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문안과 축복
빌립보서 4장 21-23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 가운데 “성도의 교제와(the communion of saints)”라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교제는 교회의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없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바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교회가 고백하는 믿음도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교제”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우리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양향모 목사님의 사도신경 강해집인 『위대한 믿음 진실한 고백』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교제(交際;κοινωνια)”는 단순히 사귀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는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통(通)하는 것입니다. 이는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바로“성도(聖徒;ἁγιος)”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거룩한 무리, 구별된 무리’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세상에서 구별하여 따로 세운 자들입니다. 이들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별된 자들입니다. 이렇게 구별된 자들이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교제입니다.
결국 성도는 성도끼리 교제해야 합니다. 성도는 세상과는 교제할 수 없습니다. 비록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과 교제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는 그 세상에 속해서 세상과 교제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세상에 속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무리로 구별하셨습니다. 이제 그 구별된 우리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교제해야 합니다. 함께해야 하고, 함께 통해야 하고,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이루는 성도들은 모이고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따라서 만나면 헤어져 있는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서로 물어야 합니다. 흩어져 있는 동안에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성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때로는 기쁜 일도 있겠지만, 때로는 힘이 들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때는 없습니다. 따라서 기쁜 일에 있어서는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힘든 일에 대해서는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서로를 축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풍성하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가 세상으로 다시 나아가서 살아가는 여정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성도의 교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표현은 “문안(問安;ἀσπάζομαι)”입니다. 이는 ‘인사하다, 환영하다, 행복을 빌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성도가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의 마무리에서 이 문안이라고 하는 표현을 통해서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하나인 성도는 마땅히 서로에게 문안을 통해서 거룩한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그의 편지마다 마지막에서 항상 했던 성도를 향한 축복으로 편지를 끝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빌립보서의 마지막 말씀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넘치는 사랑으로 빌립보 교회를 포함한 오늘의 우리에게 선포한 말씀이 이제 마지막 인사와 함께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마지막 문안과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나의 문안을 성도들에게 전하라.
본문 21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라고 했습니다.
서신을 마무리하고 있는 본문에서 바울은 “문안하라(Ἀσπάσασθε)”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너희는 그들에게 나의 안부를 전하라’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에게 직접 자신의 안부를 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편지를 읽고 듣는 성도들, 즉 사도 바울에 관한 소식을 듣지 못한 다른 성도들에게 바울의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신의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는 그 대상은 누구일까요? 본문 안에서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제시할 수가 없습니다. 그 대상이 빌립보 교회 내의 성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 안에 있는 성도를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게 제한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빌립보 교회 안의 성도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에 등장하는 “성도에게”는 ‘각 성도에게’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바울이 사용하는 아주 특별한 표현입니다. 바울은 모든 성도들을 한번에 뭉뚱그려서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특정한 부류의 성도들에게만 자신의 애정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애정을 전달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동일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빌립보서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따라서 서신은 일차적으로 빌립보 교회에 보내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이나 관례를 따르면 이 서신의 수신자가 빌립보 교회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이 서신은 먼저 빌립보 교회에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읽혀졌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 앞에서 읽혀졌습니다. 나아가 주변의 교회들에 회람되었고, 많은 교회에서 읽혀졌습니다, 따라서 이 서신은 일차적으로는 빌립보 교회에 보내졌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교회에 보내진 서신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문안의 대상은 단지 빌립보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이 편지를 대하는 모든 성도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이라는 표현을 붙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에서 이 표현을 아주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즉 이미 예수를 주로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된 성도들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지역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신분을 제한하지도 않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누구라도 문안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성경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산까지 인도하신 후에 그들에게 율법을 포함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기 전에 그 말씀을 받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설정하십니다. 출애굽기 19장 3-6절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후로도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즉 이방인을 대상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저들의 죄악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것입니다(요나와 니느웨, 나훔과 니느웨). 신약의 말씀들도 언제나 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언제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이는 저 세상에서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는 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예수를 믿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권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된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입니다.
