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동역자

 

 

 

빌립보서 414-16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사자성어 가운데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라는 뜻으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의미가 있는 우리의 속담에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혼자서도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거나, 혹은 둘 이상의 사람이 함께 힘을 합치면 더 쉽게 할 수 있고 능률도 더 높일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도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일은 너무나도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는 사람도 다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일은 어느 한 사람의 뛰어난 역량으로 완성되지 못합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부분에서 서로의 힘을 합침으로 궁극적인 목적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동역자(同役者)”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 가지(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함께 일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주의 복음을 위해 함께 애쓰는 자(4:11), 진리를 위해 함께 수고하는 자(요삼 1:8), 하나님의 일꾼(살전 3:2)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이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데, 바울이 동역자로 칭한 자로는 브리스가와 아굴라(16:3), 디모데(살전 3:2), 디도(고후 8:23), 에바브로디도(2:25), 빌레몬(1:1),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1:24), 실라(15:40), 바나바(13:2-3)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동역자는 단순히 어떤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선교 사역에서는 많은 교회들이 동역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있었고, 예루살렘 교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선교사 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세워졌던 많은 교회가 바울의 사역에 동참하는 동역자들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을 위해서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연보에 대한 바울의 감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위해서 연보를 했고, 교회의 지도자인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로마로 보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을 것이지만, 경제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점에 빌립보 교회에서 보내준 연보는 바울에게 엄청난 힘이 되고 유익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깊은 감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표현 속에서 우리는 복음을 위한 동역자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비록 빌립보와 로마라고 하는 물리적인 거리로 인해 함께 사역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서 하나였습니다. 오직 복음이라는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는 관계였습니다. 단지 마음으로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함께 움직이고, 함께 달려가는, 함께 멍에를 맨 동역자였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동역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동역은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그러나(πλήν)”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비록 나는 너희들이 보내준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나에게 귀한 연보를 보내준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었다.’라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결국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연보를 보내준 일에 대하여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괴로움(θλίψις)”은 문자적으로는 위아래에서 내리누르는 데서 오는 압착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비유적으로 많이 쓰여 괴롭히는 상황, 고난, 역경, 시련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세상 마지막 때 땅에서 일어날 환난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이 단어를 일상생활에서 겪는 심한 고통과 무거운 짐 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 자신이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은 모든 종류의 육체적, 심적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가 바울이 이 괴로움이 함께 참여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가 보내준 연보의 의미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라는 더 깊은 의미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물리적으로 빌립보와 로마는 먼 거리(직선거리로 1,300km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비록 풍성한 형편은 아닐지라도 물질을 함께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섬김을 통해서 몸으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빌립보 교회의 모습은 바울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요, 또한 바울이 당하는 괴로움에 동참하는 일이었습니다. 함께 마음을 쓰고 있고, 함께 아파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사역이 제한되고 있는 현실로 인해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면 바울이 속히 풀려나서 더 왕성한 복음의 사역이 펼쳐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잘하였도다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의 모습이 단지 당연한 모습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가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빌립보 교회는 이 일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과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복음 사역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역자의 참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함께하는 동역자였습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복음 사역이 평탄할 때뿐만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도 함께했습니다. 저들은 예수 안에서 바울의 발걸음과 늘 함께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동역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추구하는 목적을 향해서 함께 나아가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성도는 그 누구도 여기에서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맴도는 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동참하는 자여야 합니다. 우리는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일하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동역자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동역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가는 동역자입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는 하나의 멍에를 메고 가는 동역자입니다.

 

 

.동역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 15-16절에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동역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동역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추상적인 이론만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동역자는 실제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동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과의 동역에서 이러한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준 교회였습니다.

