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12.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23)
본문 : 막 6:34-44
제목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5.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36.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셨는데 그 첫 번째 이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어느 시험의 문제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에 대해서 서술하라”라는 문제였다고 합니다. 이 시험 문제를 받아든 학생들은 각기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자기 의견을 썼습니다.
어떤 믿음이 없는 학생은 말도 안 되는 비과학적인 문제라고 썼을 것입니다. 시원찮은 믿음을 가진 학생은 사람들이 꾸며낸 이야기를 왜 성경에 기록했는지 모르겠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간단하게 답을 썼는데 참 기가 막힌 답이었습니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더라”라고 했습니다. 물이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는데 그것이 포도주라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이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엄청난 능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답을 쓴 사람은 훗날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 된 바이런이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답안은 만점을 받았고 최우수 학점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지더라” 참된 믿음이 있는 사람이 멋진 문장력으로 쓴 멋있는 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 못지않게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된 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을 배불리 먹게 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멋진 문장을 한번 만들어보세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원주인을 만나니 수만 명을 배불리 먹게 하더라” 좀 어설픈 것 같아서 여러분에게 숙제를 냅니다. 멋있는 문장을 만드신 분에게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봐서 잘 아는 사건입니다. 오늘 저는 이 본문의 주제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정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본문 34절에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는데 먹을 것을 주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 그래서 불쌍한 사람들이 우리가 먹을 것을 주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30절부터 시작이 됩니다. 30절부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날 당시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파송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푸는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미처 쉴 시간도 없어서 피곤한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쉬라고 해서 피해갔는데 어떻게 알고 무리들이 그 자리에 먼저 와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자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적으로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라를 로마에 빼앗기고 누구 한 사람 그들을 지켜주려고 하지 않는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유나 평화나 이런 말은 사치에 불과하고 우선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도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지만 교회 지도자들은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만 열심을 내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들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는데 어떻게 가르치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 다윗의 시에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3)라고 했습니다.
이런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무엇이든지 부족하고 가는 곳마다 풀도 없고 물도 없어서 주리게 되고 악인의 길로 가면서 영혼은 죽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친히 목자가 되셔서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말씀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함을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그때와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은 먹을 것 때문에 그렇게 고통받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너무 배부르다가 보니까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그때 못지않게 참 신앙생활 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잘못된 지도자들이 많아서 자기 사리사욕만 채우려고 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서 교회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말을 좋아하고 천국 복음보다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여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똑똑하고 잘난 사람 같지만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불쌍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양식을 참된 진리를 십자가의 복음을 그들에게 주라는 말씀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본문 41절에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는데 먹을 것을 줄 때 어떤 방법으로 주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기적은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한 무리들을 가르치시다가 보니까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던 곳은 빈들이었기 때문에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말씀드리기를, 때도 저물었고 여기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힘드니까 촌과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해야 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기들보고 먹을 것을 사다가 주라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제자들이 계산하기를 거기 모인 사람들을 다 먹이려고 하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0데나리온은 노동자가 200일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라고 했습니다. 일당을 십만 원으로 치면 2천만 원쯤 되는 돈입니다. 그때의 일당이나 화폐가치가 지금과는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꽤 많은 돈임은 분명합니다. 제자들에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진 떡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알아보니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아이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 아이가 도시락으로 가져온 것 같습니다.
