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받으라
빌립보서 3장 17-19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성도 여러분! 오늘날 사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맨토(mentor)”와 “멘티(mentee)”입니다. 맨토는 조언자(助言者), 또는 스승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고, 맨티는 조언을 받는 자, 또는 제자를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괴정에서 이러한 조언자나 스승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어떤 맨토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훌륭한 맨토를 만나기 위해서 관심을 쏟기도 합니다.
동양의 위대한 사상가였던 공자는 "三人行이면 必有我師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세 사람이 함께 걸어가면 그 중에 한 사람은 내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훌륭한 맨토를 만난다면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혹시 나는 이미 그러한 맨토를 만났습니까? 아니 진정한 맨토를 아직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맨토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은 것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맨토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러한 맨토는 우리의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언제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너무 높은 수준의 맨토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우리의 눈을 너무 높이다 보니 소중한 맨토의 가르침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는 이 맨토가 더욱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그 길을 달려갑니다. 그들이 내 경쟁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내 신앙의 여정에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 가운데는 내게 맨토가 될 만한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가 그 맨토를 바로 찾아내고, 그 맨토가 내 신앙을 바로 이끌어 주고, 바로 잡아 주고, 바로 교훈해 준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좀 더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또한 맨티로서의 우리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내 주변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고 권면하는 맨토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맨토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내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만, 또한 우리 주변의 맨토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맨토를 통해서 우리가 바른 신앙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따라서 맨티로서의 우리는 늘 배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 인도하는 맨토의 도움을 소중하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훌륭한 맨토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세워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것입니다. 성도들을 바른길로 인도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생명까지라도 아까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이 이제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나를 본받으라”라고 권면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에는 예수님께서 주신 영적 자유를 방종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반도덕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저 반도덕주의자들을 본받지 말고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본받는다(συμμιμητής)”라는 것은 ‘모방한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모방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본받는다면 이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나를 본받으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7절에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들아(ἀδελφοί)”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호칭은 3장에서만 세 번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1절, 13절). 이 호칭은 바울 자신과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평등한 자리에 세우고 있습니다. 또한 서로가 동일한 영적 가족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뒤에 이어서 하고자 하는 “나를 본받으라”라는 말에 대해서 혹시라도 있을 오해를 방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하는 모델로 과감하게 자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 자신이 그토록 잘났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표현을 통해서 자신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보다 더 훌륭하다고 내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도라고 하는 특권이라 자신이 지금까지 이룬 업적을 자랑하고자 함도 아닙니다. 물론 바울은 앞에서 자신의 자랑거리를 이야기했습니다. 즉 자신은 교회 앞에 많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랑거리들로 인하여 바울이 우월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화를 향하여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은 더욱 낮추고 겸손한 모습을 저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희생하고자 하는 모습을 본받으라고 합니다(고전11:1),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고 하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살전1:6), 바울 자신이 가장 고상한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모습(을 본받으라고 합니다(빌2:6-11), 바울은 자기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선함을 찾으려는 모습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바울이 비록 사도이지만 아직은 완전함을 이르지 못하고 다만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에는 크게 두 갈래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부터 사도 바울을 따랐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바울의 교훈과 가르침을 따라가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부인하고 바울의 교훈과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유대주의자들의 교훈을 좇으려고 하는 자들이요, 반도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로 인해 교회에 혼란이 생기고 분열의 위험이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과 헌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지침이 될 모델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과감하게 자신을 모델로 제시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대상으로 바울 자신만을 내세우지 않고 함께 동역하는 자들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은 바울의 곁에서 바울을 본받아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동역자들을 가리킵니다. 빌립보서에 등장하는 사람으로 본다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을 찾으라면, 이들은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을 본받아 충성하는 자들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바울은 저들을 “눈여겨 보라(σκοπέω)”라고 했습니다. 이는 ‘주목하라. 그리고 따르라’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너희는 이 사람들을 주시하고 저들의 삶 가운데서 내가 가르쳤던 교훈의 증거들을 찾아보라. 그리고 너희도 그들처럼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 바울의 믿음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기준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누구보다도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믿음에 관하여는 그 어떤 타협도 없었고, 양보도 없었습니다. 그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려고 하는 자에게는 여지없이 저주를 선언하면서 그 복음을 사수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 복음을 위한 헌신의 모습은 누구에게도 모범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생을 걸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달려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을 본받아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어 가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 자신이 온전함을 향하여 달려가는 자세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힘써 달려가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하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또한 본받을 만한 기준이 되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완전할 수 없지만 그 완전을 향하여 날마다 성숙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직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도, 모방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보내주신 우리의 맨토를 모방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맨토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모방해야 합니다. 그의 복음을 향한 열정을 모방해야 합니다. 그의 교회를 향한 사랑을 모방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누군가의 맨토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평생을 맨티로서 살아가지만, 우리가 성숙해서 언젠가는 누군가의 맨토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가게 됩니다.
