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9. 28.광성교회 주일 낮 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82)
본문:막15:6-15
제목:나는 죽이는 사람인가 살리는 사람인가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어령 씨가 쓴 “메멘토 모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란 라틴어로 “죽음을 생각하라”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사람은 다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이어령 씨는 여섯 살 때부터 이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았고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알고 난 후에 이 말이 그의 일생의 좌우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늘 깊이가 있고 삶의 의미들이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메멘토 모리 책의 내용은 우리나라 최고의 성공한 기업가인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죽음을 앞두고 천주교 신부에게 기독교에 관한 24가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 질문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이어령 씨가 자신도 병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답변하는 형식으로 쓴 책입니다.
최고로 돈이 많고 모두가 인정하는 성공한 기업가가 죽음을 앞두고 정말로 알고 싶어 했던 것을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이 역시 죽음을 앞두고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하여 답변한 책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로 시작해서 “성경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하는 데 부자는 악인이라는 말인가요?, “지구의 종말은 올까요?”라는 질문까지 우리도 알아야 할 중요한 질문들이었습니다.
이어령 씨는 세상 학문과 나름대로 성경에 관한 지식도 있는 사람이라서 정성을 다하여 답변했습니다. 그런데 신학자가 아니라서 특별히 성경의 핵심인 복음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답변의 내용은 좀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엄청난 갑부가 죽음을 앞두고 간절히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한 것들을 우리는 알고 있고 이미 믿고 있습니다. 평생 학문을 연구한 지식인보다 우리는 더 자세하게 더 바르게 알고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보면서 사는 것이 참 중요한 일입니다.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라는 이어령 씨의 말처럼 사실 우리 인생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삽니다.
어떻게 하든지 건강하게 살고 오래 살고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살아야 하고 그러면서도 수많은 죽음의 고비들을 넘기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서 생명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으며, 왜 죽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는가, 어떻게 하면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는가를 기록한 책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영원한 생명에 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재판의 마지막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요구에 못 이겨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라고 그 재판의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바라바’라는 사람과 대제사장의 충동을 받은 무리와 로마 총독 빌라도와 그리고 예수님입니다. 이들을 죽음과 관련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들을 살펴보면서 “나는 죽이는 사람인가 살리는 사람인가”라는 제목으로 우리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라바-남을 죽이면서 사는 사람
오늘 본문 6절에서 7절에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사면해서 풀어주는 관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면 대상에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바라바는 강도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민란이 어떤 사건이었는지 그 성격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일제 치하에 있었던 독립운동처럼 로마의 학정에 반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살인 사건이거나 아니면 안중근 의사가 일본 총리대신 이등 방문을 죽인 것처럼 적군의 장수를 죽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훌륭한 사람으로 좋은 일을 하다가 살인을 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를 강도라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소요를 일으키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생명은 참 귀한 것인데 그 생명을 죽이는 것은 엄청난 죄악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남의 소중한 생명을 죽이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살인죄는 인간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될 가장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십계명 중 인간이 서로에게 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아무나 살인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힘도 있어야 하고 기술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주 악한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보통 사람으로 보통정신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보훈을 통하여 이 살인죄를 재해석하셨습니다. “옛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라고 하셨습니다.
살인죄만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것, 형제에게 욕하는 것,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도 살인죄와 같이 심판을 받고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지키는 척하면서 교만한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이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화를 내고 욕을 하고 남을 무시하는 것이 쌓이면 살인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를 남을 죽이는 일로 생각하고 조심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또 그런 취급을 받는 사람이 죽음을 맛보는 고통을 당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기심을 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이기심 지나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런 죄들을 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지 못함을 늘 아쉬워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명도 이렇게 소중하기 때문에 살인을 하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그보다 더 훨씬 더 소중하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소중한 영원한 생명을 빼앗는 일은 정말로 삼가야 합니다.
그 소중한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밤낮으로 이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것은 이 복음을 믿는 믿음만이 유일하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이단들이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강조하는 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말씀 같아서 마음이 아픕니다. 그것이 자신들에게는 목회 성공이라는 작은 이익을 줄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빼앗아가는 엄청난 살인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물론 바라바처럼 살인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나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양보하고 희생해서 그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좋은 것을 나누어줄 줄 아는 삶이 참으로 행복한 삶입니다.