여기 떡은 서양식으로 빵이라고 하고 요한복음에서는 보리떡이라고 했습니다. 떡 중에서 제일 싸고 맛이 없어서 노동자들이나 먹는 흔한 떡을 말합니다. 물고기도 큰 물고가 아닌 작은 물고기로 보입니다. 멸치와 같은 아주 작은 물고기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아주 보잘것없고 그저 한 사람이 먹을 정도의 적은 양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예수님께 드려지면 엄청난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보잘것없는 작은 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축사라는 말은 감사라는 말입니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감사드릴 때 엄청나게 큰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고 작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누어줄 줄 모르는 사람이 있고 별로 가지지 못하면서도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따지고 계산하는 사람은 남에게 나누어주지 못합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머리가 좋아서 계산을 잘하는 사람 곁에 가면 얻어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 돈을 벌려고 얼마나 고생했는가를 알고 앞으로 세상 사는 동안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은 남에게 나누어줄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 은혜로 받은 구원이 얼마나 큰 것임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 받은 은혜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나누어주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비록 그것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와 같이 보잘것없는 작은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것에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시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알면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배불리 먹고
본문 42-44절에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는데 그 먹을 것을 준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오십 명씩 백 명씩 식사대열로 둘러앉히고 예수님께서 축사하신 그 떡과 물고기를 그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거기 모인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배불리 먹은 사람의 수가 남자만 해도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까지 하면 만 명도 더 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은 “다 배불리 먹고”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장 짧은 절이 오늘 본문 42절의 “다 배불리 먹고”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의 “항상 기뻐하라”가 공동 1위입니다.
성경의 장과 절은 중세시대에 와서 사람들이 편의상 나누었습니다. 사람이 나눈 것이지만 성령님께서 역사하셨다고 보고 그 역사하심을 따라 “다 배불리 먹고”를 한 절로 나눈 것은 이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시절에 배불리 먹는다는 것은 그것도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모두 다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고 소중한 일이었었습니다. 만약에 거기 모인 사람 중 일부가 먹지 못했거나 먹어도 배불리 먹지 못했다면 아마도 소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왜 나는 안 주냐? 왜 우리는 적게 주느냐? 여기저기서 항의가 들어왔을 것이고 주고도 욕먹는 일이 생겼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 불공평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로 잘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해서 어렵게 삽니다. 어떤 사람은 똑똑해서 공부를 많이 하고 어떤 사람은 미련해서 공부를 잘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고 어떤 사람은 연약합니다.
사람들이 돈의 위력 앞에 권력 앞에 서면 참 냉정합니다. 평소에는 서로 같은 사람이고 친한 사이처럼 보이지만 이익이나 권력 앞에서 참 냉정하고 확실하게 차별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평등하고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겠다는 다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꿈일 뿐이고 세상은 불평등하고 불공정하고 그래서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 많은 사람 앞에 서보면 가난한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가난이 죄가 아니라고 했던가요? 아닙니다. 가난은 죄입니다. 정말 가난하게 태어나서 가난하게 사는 것은 큰 죄인처럼 느껴집니다.
권력 앞에 서보면 그 권력 앞에서 평가를 받는 사람이 얼마나 비참한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참 비참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작은 권세라도 가지게 되면 그것도 권세라고 얼마나 잘난 척하고 권세를 휘두르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가게 될 하나님 나라는 이런 불공평한 나라가 아니라 정말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공평한 삶을 사는 정의로운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는 세상입니다. 빈부의 격차도 없고 권력의 격차도 없고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누구나가 다 동일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 믿음이 크거나 작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엄청난 일을 했거나 아무 일도 하지 못했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에 등수가 있고 급수가 있거나 인원 제한이 있다면 우리가 절대로 전도하면 안 됩니다. 우리보다 더 착하고 더 실력 있는 사람을 전도했다가는 우리가 밀려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 배불리 먹고도 남습니다. 다 구원을 받고도 자리가 남습니다. 얼마든지 전도해도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형편에서 살았든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든지 차별하지 않고 다 구원받고 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서 차별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물이 그 주인을 만나니 얼굴이 붉어졌더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원주인을 만나니 수만 명도 다 배불리 먹게 하더라” 우리가 구원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고 믿기만 하면 다 변화되고 다 구원을 받습니다. 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평등하고 공평하고 정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이 보리떡이나 물고기같이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면 기적 같은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 엄청난 복을 나누어줄 수 있고 다 구원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 대상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진리를 몰라서 방황하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작은 것이라도 감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준 것을 받은 모든 사람이 다 배불리 먹고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