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히브리서 4장 3~10절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성도 여러분! 사도는 앞에서 우리에게 장차 들어가야 할 안식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실패했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안식이 우리에게는 아직도 유효한 것입니다. 다만 오늘의 우리는 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지 못함으로 그 안식을 누리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들의 불신앙은 불순종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은 저들에게 가나안 땅과 안식에 들어갈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판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영원한 안식에 대한 약속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3절에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들어가는도다(εἰσερχόμεθα)”는 결코 변할 수 없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고 하는 사실은 확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복음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도는 단지 그 시대의 성도들만이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가고 오는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의 그 약속,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전제조건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그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 믿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선물입니다.
이제 사도는 우리가 그 안식에 들어간다고 하는 확신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믿음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그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우리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로서의 말씀, 곧 복음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한낱 자신의 사상이나 이론 또는 신념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우리의 안식은 창조 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본문 3절에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엄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해석하기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이는 더 이상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의미를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그 말씀의 성취만이 남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멸망함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의 약속은 이미 창조 때부터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원문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καίτοι)”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앞의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확실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맹세가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 자체가 폐하여진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 때부터 약속된 것이 광야 이스라엘로 인해서 폐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안식의 계획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 때부터 그 전모가 드러났습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사도는 창세기 2장 2절의 말씀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다 인용하지 않고 축약해서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라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마지막에 안식을 두셨습니다. 즉 안식까지가 하나님의 창조 역사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는 이 안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안식이 없다면 하나님의 창조가 불완전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그 안식을 향하여 전개됩니다. 하나님은 그 안식을 향하여 자기 백성을 이끌어가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탈락자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저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그 위대한 계획과 약속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식을 누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저들은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안식에서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안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은 어제나 오늘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 때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조상들이 그 약속을 성취함에 있어서 실패했다 할지라도 오늘의 우리에게는 여전히 유효한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그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 약속이 우리가 맞고 있는 상황이나 현실을 극복하는 능력이어야 합니다. 이 약속과 바꿀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힘이 들고 어려울지라도 그 약속 때문에 우리는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리고 지금 누리고 계시는 그 안식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Ⅱ.안식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본문 5~7절에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또 한 번 과거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서 흔들리는 자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믿음과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30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편 95편 11절에서는 이 말씀을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라고 바꾸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즉 저들은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약속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할 사람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마련하셨고, 약속하신 그 안식을 자기 백성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을 들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완고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순종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조상들이 들어가지 못한 그 안식에 오늘 우리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안식의 복음은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남은 그 한 사람까지도 그 안식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 복음을 전파하도록 당신의 사람들을 보내고 계십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도 그 약속을 성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본문 8절에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호수아와 그를 따랐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세우셨고, 그를 통해 2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미만의 자녀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들은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도 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저들은 단지 하나님의 그 영원한 안식의 맛만 보았고, 그림자만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저들은 또한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참되고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안식입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여호수아를 통해 성취된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안식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한 가나안 땅의 안식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 “다른 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분명 가나안 땅에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준으로 하는 날입니다. 따라서 이 날은 미래의 어느 날이며,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하는 날과는 전혀 다른 날입니다.
그렇다면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관련된 날입니다.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에 주신 안식은 본질적이고 참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그 안식이 완전하게 성취되는 “다른 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지 수백년이 흐른 후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다른 날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영원하신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모든 시간이 “오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도 오늘입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간은 “오늘”에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지만 모든 사람이 동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는 자만이 누리게 됩니다(마11:28).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안식에로의 초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요5:40). 따라서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요, 그분이 초청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존재합니다. 오늘 교회의 성도들은 이 안식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오늘의 우리에게는 그 안식의 날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 그 날을 남겨 두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날이 우리에게 반드시 올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날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날은 우리가 이 세상에 누리는 그 어떤 평안이나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을 향해 전진하는 자들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 길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와 상황에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 저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을 더욱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안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그 안식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평안이요, 기쁨이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Ⅲ.우리의 안식은 축제입니다.
본문 9~10절에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는 안식을 소망할까요? 단지 이 험한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저 영원한 천국에서 편히 쉬기 때문일까요? 본문에 등장하는 “안식”은 두 가지의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κατάπαυσιν)는 단순하게 쉰다는 개념입니다. 이는 정적인 개념입니다. 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σαββατισμός)는 안식일의 개념에서 온 것으로 동적인 개념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안식이 모든 일을 중단하고 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안식”이라고 하는 단어를 단순하게 “쉼”이라고 하는 해석으로 그치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은 분명 쉼이라고 하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또한 예수님의 초청을 받고 그 안에서 쉬는 자들은 분명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모습입니다. 즉 안식이지만, 단순히 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모습, 즉 일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4장 10~11절과 5장 11절 이하에 보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성도들과 천사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경배하며 찬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천국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거기에는 생명수의 강이 있고,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이는 분명 천국에 있는 성도들이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국에서의 삶이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쉬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오히려 천국의 모습은 잔치요, 축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천국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은 마치 왕이 아들을 위해서 준비한 결혼 잔치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마22장). 결국 우리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 안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식의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누리며 찬양하는 축제의 모습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망입니까?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어두움이 주관하는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인 우리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릴 저 안식의 모습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것이요, 최선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하늘 안식의 그 축제 현장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안식은 이미 우리보다 먼저 간 신앙의 선배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그 축제를 즐기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그 현장에서 최고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에게는 하늘의 안식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믿음과 소망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발걸음을 가로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소망이 우리를 더 강한 용사로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광성의 모든 성도들이 이 믿음과 소망을 굳게 붙들고 주님과 함께 누리는 그 영광의 자리에까지 넉넉히 들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