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편 23편 1-6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存在)요, 다른 하나는 관계(關係)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존재가 시작됩니다. 그와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재는 유한하지만, 관계는 영원합니다. 즉 존재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만 그 의미를 가지지만 관계는 존재가 사라져도 남는 것입니다. 따라서 존재보다 관계라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관계는 부부관계입니다. 이 관계로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관계들이 파생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맺는 관계는 그의 전 인생을 이루어 온 과정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을 평가하는 기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아주 특수한 것입니다. 이 관계는 나의 노력이나 나의 주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관계는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나와 맺은 관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나를 구원하심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렇다고 이 관계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이 관계로 인해서 내가 세상에서 무엇인가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관계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이 관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안만 우리에게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영원한 나라에서도 유익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아주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내로 부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시고 우리를 종으로 부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대리자로 부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고 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신다고 하십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는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특수한 것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를 인하여 내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요,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와 아주 특수한 관계 하나를 보여주십니다. 본문 시편 23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통해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The Lord is My Shepherd)”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양과 목자의 관계는 유목을 주업으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관계입니다. 또한 다윗도 어린 시절에는 양을 치는 목동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 관계가 가지는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삶 속에서 그 의미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이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아주 특별합니다. 양이라고 하는 동물의 특수성으로 인해서 목자는 양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늘 양과 함께 생활합니다. 함께 자고 함께 일어나며 잠시도 떨어져서는 안 되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양의 행복과 불행은 오직 목자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목자와 양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면서 다윗의 고백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내가 그분의 양이 됨에서 누리는 나의 행복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한편의 그림과 같은 묘사를 통해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부족함이 없다”라는 것은 풍성하다는 것보다는 ‘참된 만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목자가 되심으로 인해 다윗은 언제나 만족함을 누릴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의 인생이 평탄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윗의 생애가 얼마나 파란만장했습니까? 그가 겪은 환난이 얼마나 심한 것이었으며, 또한 목숨의 위기가 얼마나 많았었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삶의 모든 순간들 가운데서도 만족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애에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온갖 필요한 것들을 정확하게 공급하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다윗은 늘 부족함이 없는 만족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자신의 만족한 삶을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십니다.
본문 2절에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풀밭”’은 양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양식이 되는 풀을 공급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 풀밭은 양이 쉴 수 있는 ‘휴식처’, 또는 ‘거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나타내는 “푸른 풀밭”은 양이 충분한 풀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임과 동시에 팔레스틴의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피해서 쉴 수 있는 그늘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본문 2절에 “그가 나를 …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쉴만한 물가”는 아주 잔잔하게 흐르는 물이 있는 곳입니다. 양은 겁이 많은 동물이기에 물이 거세게 흐르면 결코 가까이 접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태양에 의해서 갈증이 심한 양들에게 있어서 잔잔하게 흐르는 물은 양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을 좌우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에게 인도된 양들은 그 물을 통해서 새 힘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본문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소생한다”라는 것은 ‘되돌아오게 한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다는 것은 다윗이 범죄했을 때, 또는 그 결과로 말미암아 곤경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제자리를 찾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본문 3절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의의 길”은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형통의 길이나 평탄한 길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실 목자는 양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길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 이르는 길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그 길을 걷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을 의의 길로 인도하심은 다윗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심은 일차적으로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끝까지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하실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국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목자요, 내가 그분의 양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진정 행복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에 있는 한 우리에게는 만족함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필요와 문제에 대한 해답도 다 가지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양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 가운데서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참된 만족을 누릴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를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징계를 통하여, 때로는 회복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를 바른 길로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Ⅱ.내게 두려움이 없습니다.
본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다윗의 인생에는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는 들에서 양을 치는 동안 때로는 곰이나 사자와 같은 들짐승들과 싸워야 했습니다(삼상17:34-35). 그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 싸워야 했습니다(삼상17:41-49). 그는 사울의 창을 피해서 도망해야 했습니다(삼상18:11,19:10).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추격했고,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서 도망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아마도 요나단의 우정이 없었더라면 다윗의 생명을 보장받지 못했을 것입니다(삼상20:17). 때로는 이방의 나라에서 미친 사람의 행세를 해야 했습니다(삼상21:10-15). 때로는 블레셋에 망명하기도 했습니다(삼상27:1).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지만, 그에게 환난의 시간은 아직도 남아있었습니다. 자기의 아들인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해야 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삼하15장-18장).