 

 

본문에서는 바울이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 등장하는 데, 바로 빌립보 사람들아(Φιλιππήσιος)”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이렇게 부른 적은 본문과 고린도후서 611절에서 고린도인들이여이라고 부른 것과 갈라디아서 31절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부른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제외한 두 부분에서는 그 대상들을 책망하기 위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책망하고자 함보다는 오히려 진실한 애정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서신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빌립보 교회를 책망하기보다는 언제나 사랑으로 감싸고 있는 바울의 마음이 풍성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의 시민으로서의 자존심을 존중해 주고 있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단순히 빌립보의 시민임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해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어서 하는 말들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바울은 직접적으로 감사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마음은 저들을 향한 깊은 감사와 저들을 축복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마게도냐 지방에서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고 떠날 때부터 바울을 위해 후원을 시작했습니다. 이 때는 사도행전 16장과 17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은 그와 그 일행들을 마게도냐 지방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빌립보에서 오랜 기간을 사역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로 갔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부터 따라온 유대인들에 의해 그곳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을 떠나 아가야 지방의 아덴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마게도냐를 떠나야 했을 때로부터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후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때 빌립보 교회는 미약했습니다. 저들은 아직 복음을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얕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반적으로 신앙이 성숙한 교회와 성도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을 시작했습니다.

 

 

본문에서 주고 받는 일은 본래 상업 용어로 회계 장부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상업적인 상호교류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빌립보 교회와 바울 사이에서는 일방적인 후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주고받는 교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영적인 유익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물질적인 후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교류에 대해서 바울은 교회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로마서 1527절에서 바울은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연보한 일에 대해서 로마교회에 소개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즉 예루살렘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받았고 영적인 유익을 얻은 마게도냐 지방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보고 연보를 통해 물질적인 후원을 한 사실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927절에서는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이 교회들로부터 물질적인 후원을 받기 위해서 교회들에게 강요한다는 악의적인 소문과 공격에 대한 답변입니다. 바울은 비록 자신이 자비량으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했지만, 교회가 자신들의 사역에 물질적인 후원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임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교회들에게 이러한 후원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자신에게는 후원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다른 복음 사역자들에게는 마땅히 후원을 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헌신한 자들을 위해 교회가 마땅히 후원함으로 복음이 장애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고전9:12).

 

 

결국 빌립보 교회는 초창기부터 바울을 후원하는 일에 나섰습니다. 당시 다른 교회들은 이 일을 하지 않았지만, 빌립보 교회만은 바울의 필요를 따라 후원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바울이 복음 사역을 하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것을 적절하게 공급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라는 표현은 정확한 횟수로서의 두 번을 강조한다기보다는 빌립보 교회가 지속적으로 바울을 후원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의 후원은 결코 인색함이 없었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후원하는 일에 처음부터 열심을 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빌립보를 갑자기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에서도 바울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 지방에 있을 때에도, 그리고 마게도냐를 떠나 아가야 지방으로 갈 때도 계속해서 바울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빌립보 교회의 후원은 지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까지도 지속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빌립보 교회는 바울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 사역에 언제나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이러한 마음과 자세는 구체적으로 실천되었습니다. 단지 말로만 함께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만 같이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삶이 풍요로워서 바울을 후원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바울을 사랑하는 저들의 마음이 지금까지 바울을 후원하도록 한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사역에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동역자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빌립보 지역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동역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물질적인 후원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를 통한 섬김을 통해서 복음을 위해 동역하는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사역에도 이러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진행해 가는 복음의 사역은 이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는 아주 구체적인 것이고, 실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역입니다. 우리의 입술로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직접 움직여야 합니다. 직접 찾아가야 하고 만나야 합니다. 이 일은 누군가 특별히 선택되고 구별된 사람만이 감당할 사역이 아닙니다. 이 일은 교회 안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함께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사역에 동참하는 동역자들입니다. 이 동역자의 역할은 교회가 지상에 존재하는 한 중단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또는 직접 몸으로 행동함으로, 또는 물질적인 후원을 통해서 동역하는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개인이 더 성숙해지고, 복음이 더 힘을 얻게 되고, 교회가 더 확장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빌립보 교회는 진정한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광성교회의 동역자들이어야 합니다. 말로만 광성교회의 성도가 아니라 우리 광성교회가 지향하고 전진하는 모든 과정에서 함께하는 동역자여야 합니다. 우리 광성교회는 어느 한 사람이나 일부의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교회가 아닙니다. 광성교회에 속한 모두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뭉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동역할 때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든 광성의 성도들이 예수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마음을 합하여 동참함으로 우리 광성교회를 아름답게 세워가는 진정한 동역자,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