나의 부족한 믿음 때문에 잘못된 처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하여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여서 영원한 생명을 빼앗는 살인죄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이 복음을 전하고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나의 가족이 나의 이웃이 나의 친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무리들-남을 죽이라고 하는 사람들
본문 12절에서 14절에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모인 무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대부분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었을 것이고 나름대로 종교나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때도 많은 사람이 몰려왔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이 타고 오신 나귀 새끼 앞에 자기 겉옷을 벗어서 깔기도 하고 나뭇가지를 꺾어와서 깔고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면서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며 환영했습니다.
그때 그 무리는 흩어지고 다른 무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불과 며칠 만에 생각이 확 바뀌어서 이제는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이 무리는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고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친다는 것은 정말로 정신 나간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그것도 흉악한 강도와 예수님을 비교해서 남을 죽인 흉악한 강도는 살려달라 하고 남을 살리려고 오신 예수님은 죽여버리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참 말도 안 되는 짓인데 그런 악한 말을 서슴지 않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쳤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죽이려고 했다든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쳤다든지 뭔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렇게 외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삶의 참된 의미를 알게 해주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신 일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것은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지도자의 충동에 따라서 자기들이 하는 말이 어떤 말인지도 모르고 외친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자기가 하는 행동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남의 말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외치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이 결국은 어리석고 악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외칠수록 거기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거나 아니면 욕심 많고 잘못된 지도자들에게 속아서 외치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다 뭐든지 잘 알고 바르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일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알면 알수록 가까이하면 할수록 다 어리석고 미련하고 욕심이 많고 악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서 헌신하기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고 미워하고 죽이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빌라도-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
본문 15절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이 사람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좀 억울한 사람입니다.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의 재판을 맡게 되어서 순간의 잘못으로 수천 년에 걸쳐서 모든 기독교인에게 예수님을 죽인 사람으로 욕을 먹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당대 최고의 악한 죄인인 바라바와 예수님 중 한 사람을 석방해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당연히 예수님을 풀어주라고 외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남을 죽인 악한 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외치고 의롭고 선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래서 그 무리의 성화에 못 이겨서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습니다.
민란이 나든지 말았든지 그들이 고함을 지르든지 말았든지 소신대로 예수님을 무죄 석방했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그 권력을 잘못 사용하여 죽일 사람은 살리고 살릴 사람은 죽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목숨을 죽이고 살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 없이 한 말 한마디가 주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도 하고 죽음으로 달려가게도 합니다. 우리가 신경 쓰고 한 좋은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도 하고 생명으로 달려가게도 합니다.
제가 아동센터 선생님들에게 자주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은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에 서 있는 아이들이다.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지도해주느냐에 따라서 그들이 인간다운 행복한 삶을 살게 할 수도 있고 여전히 불행하게 살 수도 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지도하라고 말합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우리의 행동 하나가 그들을 행복하게 할 수도 있고 불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복음이라는 엄청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성도다운 삶을 살지 못함으로 인해서 시험을 받고 교회를 떠나고 영원한 생명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남을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으신 분
죽음과 연관하여 생각하면 죽음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 예수님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신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비록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하나님이셨습니다. 말씀 한마디만 하셔도 험한 풍랑도 잠잠하게 하셨고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으신 능력을 가진 분이십니다. 마음만 먹으면 천군 천사를 동원하여 교만하여 날뛰는 허접한 인간들을 다 죽여버릴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많은 사람의 생명을 건지셨습니다. 그것도 이 세상의 짧은 육신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예수님의 희생정신을 본받아서 우리도 남을 위해서 헌신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런 말이 우리 예수님의 죽으심을 그런 정도로 평가절하하는 말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희생하고 헌신하고 그래서 죽음에 이른다고 해도 그 죽음은 나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 죽음일 뿐입니다. 나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나 자신은 그저 죄인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나 대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심으로 나의 죄를 다 용서받게 해주시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게 해주신 것을 알려야 합니다. 그것을 믿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복음을 이 복된 소식을 우리 가족에게 친척에게 이웃에게 친구에게 전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멘토 모리,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은 하루하루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자신도 죽어가면서 남을 죽이는 악한 일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속여서 빼앗는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복음을 생각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나는 죽이는 사람인가 살리는 사람인가를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이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믿음을 소중히 여기며 이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또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