본문에서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바로 자신의 인생에서 그토록 위험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는 단어였을 것입니다. 이 표현을 쉽게 풀이한다면 죽음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자신에게는 그러한 죽음의 골짜기가 조금도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분명하게 제시하기를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목자가 되시는 한 다윗에게 있어서 그 어떤 환난과 위험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다윗을 두렵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팔레스틴 지방은 산지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곳에는 어김없이 들짐승들이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들이 목자 없이 골짜기를 지나는 것은 엄청난 위험입니다. 목자의 인도가 없이 이러한 골짜기를 지나는 양이 있다면 이는 들짐승들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자가 양떼를 거느린다면 양들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그 골짜기를 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골짜기에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위험들이 양떼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이는 바로 목자의 역할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위협하는 들짐승들로부터 양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기 때문입니다. 다윗 자신도 들에서 아버지의 양을 칠 때, 곰이나 사자와 같은 들짐승의 위협으로부터 양을 지켰던 경험이 있음을 고백했었습니다(삼상17:34-35).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가 지니고 다니는 도구입니다. 이들은 양떼를 인도하는데 사용되기도 하며 또한 양들을 위험에서 건져내는 도구이며, 들짐승들을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합니다. 목자는 이 도구들을 잘 다루기 위해서 평소에도 많은 연습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순간에는 곧바로 사용하여 자기의 양들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다윗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신 분입니다. 또한 완벽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자신이 지금 어떤 환난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바로 자신의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한 보호자가 되십니다. 비록 우리의 인생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들을 발생합니다. 그 행로에는 사자와 곰이나 이리와 같은 맹수들이 우리를 삼키기 위해서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잠시만 방심하면 덤벼들어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는 한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안전하게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양인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붙들고 있는 성도는 그 어떤 위협이나 위험으로부터도 상함을 입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Ⅲ.최후의 승리자가 됩니다.
본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양과 목자의 관계였지만 여기에서는 잔치 석상의 주인과 손님의 관계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다윗은 현재보다는 미래에 펼쳐질 안전과 평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윗의 복되고 아름다운 모습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자가 되신 결과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다윗의 주변에는 많은 원수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항상 다윗의 목숨을 노리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서 가장 안전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항상 승리자의 자리에 서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승리의 모습을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기의 “상(床)”은 식탁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식탁은 깊은 교제와 언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식탁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승리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또한 목자는 양에게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풍성한 풀을 공급해야만 합니다. 주변의 짐승들이 둘러싸여 있다고 할지라도 목자가 지켜주는 동안 양들은 그 풍성한 식사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러한 식탁을 베풀어주셨고 그 식탁에 함께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목자와 같은 모습으로 함께 하시고 다윗에게 가장 완전한 승리를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 대해서 끝까지 신실하게 이행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둘째는 기름으로 머리에 바르셨습니다.
여기의 “기름”은 잔치 때에 주로 사용하는 향유를 가리킵니다. 이 향유는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이 손님들의 머리나 수염 등에 바름으로 그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했던 것입니다(눅7:46). 따라서 이 기름을 발랐다고 하는 것은 주인이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높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머리에 그 향유를 바르셨다고 고백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토록 인정하시고 모든 사람 앞에서 그를 높이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최고의 자리에 서게 하셨습니다. 가장 안전한 자리, 가장 고귀한 자리에 서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원수들이 둘러싸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윗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최고의 승리를 누리고 있는 다윗은 자신의 잔이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며 자신의 이러한 행복이 영원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분명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이 언약이 영원토록 자기와 함께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로 인해 자신은 하나님과 더욱 깊은 교제의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대적들이 있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대적들로 인하여 우리가 불안해하거나 마음을 졸일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약해서 때로는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패배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록 잠시 넘어질지라도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일어나서 전진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승리를 보장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인하여 우리에게 가장 안전함으로, 가장 평안함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분만 따라가면 됩니다. 나머지는 그분께서 다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괜히 조급해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양인 우리를 아십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어야만 하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우리의 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아십니다. 그래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친히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이라고 하는 사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이 채우시는 하나님, 우리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최후의 승리를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원하기는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양으로, 그 목자만을 따르며, 그 목자와 함께함으로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