Ⅱ.거짓 교사들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는 빌립보 교회 안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을 지칭하는데, 이들에 대한 바울의 거센 반감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여기의 “십자가”의 정신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원수(ἐχθρός)”는 ‘대적자, 대항자’라는 뜻입니다. 결국 자기 탐닉의 정신으로 사는 자들이나 자기의 의로 똘똘 뭉쳐서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자들은 십자가의 원수된 자들입니다.
자금 저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반도덕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자유를 왜곡하여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모든 조항을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에서 금지하는 그 어떤 일도 그리스도인들을 억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19절에 등장하는 죄악의 일들을 행함에 거침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 아니라 방종을 일삼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이들을 따른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번에 걸쳐서 저들을 경계해야 함을 말해 왔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반복적인 경계와 주의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교회 안에는 아직도 저들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대해서 바울은 큰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본분에서 바울이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라고 한 것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얼마나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의 “눈물을 흘린다(κλαίω)”라는 표현은 단순히 조용하게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북받치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고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고 애곡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도 이러한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에베소 교회에서는 4년간 눈물로 훈계했다고 했습니다(행20:31). 고린도 교회에게는 눈물로 쓴 편지를 부치기도 했습니다(고후2:4).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게는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갈4:19). 사도 바울은 열정과 정성을 다하여 양육한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완고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저 십자가의 원수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19절에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는 자들입니다.
여기의 멸망은 구원의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 멸망은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주어지는 형벌로서 영원한 파멸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실 십자가의 원수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요,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저들은 육신의 쾌락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사실 성도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몸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저 거짓 교사들과 그 추종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육체를 탐하는 방종에 내어 맡겼습니다. 저들은 감각적인 본능을 따라 살았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삶은 부도덕한 삶이 되었고, 이교도적인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죄악의 삶을 자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본문의 “부끄러움”은 벌거벗음 또는 사람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 부끄러움을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진리를 벗어난 저들이 부끄러운 부도덕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 모르고 오히려 자랑거리로 여기며, 또한 그러한 삶을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땅의 일”은 본능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세상적인 가치에 기준을 두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천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땅의 일에 마음을 기울이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하늘의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성도에게는 땅의 일들이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 땅의 일은 마지막 날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를 맨토로 삼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방향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을 맨토로 삼아야 하고, 저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밟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가 성숙한 단계로 가는 비결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가 달려가는 경주의 끝에는 우리의 영원한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않고 거짓에 귀를 기울이고, 거짓을 가르치는 자들 따라간다면 그 마지막은 참으로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마지막은 멸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산 인생, 복음이 없이 한 모든 수고는 마지막 날에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거짓 교사들을 본받지 말고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저 멸망을 향하여 가는 자들을 본받으면 함께 멸망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신과 동역자들을 본받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라고 눈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맨토로 삼고, 본받으며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원한 맨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날마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입니다. 또한 내 주변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성도입니다. 나를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인도하는 신앙의 선배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권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나 자신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또한 나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아름다운 맨토의 역할을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나 혼자만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맨토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바라보는 자들이 나를 통해서 예수를 발견하고, 성도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나의 섬김과 헌신을 본받게 해야 합니다. 나의 충성과 나의 열심을 본받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를 우리 모든 광성의 성도들이 서로에게 본을 보여주고, 본을 받아 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그리스도 앞에서 칭찬을 듣고, 우리 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더욱 성숙하게, 더욱 아름답게 세워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