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31)
본문 : 막 8:31-33
제목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신학과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신학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것과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신학을 가지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인간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사탄의 말을 듣고 사탄이 만든 우상을 섬기고 사탄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창조하신 인간이 흉악한 죄인이 되고 하나님의 진노 대상이 되어서 서글픈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탄은 타락한 우리 인간 속에 있는 탐욕을 잘 이용하여서 그 욕심을 채워주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만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길이요 죽음의 길이요 멸망의 길이지만 오늘 당장 기분이 좋다고 해서 그 저주의 길을 달려가고 있습니다.
사탄의 특기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속이는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귀신같이 잘 알아서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서 유혹을 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사탄을 따르게 만들어 버립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그 뜻을 모호하게 하고 다르게 해석을 해서 사람들이 사탄의 말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많은 목사들이 대부분 인본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것을 보면 사탄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이 사람들은 거짓말을 너무나 뻔뻔하게 잘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해석해서 엉뚱한 말을 하면서도 아주 천연덕스럽게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위장합니다.
그들 중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 주려고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그렇게 했든지 모르고 그렇게 했든지 그들은 엄청난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가 사실은 사탄의 전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사탄의 말을 전하고 있는 저주받을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여러분 자신도 이런 책망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부활을 믿는 신앙
본문 31절에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고 했습니다.
제가 구원에 대해서 말씀드릴 때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에 참 쉬운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을 쉬운 길이라고 한 것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에 비하면 엄청 쉬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율법도 하나하나 다 지켜야 하고 천사같이 착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충성하고 헌신하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엄청나게 투자해야 합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사실은 불가능한 길이 그 길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은 참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을 그냥 감사함으로 받으면 됩니다. 그 믿음을 진실하게 고백하면 되고 끝까지 지키면 됩니다. 그 결과는 누구나가 다 100% 성공입니다.
우리가 쉽게 이런 구원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우리 편에서는 은혜이고 쉽게 가는 길이지만 그렇게 값없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충분한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에 그 공로로 우리는 이렇게 귀한 것을 쉽게 받게 된 것입니다.
31절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가신 고난의 길을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몇 마디 말씀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당하시기에 너무 고통스러운 고난이었습니다.
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인자’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는 말로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음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메시야라고 하면 기름을 부어서 임직했던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의 지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셨다면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대우를 받으셔야 할 분이셨지만 대우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세상에 오셔서도 사람들에게 군림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섬기셨으며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집에 태어나신 것이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사신 것이나 평생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사신 것이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2)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여기 장로들이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장로는 백성들의 대표로서 앞장서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에 본을 보여야 할 사람들이고 백성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여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영접하여야 할 사람들이었지만 앞장서서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죄 문제 때문에 매일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사람이라고 하면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아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 학자라고 하기도 하고 성경 말씀을 연구하여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성경을 바르게 보았다면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 줄을 알아야 하는데 몰라봤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몰라봤을까요? 이런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놓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라는 종교를 통해서 잘 먹고 잘살고 있는데 좋은 자리 차지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면서 살고 있는데 그것을 버리기가 싫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미 하나님 중심을 떠나서 인간 중심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일꾼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따라서 사탄의 종이 되어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당시 타락한 유대교 지도자들이 걸었던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타락한 중세교회 지도자들이 걸었던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고난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누리며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변질되고 타락하여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 이구동성으로 교회가 타락한 원인을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세시대의 교회가 타락하는데 천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교회는 100년밖에 안 되었는데 더 타락했다고 합니다.
3)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귀신들린 사람들이나 몹쓸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나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저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어떤 일을 하여야 하는가를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을 택하셨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좀 더 쉬운 방법으로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듯이 말씀으로 우리의 죄도 사하실 수 있는데 왜 이런 길을 택하셨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만큼 흉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사탄을 섬기면서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하는 우리 인간의 죄가 얼마나 흉악한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냥 훈계 몇 마디로 간단한 징계로 해결할 수 없는 흉악한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죽으리라고 선언하신 그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지만 이 세상에서는 고난의 길을 가야 하고 죽임을 당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 자체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길은 더 어렵고 힘든 고난의 길임을 각오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대형교회를 좋아합니다. 작은 교회에서 어렵게 전도해서 좀 가르치고 나면 대형교회에 사람들이 와서 진짜 교회에 가자고 해서 데리고 갑니다. 큰 교회에 가면 시설도 좋고 목사님도 훌륭합니다. 친구들도 많고 이런저런 취미생활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자부심일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함께 하기 때문에 큰일도 할 수 있고 우리가 가는 길이 잘못된 일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자부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몰려온다고 거기에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중심의 교회가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을수록 안심할 것이 아니라 이상한 눈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누구나가 다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 받고 잘 살고 좋은 일 하자는데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누구나가 다 이해하고 좋아하는 길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해서 찾는 자가 적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진짜 복인데 타락한 인간은 우선 이 세상의 복을 좋아하고 이 세상의 쾌락을 좋아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면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여쭈어보았습니다. 구원 천국 영생 이런 좋은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따를 것 같은데 왜 그 구원의 길을 가는 사람이 적느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 13:23-25)
아무나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고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 문은 좁은 문이기도 하지만 집주인이 어떤 사람에게는 열어주고 어떤 사람은 열어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이 바른 믿음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그 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소중히 여기고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이런 고난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것도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순교를 당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잘못된 길로 달려갈 때 우리는 그 길로 가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진리의 길은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 외로움 정도는 참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몰라줘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알아주실 것입니다.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본문 32-33절에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실 것인가를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 하신 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이 좋은 것 같았던 베드로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합니다. 조금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했으면서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하시자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을 했습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시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사탄이라고 꾸짖음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위한다고 한 말이 사탄의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거부하거나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에다가 무엇을 좀 덧붙이거나 다른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만드는 모든 것은 다 사탄의 유혹을 받은 사람들이 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니까 지금부터는 죄짓지 말고 좋은 일 하면서 똑바로 살자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똑바로 살자는 것을 강조하다가 중세시대의 교회가 타락하고 오늘날 교회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으로의 구원을 거부하고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사탄의 흉계가 숨어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만류한 것은 사탄이 하는 짓이라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자신이 존경하고 따르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고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체면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사탄을 따르는 악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교회를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가 인간의 일을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을 가졌는가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신앙을 가졌는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인간 구원의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이 세상에서 좀 더 잘 살고 보람되게 살자고 하는 사탄의 사주를 받은 어리석은 사람의 말을 따르는가 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이 심각한 질문 앞에서 바른 대답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을 하게 해주셨음을 믿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다른 복음을 믿는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유혹이 올 때 사탄이 내 뒤로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여러분도 외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인본주의가 얼마나 위험 것인지를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