푯대를 향하여
빌립보서 3장 13-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성도 여러분! 인생은 경주자와 같습니다. 우리는 출발점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나오는 출생은 우리 인생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 종점이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은 언젠가는 그 종점에 다다른다는 것입니다. 비록 인생이 마주하는 경주의 길이는 같지 않습니다. 또한 그 경주의 과정에서 만나는 일들도 모든 사람에게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종점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드시 그 종점에 도달하게 되었고, 인생은 종지부를 찍게 됩니다.
또한 인생은 오직 전진만 있습니다. 모든 인생이 만나는 시간은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합니다. 그 누구도 그 시간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또한 뒤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미련이 많다고 해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요, 그 시간에서 일어난 일은 그 누구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인생은 미래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달려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생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종점은 무엇일까요? 단지 그 종점이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끝난다면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비관론자들의 주장대로 빨린 인생을 마감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생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분명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천국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 결승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르시고, 믿게 하시고, 구원하시고, 달려가게 하시는 분이시면서 최종적으로는 자신이 푯대가 되시고 종점이 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아무리 인생을 아름답게, 훌륭하게, 뜻있게, 멋있게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지막에 도달해야 하는 종점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 인생은 헛된 것이요,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결코 멈출 수 없고, 멈추어도 안 되는 경주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부터,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순간부터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는 순간까지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또한 우리의 이 경주는 나의 능력과 나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고 세우시고 달리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경주를 통해서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이 경주를 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자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이 경주는 우리의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경주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경주를 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의 자세를 끝까지 견지해야 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푯대를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과거를 묻어버려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경주자로서 갖추어야 하는 자세 가운데 소극적인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가 경주자로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매체를 통해 달리기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선수들은 자신이 달리기를 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장애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습니다. 옷 하나에도, 신발 하나에도 엄청난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첨단과학을 이용해서 옷감조차도 바람의 저항을 덜 받는 재료를 사용하고 신발도 달리는 선수의 발을 보호하고 또한 추진력을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의 경주자들도 우리의 경주에 있어서 거침돌이 되거나 방해가 되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우리의 경주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거의 일임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농담처럼 자주 사용하고 있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 때는”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사용하는 표현으로 등장하는데, 자신들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자랑하며 후배들의 자세나 모습을 비교할 때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를 비꼬아 만든 말이 바로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과거”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경주에서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과거”가 우리의 경주에서 절대적인 의미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경주는 비록 과거를 바탕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 과거를 통해서 우리의 미래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확정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우리가 달려가는 신앙의 경주에서는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미래를 보상하거나 보장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든지, 과거에 얼마나 많은 일을 했든지, 과거에 얼마나 특별한 일을 했든지,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해 주지는 않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 과거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신앙의 경주자는 그 과거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내가 잡은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잡았다(κατειληφέναι)”라는 것은, 12절에서 사용했던 “잡힌 바 된 그것”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와 같은 의미로 ‘붙잡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도 이를 부정하는 “우(οὐ)”를 사용하여 분명 자신의 경주가 아직 완성되지 못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달렸고, 복음을 위해 달렸고, 교회를 위해 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그 사명을 감당하며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복음 때문에, 교회 때문에 옥에 갇혀있지만, 아직도 그는 자신의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는 비록 자신이 풀려날 것을 소망하고 있지만,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이 땅에서의 경주를 마치고 주님의 품에 안긴다고 할지라도 부끄러움이나 부족함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아직 잡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신이 지금까지 달려온 그 경주가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뒤에 있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뒤에 있는 것(ὀπίσω)”은 지금까지 바울이 살아오는 동안 잘했던 일과 못했던 일 모두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즉 그가 과거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했던 일과 교회를 핍박했던 일과 같은 잘못된 일들은 물론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은 이후 그가 복음을 위해 달려오며 감당했던 모든 일들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일들을 “잊어버렸다(ἐπιλανθανόμενος)”라고 했습니다. 이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무시한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바울의 과거는 바울에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일들일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했던 일들은 부끄러운 과거일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난 이후의 일들은 자랑스러운 과거일 것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는 바울을 위축시킬 요인이 되는 것이고, 자랑스러운 과거는 그를 우쭐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고 무시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과거의 일로 자신을 공격해도 무시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만나기 전의 일, 복음을 알지 못한 때에 행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추켜세우려고 해도 그것을 무시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부르심을 받은 사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달리기를 하는 선수가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물론 다른 사람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올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면 자신의 경주가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속도가 떨어집니다. 또한 방심하면 노선을 이탈하게 되고 방향감각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 신앙의 경주자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경주가 아닙니다. 이 경주는 나만의 경주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달리든지 그것이 나의 경주를 좌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나는 나만의 경주, 나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뒤를 돌아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의 경주는 오직 앞을 향하여,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19장에 등장하는 롯의 처를 기억해야 합니다. 남겨둔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함으로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7장 32절에서 이를 경계하시면서 “롯의 처를 기억하라”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누가복음 9장 62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이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미래를 향해, 푯대를 향해, 구원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일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내가 이룬 일들, 또는 내가 과거에 행한 일들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경주를 방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과거의 일을 가지고 공격하는 사탄의 공작에, 내 과거의 공로를 가지고 추켜세우는 자들로 인해 교만함에 빠짐으로, 우리의 경주가 흐트러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묻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과 그의 가족이 여호와 신앙에 거침돌이 되는 것들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리고 새 출발을 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창35:4).
