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7. 3.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26)
본문 : 막 7:14-23
제목 :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4,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17,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18,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가 시작될 때 가장 걸림돌이 된 것이 유대교였습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복을 받는다고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그동안 자신들이 지켜온 율법이나 제사나 절기들을 다 무시하는 기독교를 그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동안 자신들이 지켜온 대로 율법도 지키고 성전에서 제사도 드리고 각종 절기를 그대로 지키고 장로들의 전통도 그대로 지키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라고 하면 그래도 좀 쉽게 기독교를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전혀 다른 길을 가라고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이런 유대교와 기독교의 논쟁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앞서서 살펴본 금식 문제나 안식일의 문제가 그런 논쟁이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금식을 해야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는 손 씻는 문제에 대해 따졌습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에 따르면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데 씻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손 씻는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손 씻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은 다 깨끗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대해서 지적할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23절에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라고 하셨는데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본문 14절~16절에 “14,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15,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앞에서 유대인들이 지적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데 대한 해명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더 깊은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손을 씻지 않고 먹어도 그 음식물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동안 성경에서 금한 모든 음식물의 규제를 풀어버리는 중요한 말씀이 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부정한 음식물이 많이 정해져 있습니다. 육지에 사는 짐승 중에는 발굽이 갈라지고 되새김질하는 짐승은 먹어도 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은 통굽이거나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는 짐승은 부정한 짐승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 먹지 못할 짐승의 대표는 돼지 토끼 낙타입니다. 이들은 통굽이거나 되새김질을 하지 못한 짐승이기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물에 사는 물고기도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을 수 있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오징어나 낙지 그리고 미꾸라지 장어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새 중에도 먹지 말아야 할 새가 많고 곤충 중에도 먹지 말아야 할 곤충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 이런 것들을 먹지 말라고 했는가는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만 말씀드립니다.
이런 음식에 관한 규정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것이었고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요한 것을 없앤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모든 음식물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신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세월에 따라 환경에 따라 먹어야 할 음식과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바뀌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기독교는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음식문화는 달랐기 때문에 이런 문제로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안 되고 분쟁 거리가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기독교는 음식물에 관한 제한을 없애고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먹게 했습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그동안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많은 것을 꼭 지켜야 할 필수항목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문제가 된 것은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도 계속해서 옛날처럼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가였습니다.
이 문제는 사도바울이 전도하여 세운 교회 내에도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전하고 나오면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이나 거짓 선생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믿어도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문제가 계속되자 사도바울이 바나바와 기독교 지도자 몇 사람을 데리고 예루살렘교회로 찾아갔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있던 사도들과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을 했습니다. (행 15장)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지키지 않아도 되는가 하는 것은 기독교의 출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매우 진지하게 서로의 의견을 타진한 결과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론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9-11)라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지 않아도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조상도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다가 무거운 짐만 지고 실패했는데 그 멍에를 제자들에게 씌우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으로서 교회의 지도자가 된 야고보가 이어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행 15:19-21)라고 했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라고 권고하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를 떠나서 이 정도는 인간에게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각 성의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율법을 많이 가르쳤고 그래서 유대인들의 머릿속에 이런 율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는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서 사도들은 모든 음식이 깨끗함으로 금할 음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오늘날 우리들도 구약성경에는 금하고 있지만 거기 얽매이지 않고 모든 음식을 자유롭게 먹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금한 음식들은 우리 몸에 좋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먹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술이나 담배 같은 것도 가능한 한 먹지 않도록 하고 몸에 좋은 음식물만 먹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본문 20~23절에 “20.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무엇을 먹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는가가 중요한 것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입으로 먹는 것은 마음과 상관없이 그냥 배로 들어가서 소화되면 그만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고 추한 사람이 되는 것은 그 마음에 있는 나쁜 생각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나쁜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고 했습니다.
1)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중요성
이 말씀은 단순히 음식이냐 마음이냐가 아니고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외형적인 것만 바르게 하려고 하고 외형적인 행위만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무엇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 이런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행위를 올바로 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외적인 행동보다도 그 마음에 품은 생각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단순히 행함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 깨끗해야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행위로 살인을 저지르고 간음을 하고 도둑질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런 악한 것들이 타락한 우리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까지 다 없애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타락한 마음을 그대로 두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실지로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지 않았다고 자신은 죄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그런 외형적인 행동이 율법을 다 지킨 것이 아님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살인죄는 꼭 살인을 저질러야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는 마음속에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까지 살인죄에 포함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마음속에 있는 화를 내는 것이나 욕을 하는 것이나 남을 비하하는 것이 살인의 불씨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이런 것이 있는 한 살인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런 마음까지 다 없어지는 그런 경지에 오른 사람만 살인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간음죄는 꼭 여자를 범해야 간음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음란한 마음으로 여자를 보는 것까지도 간음죄라고 했습니다. 이성에 대한 이런 욕심이 있는 한 간음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 음욕이 어느 날 간음죄를 짓는 불씨가 되기 때문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런 나쁜 것들을 다 없애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겉보기에는 거룩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는 환경을 만나면 죄를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겉으로 선한 일 몇 가지 하고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속에는 아직도 이런 더러운 것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율법 앞에서 나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외형적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를 다 용서받게 해줍니다. 더 나아가서 마음속에 자리 잡은 더러운 죄의 문제까지도 다 용서받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믿음을 위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 율법에 관한 우리의 태도
그러면 이 율법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율법에 포함된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차피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으니까 무시하고 살아도 되는 것일까요? 그냥 아무렇게나 살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앞서 배운 디모데전서 1장에는 율법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이 율법을 어떻게 해야 좋은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바른 교훈과 율법에 관한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여기 바른 교훈이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에 관한 교훈을 바른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그 바른 교훈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잘 지키면 유익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딤전1:8)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우리 인간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법칙이지만 그것도 지키지 못해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참 좋은 일이고 유익한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율법에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인 율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흉악한 죄인임을 깨달을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딤전1:9)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죄를 지은 사람들 즉 불법한 자 복종하지 아니한 자 경건하지 아니한 자 살인자 거짓말하는 자들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딤전1:10)라고 했습니다. 여기 바른 교훈은 복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복음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죄를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에 벌을 내려야 하는데 율법이 그 형벌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적극적으로 우리가 가진 이 믿음을 더욱 진실하게 고백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1:5)이라고 했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 즉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해주신 목적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니까 허랑방탕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최고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사랑에 도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죄악 된 본성을 따르는가? 성령님께서 주신 깨끗한 양심을 따르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진실된 믿음인가 거짓된 믿음인가를 판가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에 있는 부패하고 타락한 죄악 된 본성을 따라 사는 사람은 아직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죄악 된 본성을 억누르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아직까지도 타락된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의 쾌락으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려는 마음이 없습니까?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일이 모든 죄악을 물리치는 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무엇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다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외형적으로 율법 몇 가지를 지키면서 자신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악한 것을 그대로 두고 아무리 겉으로 선한척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시고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율법의 최고 목적지인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에 도달할 수 있는 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