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25. 광성교회 주일 낮 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69)

  본문 : 막 14:10-11

  제목 : 배반자 가룟 유다.

 

  “10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1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

 

  최근에 화려한 은퇴라는 책 제목이 좋아서 한번 읽어봤습니다. 은퇴 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덕목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관용과 나눔과 사명감이라고 했습니다.

 

  관용 즉 너그러움은 나이 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 속이 좁아지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오랜 삶의 경험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지식과 경험이 오히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평가하는 데 사용합니다.

 

  나눔 즉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서 사는 삶도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일수록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 움켜쥐려고 하는 마음이 더 많아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 쓰지도 못하고 두고 갈 것이지만 오히려 애착심을 가지고 나누어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명감 즉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있음을 알고 끝까지 그 사명에 충성을 다하려는 마음입니다. 나이가 들면 그런 목적의식이나 책임감을 잊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 가지 덕목은 나이 든 사람에게뿐만 아니라 젊은 사람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관용이나 나눔이나 사명감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관용을 통해서 용서함을 받은 우리도 관용을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 성도에게 요구하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들이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각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구원받은 우리 성도는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인 줄 알고 그 사명을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는 이런 덕목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주 정반대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마저도 배반해 버리는 아주 사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고 맡은바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 사명을 저버린 어리석고 악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세상 살아가면서 웬만하면 사람을 배반하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나를 믿고 의지하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배반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악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한 은혜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주 사악한 일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을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넘겨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였고 그때부터 유다가 예수님을 그들에게 어떻게 넘겨줄까를 생각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간단하게 그 사실만 기록하였고 그 이유나 결과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뒤에 가면 이 계약대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었고 다른 성경에서 그 최후가 어떻게 되었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가룟 유다가 갑자기 예수님을 배반했는지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여러 가지 사정들을 살펴보면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입니다.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실컷 이야기했는데 그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신중하게 듣지 않으면 엉뚱하게 들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41절에서 11절까지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유대교 지도자인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등장하고 한 여인(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이 등장하고 그리고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따른 사람의 대표와 반대로 잘 알아듣지 못한 사람의 대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믿고 따른 사람이고 나머지는 잘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짓을 한 사람입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많이 접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을 가장 바르게 알아들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집전하는 성전에서의 제사는 우리가 제물로 드리는 짐승처럼 비참한 죽임을 당하여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인 어린양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알고 기다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기관은 구약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오실 그리스도였습니다.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나 구약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셨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다음 등장하는 한 여인인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고 믿고 따른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11:27)라고 대답했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인 줄 알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알아듣고 믿고 그 믿음을 따라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도 마리아보다 그런 말씀을 더 가까이서 더 많이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반대로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기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했어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리아 같은 사람보다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가룟 유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거나 알아들어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많은 목사들이 그렇게 성경을 많이 읽고 그렇게 신학을 오랫동안 공부하고 그렇게 설교 준비를 많이 했으면서도 막상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잘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믿지 못하거나 믿으면서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잡아 죽일 방도를 연구하거나 배반하고 팔아넘기려고 하는 사람들처럼 십자가의 복음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배반하려고 합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교회에 출입하고 성경 공부를 많이 하고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30년 넘게 설교하고 깨달은 것은 성도들이 설교를 듣지 않거나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가 되어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설교를 듣지 않습니다. 설교 듣다가 그 중요한 하나님 말씀을 듣다가 대수롭지 않게 밖에 나가는 사람 듣고 앉아는 있어도 딴 생각하는 사람 빨리 끝나기만 기다리는 사람 아예 잠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가 그런데 그 말씀을 기억하고 실천하기란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데요 소중하게 귀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데요 무슨 변화가 있고 무슨 실천을 기대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크게 요구하신 것은 이스라엘아 들으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남의 말 듣는 것 제일 싫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제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에 외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성경의 핵심이자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십자가의 복음을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이단 교회가 너무 많고 정상적인 교회라고 해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복음과 정반대되는 것을 설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에 복음을 들을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 중에도 알곡이 아닌 가라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라지들은 진리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리 소중한 진리를 이야기해도 듣지 못합니다. 가라지들은 진리의 말씀보다 세상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더 좋아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때로는 피곤해서 때로는 복잡한 일 때문에 설교 듣는 일을 좀 소홀히 할 수도 있습니다. 맨날 듣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인데 한두 번 안 듣는다고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문제는 혹시 들을 귀가 없는 가라지가 아닐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 때문에 걱정하는 것입니다.

