의 벗어남, 죽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이 단어를 사용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보통 사람의 죽음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고, 여기에는 출애굽의 의미가 분명하게 포함되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출애굽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의미하듯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의 영원한 구원을 위한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변화된 이 장면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고, 또한 그 두 사람이 예수님과 장차 예루살렘에서의 일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십자가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장면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만이 바로 나와 여러분의 구속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모세와 엘리야가 위대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의 구속자가 아닙니다. 저들도 우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상일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바로 나와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Ⅲ.예수님만이 주(主)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랐던 제자들은 곤하여 졸다가 산에서 펼쳐지는 엄청난 상황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떠날 때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했습니다(33절).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황홀한 광경에 압도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 밑에서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배척하는 무리를 보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며 삼일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광경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영광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저 산 밑으로 다시 내려갈 것이 아니라 이 영광스러운 상태로 여기서 머물러 있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참 모습과 그분의 사역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얼마 전에 예수님 앞에 고백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마16:16).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한 발걸음을 막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마16:233).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영적 무지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베드로만의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함께 있는 야고보와 요한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황홀감에 빠져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구름이 와서 저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그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본문 35절에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먼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의 말과 엘리야의 말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전한 말도 분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이는 저들은 그림자요,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저 모세의 율법과 엘리야를 중심으로 하는 선지자들의 예언에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본문에서 말하는 “그의 말”은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든 것, 즉 그분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 36절에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의 눈앞에는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이미 사라졌습니다. 이는 모세와 엘리야의 사명이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저들은 자리를 양보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세와 엘리야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그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다고 하는 것은 흥분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모세와 엘리야가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저들이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저들이 우리를 인도하는 참 목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인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시는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바라보아야 하고, 따라야 하는 주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존재도 우리의 주인은 될 수 없습니다. 그가 비록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존재일지라도 우리의 주인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시선을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 땅의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 땅의 그 누구도 우리에게 영원한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오직 예수만 바라보며, 오직 예수를 외치며, 오직 예수만을 따라가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4년뿐만 아니라 우리의 남은 생애와 저 영원한 세계에서까지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행복은 양들이 될 수 있기를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