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적 수준은?
히브리서 5장 11~14절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주 만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수준(水準)”입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사물의 가치(價値)나 질(質) 따위의 기준이 되는 일정한 표준이나 정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는 많은 수준의 차이를 만나게 됩니다. 지식의 수준, 경제의 수준, 문화의 수준, 교육의 수준 등 셀 수 없는 많은 수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우리는 나와의 수준을 계산하게 되고,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수준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준의 차이는 교회 안에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는 자들 사이에서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종종 사용하는 ‘모태신앙’이라는 표현이나, ‘신앙의 가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된 신앙의 연륜이 쌓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연륜이 얕은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록 연륜은 적지만 뜨거운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된 연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은 미지근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지식이 많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경의 지식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초대교회 안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일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고 교훈하면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이 있음을 책망하면서 저들을 “육신에 속한 자, 어린아이, 밥을 먹지 못하고 젖을 먹는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들의 영적인 수준이 너무 낮은 상태에 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는 이 서신을 읽은 자들에 대해서 영적인 수준이 낮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듣는 것이 둔하다, 젖을 먹는 자”라는 표현이 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러한 성도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영적 수준의 이야기를 절제하고 있습니다. 즉 성도들이 알아들을 정도의 수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해서 설명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의 영적 수준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수준도 알지 못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면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또한 반대로 자신을 과소평가한다면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이 지금 어느 수준에 있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더 높은 수준, 더 깊은 신앙과 삶의 수준을 지향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제자리에 멈추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 크고 중한 일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처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조숙(早熟)한 사람이 되어도 안 됩니다. 나의 수준을 바로 알고 그 수준을 따라서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나의 영적 수준은?』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본문 11절에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원문에는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이 없습니다. 다만 앞의 내용을 이어가는 “이것(οὗ)”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이것에 관하여는”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가 멜기세덱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내용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사도는 이 편지를 읽는 성도들에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대해서 할 말이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도들의 영적인 수준입니다. 즉 저들에게는 이 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많은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저들이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더 이상의 깊은 설명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둔하다(νωθρός)”라는 표현은 ‘동작이 굼뜨고 게으르다, 이해력이 둔하다, 재치가 없고 감수성이 부족하다’ 등의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는 이 표현을 통해서 이 편지를 읽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력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 말씀에 대한 탐구력도 없고,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고 하는 열의도 없음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아무리 진리를 선포하고 해석해 주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라고 외친 것과 같습니다(사6:9). 예수님도 이사야의 이 예언을 인용해서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적용하셨습니다(마13:11~15).
성도 여러분! 여기에 목사의 답답함이 있습니다. 목사는 어찌하든지 성도들의 영적인 수준이 높아지기를 소망합니다. 목사는 이를 위해서 늘 말씀을 묵상하고 성도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목사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의 대부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목사는 성도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그러한 목사의 의도를 알지 못합니다. 알면서도 외면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신앙의 수준이 높은 자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수준을 바로 알지 못하면서 자신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 수준을 높일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세우는 일에 부지런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바로 깨닫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의 삶에서 살아낼 수 있도록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Ⅱ.신앙의 성숙도는?
본문 12절에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도는 이 서신을 읽는 성도들의 신앙적인 성숙도가 낮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때가 오래되었으므로”라는 것은 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들은 이미 오래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보아도 지금 정도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저들의 영적인 수준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부터 다시 배워야 할 수준밖에 안 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 메시지와 가르침 전체’를 가리킵니다. 또한 “초보”는 ‘기본, 기초, 원리’ 등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저 성도들은 교회 안에 오랜 시간을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전이 없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배웠을 것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기초부터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저들의 그 수준이 퇴보하고 말았습니다. 점점 그 수준이 높아지지 않고 오히려 낮은 수준, 곧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의 수준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지금쯤이면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할 텐데, 젖을 먹어야 하는 수준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시간상으로 본다면 세상의 그 어떤 도전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할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보다 연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로, 예수를 믿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들의 모습 속에서 지금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나의 지금 영적인 성숙도가 신앙생활을 한 연륜에 비교할 때, 어울릴 만큼 성숙해져 있습니까? 나는 교회에 출석하고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린아이의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정도면 다른 성도들을 가르치고, 본이 되고, 이끌어 주고, 붙들어 주어야 할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까지 자기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진보를 요구합니다. 신앙은 자라야 합니다. 성숙해져야 합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은 정체의 신앙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왜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성숙도에 머물고 있습니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이 그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 두 종류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수준이나 정도 없습니다. 이는 다 같은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적은 은혜로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구원을 얻은 자로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이는 사람마다 다 다른 수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믿음은 성숙한 자가 있고, 미숙한 자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는 수준이 있는가 하면 배우고 따라가야 하는 수준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정도에 있습니까? 내 믿음의 성숙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실 정도입니까? 아니면 책망을 받을 정도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성숙해집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숙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성숙을 위해서 날마다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서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답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Ⅲ.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은?
본문 13~14절에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분별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분별(διάκρισις)”이라 함은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적당하게, 또는 모호하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보아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도록 구별하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성도는 선(善)과 악(惡)에 대해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영적으로 성숙한 자만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진리 안에서 성숙한 성도는 무엇이 옳고 무엇인 그른지에 대해서 다시 검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정확하게 구별할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나타나는 선과 악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교리적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부합하면 선이요, 부합하지 못하면 악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따르면 선이요, 복음을 따르지 않으면 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선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악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정확하게 구별할 능력이 있는 자가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은 이러한 일이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보통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일반적인 기준에 둡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거나 해를 입히지 않으면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선과 악은 이러한 일반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준은 철저하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만이 선이요, 그 외의 것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보여도 악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때는 바로 이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마25:31~46).
따라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영적 어린아이는 이러한 구별을 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어린아이(νήπιος)”는 ‘아기나 유아’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파이디온(παιδίον)”과는 달리 이해력이나 지식의 수준이 매우 낮은 자를 비하해서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들은 아직 의의 말씀인 복음을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들을 때 이를 낯설어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그 복음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셨고, 고린도전서 3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신령한 자들에 반대되는 육신에 속한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4장 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적용했고, 에베소서 4장 14절에서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는 사람에게 적용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나이가 어리고 미숙한 아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미숙해서 복음의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영적으로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언제나 젖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섭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면 결코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늘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고, 또한 그분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성숙한 자가 되면 복음을 기준으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를 구별하는 자가 됩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 무엇이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인지를 구별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을 가르칠 수 있고, 붙들어 주고, 이끌어 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린아이입니까? 아니면 성숙한 자입니까? 우리는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자입니까? 우리의 기준에는 언제나 복음이 있습니까? 우리의 목적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나 자신을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는 안경을 통해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세상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어느 정도로 성숙한 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나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 자리도 알지 못하고, 나 자신의 수준도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습니까?
내 신앙의 성숙도는 어느 정도입니까?
나는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까?
성도는 이러한 자신의 수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좀 더 높은 수준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이나 이단의 유혹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연약한 성도들을 가르치고 붙들고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모든 성도가 지금보다 이후가, 오늘보다 내일의 영적 수준이 높아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오늘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이러한 소원 위에 성령께서 함께하심으로 풍성한 능력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