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땅히
빌립보서 3장 15-16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은 은혜를 입은 자들이 모였습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은 자들이 모였습니다. 한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모였습니다. 한 믿음을 고백하며 구원의 확신 속에 사는 자들이 모였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은 같은 모양이 아닙니다. 같은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같은 삶의 모습을 나타내지도 않습니다. 분명 하나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현재의 모습은 결코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내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성도들도 완전한 자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완전하고, 성령의 부르심이 완전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완전한 것이고,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완성된 구원을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들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달려가는 경주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는 아직도 죄성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육신에 매여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죄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지 않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에 빠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많은 교육을 받아도, 아무리 훌륭한 성품을 가졌어도 죄와 완전하게 단절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서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각자마다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함이 성경의 진리와 또는 그 진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연결되어 나타날 때, 때때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2,000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등장했던 거짓된 교리로 교회를 혼란하게 했던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단」이라고 부르는 자들입니다. 이단(異端)이란 다를 이(異)에 끝 단(端)자를 사용합니다. 즉 이들은 처음에는 성경의 진리에서 출발합니다. 저들도 예수를 이야기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하고, 구원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들을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기까지는 저들의 잘못된 사상이나 주장하는 교리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끝이 다릅니다. 분명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는데, 도달하는 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단들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타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 논리적이고, 더 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저들의 사상과 논리와 주장에 현혹이 되어 진리에서 떠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들로 인해 교회는 혼란스러워지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되는 결과는 낳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였던 빌립보 교회 안에도 이러한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분명 저들도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그러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들은 끝이 달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에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어 구원받았다면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든지 우리의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로 인해 교회 안에서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이 충돌했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 흔들렸습니다. 교회 안에 분쟁과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흔들리고 깨어질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급히 편지를 써서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자신이 빨리 빌립보로 달려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빌립보 교회를 바로 세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교회가 진리 안에서, 복음 위에서 바로 설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저 거짓 교사들 때문에 혼란해진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라면 마땅한 생각을 해야 하고, 마땅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마땅히』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완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 15절 앞부분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를 현대인의성경(1985, 생명의 말씀사)은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고 있는데, “그러므로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은 모두 이와 같은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이나 또한 누구라도 완전한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 완전한 구원을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자신을 포함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분명 지금까지 바울이 한 말과는 모순이 되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까요? 바울이 이 표현을 글자 그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들이 구원받아 온전한 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저 반도덕주의자을 향한 빈정거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성숙한 신앙인으로 부르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생각은 모두가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계속해서 우리의 전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합니다. 이 때까지 우리는 완성되지 못한 구원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 완성을 향해서 끝까지 달려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 반도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저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너희가 아무리 온전히 이루었다고 자랑하지만 아니다, 우리가 부활에 이르기 전에는 결코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이 표현은 성숙한 신앙인들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온전히 이루었다(τέλειος)”라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본래의 그 목적이 도달했다, 완벽하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이런 문자적인 의미보다는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완전히 잃어버렸던 하나님이 형상을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회복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심을 완전히 닮아가기까지 성숙해져야 하는 자들입니다. 결국 성숙한 신앙인은 온전해진 성도가 아니라 온전함을 추구하며 부단히 정진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힘으로 온전함에 이를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아가 나 자신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세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나를 깨우치시고, 성령을 통해서 내 삶 전체를 인도하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살면서 그 온전함을 추구하는 성도의 영원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사람,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사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 안에 담긴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마땅히 이렇게 생각해야 하고, 이러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이에 대해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에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현대인의성경은 “만일 여러분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도 분명하게 바로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달리 생각한다(ἑτέρως φρονεῖτε)”라는 것은 앞의 12-14절에 말하고 있는 바울의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성도가 아직 온전함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완전한 구원이라고 하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만 한다고 하는 것이 바울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바울의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해답을 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온전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성도들을 일깨워 주시고,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깨달아 알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에 사용된 “나타내시리라(ἀποκαλύψει)”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진리를 계시해 주실 것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은 성도가 마땅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푯대를 향하여 끊임없는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경우에는 이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자들이 나타날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저들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자기 교회를 위해서 성도들을 바른길로 인도해 주실 것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나의 구원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진정 구원을 확신하고 있습니까? 나의 구원이 결코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음을 믿습니까? 이 믿음이 우리의 존재를 정의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정의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정의합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존재도, 우리의 삶도, 우리의 소망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완성된 구원에 이르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완성을 향해서 오늘도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푯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내 방법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달려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방법대로 달려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달려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능력을 따라 달려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 앞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나 길은 전혀 없습니다.
Ⅱ.내가 서 있는 곳에서 정진해야 합니다.
본문 16절에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현대인의성경은 “우리가 어느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든지 지금까지 따른 법칙에 따라 계속 그대로 살도록 합시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우리의 구원은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부정하는 반도덕주의자들의 논리와 사상을 대적하기 위해서 자신의 고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지금 달려가는 모습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본받고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끊임없이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은 “오직(πλήν)”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 가지만 더’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성도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저 반도덕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인해 자신들이 이미 기대하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함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앞으로 계속해서 완성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말에 절망하거나 포기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의 경주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세 번째의 문제가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도의 삶도 어찌 보면 혼자만의 경주가 아닙니다. 비록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은 자꾸만 옆에서 달리는 사람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그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고 경쟁심을 끌어올리기도 합니다. 물론 이 경쟁심이 때로는 우리의 경주에 활력소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경주에서 이 경쟁심이 지나치면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라고 했습니다. 이는 분명 장소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수준의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 수준이나 신앙적 지식을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 즉 하나의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 중에서는 그 수준에 있어서 다양합니다. 어떤 성도는 수준 높은 성숙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어떤 성도는 수준이 낮은 성숙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표현한 것을 따르면 어른과 같은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인이 있습니다. 거친 음식을 먹는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젖을 먹어야 하는 신앙인도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수준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의 차이를 보는 성도들 사이에서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그대로 행할 것이라”라고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의 신앙의 수준에 대해서 경쟁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수준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각 사람은 자신의 수준에 있음을 알고 그 자리에서 자기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본래 여기에서 “행한다(στοιχέω)”라는 것은 ‘자기 행동을 맞춘다’ 또는 ‘열을 지어서 나아간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군인들이 열과 오를 맞추어 행진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군인들은 자신의 자리가 있습니다. 앞에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체를 이끌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의 사람을 뒤따라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서로 자신의 위치가 아닌 다른 사람의 위치에서 가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행진은 엉망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경주는 자신의 신앙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 영적인 수준에 맞추어서 달려야 합니다. 내 믿음의 분량을 따라서 달려야 합니다. 이에서 벗어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너무 뒤처지는 것도 문제지만, 오버페이스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경주도 엉망이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주에도 방해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경주를 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푯대가 무엇인지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달려가는 경주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해야 합니다. 푯대마저 흔들리고 목적마저 잃어버리면 우리의 경주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 믿음의 수준이 어디인지, 내 신앙의 지식이 얼마나 되는지, 내 믿음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내 자리에서 내가 어떤 경주를 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경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시선을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받을 상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이 시간 내 신앙의 발걸음이요, 내 경주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안전하신 뜻을 따라서 나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진행과 성취하심에는 그 어떤 실수나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완전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도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완전을 향하여,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믿어야 합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 성취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 나에게 주어진 믿음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든 광성의 성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마땅한 생각과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여 그날에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급을 받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