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무덤의 선포
누가복음 24장 1-12절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에 있어서 결코 변할 수 없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나가 어미의 태로부터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그 끝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이후 인간에게는 반드시 죽음이라는 관문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법입니다(창2:17, 롬6:23).
또한 인생에 있어서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최후의 관문입니다. 어미의 태로부터 출생하는 것이 인생의 시작이라면 죽음은 그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더 이상 아무런 기회가 없습니다. 아무리 아쉬워도 되돌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과정에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장례이기도 합니다. 성경도 이에 대해서 동조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7장 4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사람이 죽게 되면 장례라고 하는 절차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 나라와 민족이 가지고 있는 관습에 따라 많은 장례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오늘날은 대부분 화장의 문화로 바뀌고 있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거의 매장 문화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매장은 필연적으로 무덤을 만들게 되었고, 우리나라도 많은 산을 이 무덤들이 차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 유대 사회의 장례 방법은 성경 시대나 지금이나 매장입니다. 다만 저들의 장례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당일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그 시신을 수습해서 무덤에 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는 그 지역의 기후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해서 시신이 쉽게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되었든 결국 이 무덤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생에 있어서 최후의 장소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생을 가리켜 「무덤에서 요람까지」라고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즉 인생의 마지막에는 하나의 무덤을 남기고 간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의 마지막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비어있다면 무슨 이유일까요? 물론 시간이 지나면 묻어 둔 시체가 흙으로 완전히 돌아가기 때문에 그 무덤은 빈 무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적으로 무덤이 비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저 예루살렘 문밖에 한 동산이 있었고, 거기에 많은 무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 가운데 아주 특별한 무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무덤에는 십자가에서 죽은 시체를 장사했습니다. 이 과정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요청해서 그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을 함으로 누구도 그 무덤에 손을 댈 수가 없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무장한 군인들로 하여금 그 무덤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 안에 있어야 할 시체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무덤은 우리 예수님의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시고 온갖 모욕과 멸시를 받으신 후 끝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로써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약 6시간 동안 달리신 후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 해가 지기 전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의해서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 새벽에 예수님께서 그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내용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당신께서 죽으실 것과 부활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16:21, 마26:32).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대로 부활하셨고 장사되셨던 그 무덤은 빈 무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왜 그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빈 무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저 예루살렘 문밖에 있는 동산으로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빈 무덤을 함께 들여다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빈 무덤의 선포』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본문 1-2절에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자세한 내용이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4절에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안식 후 첫날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요일로 계산하면 일요일이요, 곧 우리가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날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전날에 죽으신 후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무덤에서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이 지난 첫날 이른 새벽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부활의 현장에 여인들이 목격자가 되었습니다. 저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서 이른 새벽에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로 무덤을 지키고 있는 군병들이요, 둘째는 무덤의 문을 막아둔 큰 돌입니다. 저 군병들은 총독의 명령을 따라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지키는 자들입니다. 이는 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 당하지 않기 위해서 미리 예비책으로 일으킨 일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들이 저 군병들을 지나서 무덤에 가까이 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저 군병들을 지난다 할지라도 누가 그 큰 돌을 굴려 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그 돌이 심히 큰 돌이라고 했습니다(막16:4).
그러나 이 여인들의 걱정은 기우(杞憂)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 여인들이 무덤에 이를 때에 본 광경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무덤에 가까이 왔을 때 큰 지진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천사가 내려와서 그 돌을 굴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으로 인하여 그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인해 죽은 자와 같이 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사건을 목격함으로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한 역사였음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의 지진은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마27:51, 출19:18). 또한 천사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에 증인으로 나타났습니다. 저 천사들은 이 땅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저 천사들은 천상의 신비를 간직한 자들로 그들의 모습과 행동을 본 군인들이 그 큰 충격에 의해서 죽은 자처럼 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이 군인들은 성내에 들어가서 자신들의 목격담을 이야기함으로 자신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후에 그 무덤은 빈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늘로부터 시작된 역사 가운데서 예수님은 무덤에서,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후에 여인들이 무덤에 가 보았을 때는 이미 그 무덤은 비어 있었고, 천사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셨다고 일러주었습니다((5-7절).
