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가지 말라

 

 

 

히브리서 64~8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다양한 말씀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어떤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어떤 말씀을 대하다 보면 우리 안에 넘치는 감사와 찬양이 있게 합니다. 하지만 어떤 말씀은 이러한 일들과는 반대되는 상황을 만나게 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 의분(義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 안에 커다란 두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게 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본문의 말씀이 분명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경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분명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 성도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자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경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경고의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제는 배교(背敎)”입니다. 그리고 이는 당시 교회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서신을 읽고 있는 자 중에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아 수고하는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일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 요인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내부적인 요인도 있겠고, 외부적인 요인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요인이 무엇이든 가장 위험한 것은 저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버리고 다시금 과거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이전으로, 복음 이전으로, 믿음 이전으로 되돌아가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복음이 아닌 율법으로 되돌아가려고 하기도 합니다.

 

 

사도는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 이전으로 돌아간다면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뿐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에게도 이러한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예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 복음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힘이 듭니다. 자꾸만 어려운 일들이 생겨납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이 훨씬 자유로웠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때가 훨씬 편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진정 예수가 없는 저 세상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입니까? 복음이 아닌 세상의 거짓들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까? 저 어두운 세상에 우리에게 참 소망을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있는 예수가 그토록 연약한 것이었습니까? 나에게 있는 믿음이 그토록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소망이 그토록 가벼운 것이었습니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그토록 붙들고 지켜 오늘의 우리에게 전수했던 것들이 그렇게 쉬운 것이었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자꾸만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유혹 앞에서 흔들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과거 그 시대의 교회에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같은 의미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되돌아가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배교는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 4~6절에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강조되는 표현은 할 수 없나니(δύνατον)”입니다. ‘difficult(어려운)’가 아니라 ‘It is impossible(불가능한)’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서는 이 표현이 6절에 나타나지만, 원문은 4절의 가장 앞에 놓임으로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배교한 자들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의 은총을 받는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회개의 은총도 없고 또 한번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문의 이 말씀은 신학적으로도 많은 논쟁을 낳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 장로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나 성도의 견인과 같은 주제와는 상충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자라고 말씀합니다(1:4~5).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가 타락하여 구원의 대열에서 이탈하게 되고, 다시금 회복의 기회가 없다는 것은 앞의 말씀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해답은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신 말씀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하는 말씀입니다(13:1~23). 거기에는 4종류의 밭이 등장하는데, 길가와 같은 밭, 돌밭, 가시떨기가 덮고 있는 밭, 좋은 밭입니다. 이 중에 본문에 등장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대상은 두 번째와 세 번째에 해당하는 자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외견상으로는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유야 어떻든지 궁극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본문에서 배교하는 자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저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자처럼 보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처럼 보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처럼 보입니다.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세례도 받았습니다. 직분도 맡았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서 칭찬과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누가 보아도 신실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모습과 궁극적인 구원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하신 비유가 바로 알곡과 가라지 비유입니다(13:24~30).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상에 있는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습니다. 다만 육신을 가진 우리의 눈으로는 알곡과 가라지를 완벽하게 구별해 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지막 날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심판하시는 그날에 분명하게 구별이 될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말하는 자들은 교회 안에서 알곡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가라지인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보실 때는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는 이러한 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입니다. 특히 자기 백성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그 절대적인 주권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자기 백성을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백성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제 성령께서는 성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를 적용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하고, 이들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또한 교회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땅의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다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의 교회에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리지도 있고,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자도 있고, 가시떨기로 덮인 마음을 가진 자도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몸은 교회 안에 있지만, 마음은 세상의 위협이나 유혹에 흔들려서 이 궁극적인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회개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다시 회복하시는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배교는 무서운 일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영원히 배제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제 그 배교가 행하는 궁극적인 죄악이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배교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이기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완전하게 배제되고, 회개와 회복의 기회가 완전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먼저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건이 있습니다. 이는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는 가장 중심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은 바로 이 사건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도 이 사건을 향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입니다. 사실 역사에 등장하는 십자가는 많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십자가 중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다른 모든 십자가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인 십자가는 죄인을 처형하는 형틀입니다. 이 십자가의 형벌은 너무나도 잔인한 것이기에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형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죄가 아닌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택하신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위한 구속의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죄에서 속함을 받기 위해서 다른 그 어떤 제사와 제물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되돌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거부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8:44). 따라서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시고, 또한 우리의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되돌아가는 것은 자신이 마귀에게 속한 것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치욕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이 가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치욕적인 처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발가벗겨진 상태로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리는 처형입니다. 따라서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모욕을 당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멸시와 천대 모욕을 온전히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전혀 그러한 일들을 겪지 않으셔야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 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저들이 당해야 하는 멸시와 천대 그리고 모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와 죄와 그 결과로 당해야 하는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되돌아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를 위해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결국 배교의 길은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배교는 단순히 종교를 바꾸는 정도가 아닙니다.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일입니다. 배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실패작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배교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결국 배교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가장 놀라운 일인 하나님의 구원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배교자에게는 심판뿐입니다.

 

 

본문 7~8절에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갑자기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주제와 밀접한 내용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되돌아가게 될 때 맞이할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배교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인 것임을 농사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비유로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농사꾼은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립니다. 그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해서 그 씨앗을 자라게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열매를 맺게 되고, 농부는 그 열매를 통해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에는 농부의 땀과 노력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입니다. 비를 주시는 분도, 햇빛을 주시는 분도, 자라게 하시는 분도,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도, 그리고 작물이 자라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방해물들을 막아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풍성한 열매는 언제나 농부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이렇게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땅은 언제나 좋은 열매만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가시와 엉겅퀴를 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도 햇빛을 받고, 비를 흡수하지만, 농부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농부를 이러한 것들을 뽑아서 말리고 결국을 불에 던져 사르게 됩니다.

 

 

이처럼 똑같은 땅에서 자라지만 그 결과가 너무나도 극명하게 나누어지는 일을 봅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배교자들의 최후를 보여주는 예()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배교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자라지만 그 결과가 좋은 열매로 기쁨을 주게 되는지, 아니면 가시와 엉겅퀴로 불에 던져지든지 분명한 결과를 낳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우상에게로, 율법으로 되돌아가 가는 배교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은혜를 거부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지 않는 자, 성령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들은 다시 한 번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때는 돌이키고 싶어도 결단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심판의 자리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24:51).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모습을 완전하게 버려야 합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 만족해야 합니다. 율법이 아닌 복음에 있음을 만족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복음 때문에, 교회 때문에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어려움도, 그 어떤 유혹도, 그 어떤 핍박도 우리 예수 그리스도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8:18), 이 고백이 바로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더욱 견고해짐으로 이 세상의 그 어떤 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되돌아가는 이 세태에서도 우리의 믿음을 굳게 지키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