 

2) 세상을 향한 욕심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그리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유는 세상 욕심이 많아서입니다.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기득권 때문에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심을 인정하기 싫어했습니다.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는 그 자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자리이고 권력이 있는 자리이고 돈이 되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알량한 세상의 일 때문에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린 것입니다. 그 작은 것을 위한 욕심 때문에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의 핵심이 되시는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되는 엄청난 특권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직접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듣고 배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 때문에 그 엄청난 지위를 차버린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세상의 왕이 되시기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왕이 되시면 그 밑에서 한자리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 세상을 향한 욕심 때문에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을 배반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욕심을 채우려고 교회에 오는 사람은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 욕심을 가진 사람은 성경을 읽어도 그 뜻을 자기 욕심 채우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게 해주고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해준다는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세상을 향한 욕심은 어떻게 하든지 세상에서 잘 살고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 일에 몰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좀 더 잘 살고 보람된 일도 많이 하고 사람들에게도 존경받는 위치에 오르게 하는 귀한 것입니다. 그런 욕심이 너무 없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욕심이 너무 지나쳐서 너무 많은 것을 가진 부자가 되려 하고 너무 높아져서 사람들에게 자기를 자랑하는 교만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면 좋겠지만 부자가 되면 십중팔구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돈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잘난 사람 칭찬받는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의 십중팔구는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친다고 하신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세상의 부요함과 교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귀 있는 자가 꼭 들어야 할 십자가의 복음을 듣지 못하게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3) 사탄의 역사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 22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22:3)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있는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사탄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서 그를 조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사탄이 역사하니까 그냥 그 엄청난 악한 일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이 가진 욕심에 가장 쉽게 침투합니다.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고 하고 세상에서 잘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욕심에 가장 쉽게 침투하고 인간은 가장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참 이상하게 생각되는 일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머리가 좋은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 복음을 더 잘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질 줄 알았는데 공부 많이 한 사람일수록 똑똑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아는 그 알량한 지식 때문에 가장 소중한 십자가의 복음을 무시하고 자기가 깨달은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엉뚱한 것을 믿음이라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일이 바로 이 사탄의 역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탄이 그 교만에 가장 쉽게 침투하고 가장 쉽게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될수록 많이 배울수록 이 사탄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복음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

 

  배반자의 최후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돈 몇 푼 받고 팔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나쁜 마음 한두 번 먹는 것은 자주 있는 일입니다. 교회를 떠나고 싶은 마음도 가끔 생기고 신앙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가끔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 먹었다가 후회하고 회개하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탄이 개입하면 그런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탄이 들어와서 한번 먹은 악한 마음이 고쳐지지 않게 막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왔을 때 대제사장들이 돈을 주기로 선뜻 약속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약속을 바로 시행해서 은 삼십을 달아서 주었다고 했습니다. 계약금뿐만 아니라 전체 금액을 바로 다 지급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지 못하게 막아버린 것입니다.

 

  여러분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무슨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을 떠난다는 생각은 예수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사탄이 그런 생각을 한 여러분이 회개하고 돌이키지 못하게 가로막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회개할 기회도 놓치고 그 계약대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먹는 배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은 삼십이 오늘날의 돈으로 얼마나 되는지 정확하게는 잘 모릅니다. 몇 푼 안 되는 아주 작은 액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팔아서 집을 한 채 산다거나 팔자를 고칠 그런 엄청난 액수가 아니었습니다. 푼돈 몇 푼 때문에 그렇게 위대하신 분을,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가 되시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다니요?

 

  그 결론은 나중에 후회하고 돈을 도로 갖다가 주고 자신은 스스로 목을 매달아서 자살했다고 합니다. 회개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잘 못을 알고 나서 어리석었던 자신을 그냥 죽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안 믿고 교회를 떠난다고 해서 엄청난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오는 시간 아끼고 헌금할 돈 알뜰하게 모은다고 해서 엄청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까짓 작은 이익 좀 챙긴다고 이렇게 엄청난 일을 포기해요? 이렇게 위대한 믿음을 포기해요? 이렇게 엄청나신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나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룟 유다의 어리석음을 기억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돈 때문에 세상의 출세 때문에 세상의 쾌락 때문에 이 귀한 믿음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시며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나 대신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반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