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

 

요나 19-12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성도 여러분! 성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등장하는 사람 가운데는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인생은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내용으로 채워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 편의 영화와같이 아주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였던 요나라고 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을 만나보기를 원합니다. 이 요나는 비둘기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주전 약 660년경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이때의 북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솔로몬 이후 최고의 부흥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 북쪽에서는 앗수르라고 하는 제국이 강성해졌고, 호시탐탐 남하하여 그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무리 부흥기를 누리고 있다고 할지라도 앗수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시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요나서는 아주 특이한 책입니다. 구약시대에 기록된 책이면서도 이방 세계에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이방의 구원을 전면에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어찌 선민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 민족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할 수 있는가?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고, 장차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저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이 충분히 던져질 수 있는 시대적인 배경과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서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특히 구원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 당신의 뜻을 위해서 그 모든 만물을 사용하는 전능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세우신 사람 요나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설득하시고 이해시키시고 깨닫게 하심으로 자신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시는 자비로운 분으로 나타나기도 하십니다.

 

 

결국 요나서는 자기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세상 밖으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먼저 택함과 구원을 받은 자기 백성을 통해서 저 세상 밖에 있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요나서에 등장하는 내용, 즉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시간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의 예표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9절에서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라는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요나서에 기록된 내용이 한낱 전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며,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본문은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시는 명령을 받은 요나가 그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는 요나서 1장 전체를 통해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를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폭풍 가운데 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하는 요나

 

 

본문 1-2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니느웨 성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니느웨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800km 정도 되는 먼 길입니다. 오늘날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결코 쉽지 않은 길입니다. 또한 니느웨는 당시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따라서 선민 이스라엘을 자부하는 요나가 이방 민족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음에도 하나님은 요나라고 하는 선지자를 니느웨로 보내십니다.

 

 

여기에서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일어나라(קוּם)” 입니다.

이는 단순히 앉아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단호한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이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는 가라입니다.

 

이는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그의 발로 직접 니느웨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도시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에서 펼쳐질 역사에서 요나의 헌신과 충성을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셋째는 외치라입니다.

이는 요나가 궁극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명의 내용입니다. 지금 니느웨는 죄악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박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가 니느웨라고 하는 도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요나는 이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 이제 하나님의 명령이 요나에게 내려졌습니다, 이제부터는 요나가 해야 할 일만 남았습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단호한 결단을 내리고, 그 결단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니느웨를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나의 반응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본문 3절에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다시스는 오늘날 지중해 서쪽의 스페인에 있는 고대의 유명한 상업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보면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도시는 세계의 끝이나 다름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이 다시스로 가려고 하는 이유를 본문에서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멀리 도망가면 하나님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요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9). 따라서 지금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했다는 것은 자신이 이해되지 않은 이 명령을 이행하는 선지자로서의 직분을 감당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려고 결단한 즉시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요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스로 가는 배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나에게는 그 배를 탈 수 있는 돈까지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요나는 일이 자신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라서 불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순종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불순종해도 나에게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내 삶이 순탄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능히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생각.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내 뜻대로 모든 일들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이 우리에게는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 때문에 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저들의 끝은 결국 영원한 멸망입니다. 지금은 저들이 그 엄청난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 그 날이 되면 저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완악함을 인해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24:51).

 

.폭풍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본문 4절에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도망하는 요나를 하나님이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당신의 뜻을 포기하거나 변경하시는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도망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니느웨를 향한 계획과 역사를 포기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로 하셨다면, 니느웨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선포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위해 니느웨에 요나를 보내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요나는 반드시 니느웨로 가야만 합니다. 이에 대해서 그 누구도 반대할 수 없고, 방해할 수 없고, 거역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이 요나를 붙잡으시기 위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폭풍으로 요나를 찾아오셨습니다.

분명 요나가 탄 배는 다시스로 가는 배입니다. 그런데 이 배가 다시스로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폭풍으로 그 배가 가는 길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지중해에 일어난 폭풍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내리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라고 하는 단 한 사람의 발을 막기 위해서 그 큰 배를 붙잡으신 것입니다. 지중해의 물결이 요동을 치게 만들어서 요나가 탄 배가 저들의 목적지로 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과 경험을 사용해서 이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다 바다에 버리면서까지 배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역사 앞에서 인간의 힘과 노력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제비를 요나의 손에 들려주셨습니다.

자신이 탄 배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요나는 배의 밑층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5). 물론 지금 요나는 육신적인 깊은 잠에 빠져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깊이 잠들었는지, 지금 배가 만난 이 위기의 상황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나타난 요나의 잠은 그의 영적인 상태까지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감당하기 싫은 사명을 벗어버렸다는 마음으로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요나의 신앙 상태가 마치 죽은 자처럼 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깊이 잠들어 있는 요나를 깨우셨습니다, 배의 선장이 잠들어 있는 요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라고 책망합니다. 이 말은 네가 이 상황에서도 잠을 자고 있느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결국 저 선원들은 이 풍랑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제비를 뽑기로 했습니다. 당시에 세계에서 제비를 뽑는 일은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미래를 점치거나, 숨겨져 있는 원인을 발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제비가 요나를 지목했습니다. 이는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과정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잠언 1633절에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세상의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제비까지도 주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비를 통해서 요나를 지목하셨습니다. 이제 요나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단단히 붙잡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요나를 위해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본문 12절에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요나의 태도를 우리가 두 방향에서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끝까지 하나님 앞에 엎드리기를 거부하는 요나로 보는 것입니다.

사실 이쯤 되면 요나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불순종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러한 자세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함으로 인해 이 상황을 끝내고자 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으로 인해 고생하는 선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책임 의식은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나타내야 하는 모습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물고기를 준비하신 것도 단순히 요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철저하게 회개하게 하시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결단의 자리로 이끄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요나로 보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요구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 바다에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대로 그는 자신의 하나님에 대해서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고백했었기 때문입니다(9). 또한 그는 본문에서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온전히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려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도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하나님 앞에서 도망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후에 일어날 역사도 분명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요나는 이제 그 하나님께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 바다에서 죽게 하시든지, 아니면 살리셔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든지, 하나님의 손길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모습 가운데서 어느 것이 옳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요나는 이 둘 중의 어느 하나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의 모습이 다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이든지 그것보다는 그러한 요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역사를 더 중요하게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나를 바다에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17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 하나님은 이미 준비하신 큰 물고기에게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사실 본문에는 예비하사라고 번역했지만, 이는 명령하셨다라는 의미가 더 강한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면서, 또한 그 모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폭풍을 일으키셨고, 제비를 요나의 손에 들리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박넝쿨을 자라게 하시고(4:6), 벌레에게 그 박넝쿨을 먹게 하십니다(4:7). 또한 그 하나님이 뜨거운 바람으로 요나의 머리에 불게 하십니다(4:8).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당신의 뜻과 목적을 따라 운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특히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는 자라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을 입은 자라면, 내가 저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는 자라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일하는 일꾼이라면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손길을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크게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없이 평탄한 삶을 사는 것보다 풍랑 속이라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행복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요나를 다시스로 가도록 버려두셨다면 요나의 인생이 행복했을까요? 아닙니다. 풍랑을 통해서 찾아오신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린 요나가 행복한 것입니다. 비록 그 때는 고통스럽지만 결국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임이 드러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이토록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또한 변덕스럽고도 당돌하며 잘 토라지고 불평 많은 하나님의 일꾼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요나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요나는 끝까지 추격하시고,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당신의 사람으로, 사명자로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폭풍으로 찾아오심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지금 폭풍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고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큰 물고기를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당신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원하기는 언제 어떤 상황이든지 나를 찾아오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