Ⅱ.끝까지 달려야 합니다.
본문 14절 끝에 “달려가노라(διώκω)”라고 했습니다. 이는 12절 끝에서 “달려가노라”라고 했던 표현의 반복입니다. 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바울은 과거를 묻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지금도 달려가고 있는 중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며 천국이나 상급에는 관심이 없고 방탕한 삶을 살고 있는 저 반도덕주의자들의 그릇된 자세를 경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확신에 멈추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푯대, 구원의 완성이라고 하는 푯대, 주님께서 그 날에 주실 칭찬과 면류관이라고 하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푯대(σκοπὸν)”는 문자적으로 총을 쏘는 ‘사수의 눈에 보이는 표적, 시야 속에 있는 목표’를 말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또 이 푯대는 단수입니다. 즉 우리의 목표는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푯대는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이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표현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푯대는 오직 하나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추구는 구원의 완성, 칭찬과 상급,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운 자들에게 주어질 면류관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푯대는 인생의 최종 목표입니다. 최후에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얻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목표와 목적으로 하는 그 푯대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1. 앞에 있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라고 했습니다.
앞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든지, 얼마나 많은 것이었든지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앞에서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푯대는 하나인데 앞에 있는 것은 복수입니다. 즉 우리가 목표로 하는 푯대는 하나이지만 그 푯대에 도달하기까지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여러 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달려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또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서 내 이름이나 명예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단지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칭찬과 상급이 있음을 기억할 때 당연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2. 분명한 목표입니다.
본문 14절에 “푯대를 향하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경주는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이는 경주자가 마지막 결승점을 목표로 달린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경주자가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지 않으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 목표지점까지 가는 과정에서 혼란을 겪게 됨으로 많은 힘을 낭비하게 되고도 합니다. 따라서 출발하기 앞서 먼저 목표점을 분명하게 설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자신의 여정을 치밀하게 계획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하루하루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것으로는 우리의 경주를 제대로 마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푯대가 무엇인지를 순간 순간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내 푯대가 흐려지지 않았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달려가고 있는 길이 그 푯대를 향하여 바르게 설정이 된 것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되었다면 빨리 조정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함으로 우리의 노선을 바로 설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열심히 달렸는데 그 마지막이 예수 그리스도 앞이 아니라면 우리의 경주는 헛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분명한 목적입니다.
본문 1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부름의 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으로 초대하셨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운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그런데 이 상을 받을 자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입니다. 즉 아무나 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세 전에 택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대신하여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끝까지 붙드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하실 자들을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적인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구원을 향한 경주자가 될 수 있고, 끝내 그 상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선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구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보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어떤 경우와 그 어떤 사람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그 어떤 길을 통해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분명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요14:6).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경주자들입니다. 과거가 아닌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복적을 향해서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도달할 때까지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우리의 경주가 끝나는 날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생명의 면류관으로 씌워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오늘 우리는 이 경주를 잘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시선은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정확하게 맞추어져 있습니까? 우리의 시선이 세상의 것에, 육신의 것에 흔들리지는 않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달려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달려가고 있습니까? 주님께 “잘 하였도다”라고 하는 칭찬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모든 성도들이 이 신앙의 경주를 잘함으로 인해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영광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