Ⅱ.동역자들이 너희에게 문안한다.
본문 21-22절에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문안을 전한 바울은 이제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동역자들의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이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서 문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알 수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에 바울 주변에 함께 머물러 있던 동역자들일 것입니다. 또한 바울과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디모데나 누가와 같은 동역자일 것입니다. 여기의 디모데는 1장 1절에서는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데 함께하고 있고, 2장 19절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속히 파송하고자 하는 동역자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는 사도행전 27장 1절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함께한 동역자(우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바울 곁에는 바울을 섬기기 위해서, 또는 바울의 사역을 돕기 위해서 함께했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들이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빌립보 교회에 안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성도들”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로마의 성도들일 것입니다. 저들 가운데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먼저, 즉 바울이 로마로 오기 전에 이미 예수를 믿은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이들은 바울의 영향을 받은 성도들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온 이후에 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듣고 성도로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빌립보 교회에 문안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입니다.
여기에서 “가이사의 집 사람”이라는 표현은 아마도 옥 중에 있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자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왕궁의 고위급 신하를 가리킬 수도 있고, 종들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또한 황실의 가장 높은 관원으로부터 그 관원에게 고용된 가장 낮은 계급의 노예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문헌을 보면 대체로 궁정의 관리직이나 행정 관리직에 고용된 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은 당시 로마에서 빌립보로 파견되었을 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은 자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로마로 귀환하여 바울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들일 것입니다. 또한 당시 가이사의 집에 속한 자들 중에는 로마의 동부지역으로부터 온 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마게도냐 지방에서 온 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지금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자신들의 안부를 함께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들을 특별하게 거론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의미가 있습니다. 전후 사정이 어떻든지 이들이 복음 안에서 바울과 관계를 맺고 있고,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낸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들의 안부를 함께 전하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에서 복음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를 신이나 신의 아들로 숭배하고 있었던 당시의 사회에서 가이사의 집 사람에게까지 복음이 전해졌고, 그들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문안은 어느 특정한 자들끼리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서로에게 문안해야 합니다. 이 문안은 단지 인사를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예배 중에 혹은 예배 후에 서로의 안부를 묻고 문안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상황을 알게 되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제목들을 나누게 됩니다. 그리하여 모든 성도가 신앙 안에서 든든하게 세워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Ⅲ.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를.
본문 23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의 맨 마지막에 관례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으로 축도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서신에서는 거의 똑같거나 거의 유사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례를 따라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사도가 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축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한 은혜가 저들의 심령 가운데 있기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한편 바울은 이 빌립보서를 “은혜”에서 시작해서 “은혜”로 끝맺고 있습니다. 1장 2절에“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라고 끝맺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 은혜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권위를 지니고 있으며 신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의 기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값없는 구원적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는 그 은혜를 자기의 교회에 베풀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러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인류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는 수단이 되십니다. 그리하여 결국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이 은혜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을 예수와 복음과 교회를 위해 살아가게 한 바울되게 한 능력입니다. 이 은혜는 사람의 생각과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막힌 담을 허무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과 분열을 없애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결국 이 은혜는 바울이 빌립보서 전체를 통해서 강조하는 “기쁨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은혜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심령에” 있기를 선포합니다. 이는 한 인간의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인데, 특히 정신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이러한 의미보다는 “너희와 함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가 성도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해서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가 교회답게 새워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땅의 그 어떤 성도나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결국 성도와 교회에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성도의 원천이요, 삶의 근거요, 원동력입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최절정으로 나타난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선고를 받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인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은혜 때문에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은혜 때문에 기뻐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은혜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은혜 때문에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은혜 때문에 찬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광성이라고 하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광성교회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서로를 위해 관심을 가지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성도답게, 그리스도인답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넘치는 기쁨과 감사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를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로 말미암아 날마다 기쁨이 넘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