따라서 이 빈 무덤은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해 갔기 때문에 된 것도 아닙니다(마28:13).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 된 것입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일이 어찌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시는 과정이 어찌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생겨난 이 빈 무덤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역사요, 초자연적인 역사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빈 무덤은 바로 장차 우리의 무덤이 빈 무덤이 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도 무덤에 장사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부활도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무덤도 빈 무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무덤에 의해서 정복당하고 끝나는 인생이 아닌 것입니다.
Ⅱ.죽음이 아닌 생명의 장소입니다.
사실 무덤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무덤은 인생의 마지막입니다. 어느 누구도 무덤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은 없습니다. 태초에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이 이 무덤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아무리 영웅호걸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역사에 한 페이지를 남기고 이 무덤에서 끝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덤을 싫어합니다. 무덤을 무서워합니다. 언젠가는 자신도 거기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무덤은 기피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그 수많은 무덤 가운데서 다른 무덤과 구별되는 하나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에서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무덤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무덤은 죽음의 장소가 아닌 새로운 생명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무덤 속에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끝입니다. 무덤 속에 있는 것은 더 이상 그 어떤 일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것은 무덤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생명이 무덤 안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무덤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새로운 출발입니다. 그것도 이전의 삶의 연속이 아닌 새로운 생명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자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저들은 무덤의 돌을 굴려줄 자가 있을까 걱정하며 왔지만 이미 돌은 굴려 있었고 정작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일들을 인하여 두려움과 근심으로 눌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천사들이 이 여인들에게 아주 놀라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 5-6절에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요, 로마의 병사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장사되셨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아무도 매장하지 않았던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이 사실은 저 여인들도 이미 함께 했고 보았던 일입니다(눅23:50-55). 그런데 지금 저 천사들이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분명 죽어 장사되었는데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덤은 죽음의 장소가 아닌 생명의 장소라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1:25). 이는 예수님께 있어서 죽음은 결코 끝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2:24). 이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끝이 아님을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비록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이는 부활을 위한 전초(前哨)요,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준비였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의 빈 무덤은 우리에게 더 이상 죽음이 왕노릇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더 이상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되는 영광을 향하여 나아가는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계14:13).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통해서 죽음을 정복하신 주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께서 그 죽음까지 정복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또한 그 날에 죽음과 무덤을 정복하고 예수님의 그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Ⅲ.절망이 아닌 소망의 장소입니다.
사실 무덤은 절망의 장소입니다. 무덤 앞에서는 더 이상의 소망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무덤으로 가고 있는 여인들에게서도 소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끝으로 알았고, 이제는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은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분명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 저들에게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 그리고 갈릴리에서 저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지만 저들은 이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아니 설령 기억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마음에는 죽음이라는 단어와 무덤이라는 단어로 인하여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들도 매 한가지입니다. 저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믿고 있었다면 저들이 이토록 절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절망하고 있는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전한 말씀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본문 5-6절에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직접 무덤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을 달려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부활을 믿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아직까지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요20:9).
하지만 예수님의 빈 무덤은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무덤은 우리에게 절망만 안겨주는 대상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그 무덤을 빈 무덤으로 만드심으로 우리에게도 새롭고도 완전한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첫 열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해의 추수한 곡식 가운데서 가장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후에 거둘 모든 곡식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 성도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하는 것은 마치 곡식의 첫 단이 추수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장차 있을 모든 성도들의 부활에 대한 약속의 보증이자 예표인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는 무덤으로 인해 절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빈 무덤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무덤도 언젠가는 빈 무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빈 무덤을 통해서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같이 우리도 반드시 부활하게 될 것이고, 주님이 누리는 영광을 우리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1:25-26). 세상은 죽음 앞에서 절망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강한 힘을 가졌어도 죽음을 이겨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 앞에서 “내가 이겼다”라고 소리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 죽음조차도 절망이 아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세상이 모두가 절망하는 무덤 앞에서도 새로운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며 찬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나의 부활로 현실화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부활은 꿈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활은 기대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부활은 언젠가 반드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 천사장의 나팔을 앞세우고 이 땅에 오시는 날 우리는 아주 영화롭고 신비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빈 무덤을 통해서 우리는 절망이 아닌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요, 초자연적인 역사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졌던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장소가 아닌 생명의 장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한 알의 밀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절망의 장소가 아닌 소망의 장소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빈 무덤은 우리의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성도들을 위한 부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도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이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부활의 신앙으로 충만해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