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있는 확신
히브리서 6장 9~12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비행기를 타면 그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꼭 보고 듣는 교육이 있습니다. 이는 비행 중에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산소마스크의 착용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에 보면 비상 상황에서 산소마스크가 내려오면 먼저 나 자신이 그 마스크를 착용하고, 이후에 주변에 있는 노약자나 어린이를 도와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나 자신이 먼저 안전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주변의 사람을 도와주기는커녕 자신의 안전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언제나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나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지는 않은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나 자신이 흔들리면, 결코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고, 붙잡아 주고, 인도해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뒤돌아 가지 말 것에 대한 사도의 경고와 권면을 들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가진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율법으로, 되돌아 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엄청난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죄악은 회복할 수 없고, 결국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앞의 내용과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입니다. 앞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하는 결과를 보여주는 내용이었다면, 본문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붙잡아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면 우리는 그 믿음을 굳게 붙들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으라고 권면합니다.
본문의 원문은 “확신하노라(πεπείσμεθα)”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조사하고 또 조사하고, 검사하고 또 검사해서 이제는 더 이상 살펴볼 필요도 없는 확실함을 증명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즉 이는 단순한 희망 사항이나 기대가 아닙니다. 더 이상 논할 가치조차 없는 확실한 것입니다.
사실 사도는 성도들을 향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분명 긍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깊은 관심과 사랑을 이 확신이라고 하는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본서에서 오직 여기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회 공동체 안에 분명 성도들의 믿음을 흔들고 있는 무리가 있음을 알고 있는 사도는 앞부분에서는 아주 강한 어조로 저들에게 경고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음성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에게 있는 확신』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우리는 구원 안에 있습니다.
본문 9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서신을 받고 있는 성도들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지금 배교의 위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직 소망이 있는 것은 저들이 배교로 완전하게 돌아서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저들 가운데는 임박한 시험과 핍박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되돌아가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도는 아직까지는 믿음을 지키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결코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며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하심을 설교하면서 그 예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되돌아갔을 때, 맞이하게 될 불행한 결말을 통해서 경고의 음성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이제 사도는 성도라면 반드시 확신해야 할 내용들을 설명합니다. 그리하여 그 확신을 토대로 해서 성도가 성도답게 서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확신은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교회 안에서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라고 하는 확신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확신하는 구원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 안에 다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예배 시간에 고백하는 이 사도신경은 단지 우리가 암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문도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도신경의 내용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고백은 헛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중얼거리는 것이요, 이방 종교에서 사용하는 주문이나 염불과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나의 구원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역사를 믿고 고백합니다. 즉 내가 창세 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죄인이고, 또한 수많은 죄를 범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 정죄되고,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제 나의 모든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 값을 지불되었고, 이제는 나는 정죄되거나 형벌에 처해지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믿는 나는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나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죄로 인해서도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죄와 형벌을 대속하셨음을 믿는 나는 그 모든 죄의 결과인 형벌에서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모든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공수표가 없습니다. 반드시 그 약속대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받은 구원에 대해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원의 확신을 토대로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진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Ⅱ.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본문 10절에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10절의 말씀은 앞의 9절의 말씀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놀라운 은혜에 거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10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의 말씀은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의하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대해서 절대적인 주권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어긋나는 그 어떤 계획이나 역사를 이루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지금 사도가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공의로운 것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그 믿음을 전제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완전한 길을 이루셨습니다. 나아가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대속의 공로를 성부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예정하시고 기억하신 우리에게 적용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구원이라고 하는 놀라운 은총을 입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단지 우리의 구원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공의로우심을 근거로 우리의 행위까지도 기억하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의 “행위”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한 모든 일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일, 즉 세미한 일까지도 완전하게 아시고 기억하십니다. 따라서 그분만이 우리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공의롭게 보응(報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6~7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것은 철저하게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입니다. 이는 ‘너희들이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곧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행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결단코 잊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이 서신을 읽는 성도들이 행한 것은 바로 그 사랑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저 성도들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그 사랑으로 다른 성도들을 섬겨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저들의 섬김이 어떤 내용인지를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섬김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잊지 않으신다고 했다면, 그 섬김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섬김이요, 하나님이 저들에게 그에 합당한 보응을 하실 만한 섬김일 것입니다.
결국 저 성도들의 섬김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한 섬김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섬김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저들의 섬김을 기억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행복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아닐까요? 다른 누가 아닌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기억해 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합니까? 그 믿음으로 인해 내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또한 내가 예수 안에서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신다는 사실이 우리를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게 합니까? 비록 나는 작은 일이지만, 그 일이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한 일이기에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기억해 주신다는 것을 내가 믿는다면 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을 믿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나를 기억해 주신다.” 이 사실을 확신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Ⅲ.약속으로 받을 기업이 있습니다.
본문 11~12절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바라면서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그것은 분명한 소망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는 길의 끝에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에 대한 보상을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도가 궁극적으로 소망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약속 때문에 오늘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이 약속을 성취할 소망 때문에 오늘을 인내하며 살아갑니다. 이 약속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날까지 우리는 변함이 없는 열심을 품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고 전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고, 공의의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주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믿는 우리에게 주어질 궁극적인 약속이 무엇인지를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소망의 풍성함입니다.
여기에서의 “소망(ἐλπίς)”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최후의 구원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풍성함”은 양(量)이 많다는 것보다는 ‘완전해진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길을 마친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 완전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 때문에 오늘을 복음 안에서 부지런하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수고에 대해서 분명한 보상을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서 주님께서는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22장 12절에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은 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함으로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남으로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숨김으로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약속을 성취하기까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성도들이 걸어야 하는 길이 바로 저 믿음의 조상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처음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미 수천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걸었고, 증명한 그 길입니다. 저들이 걸었고 증명한 그 길을 우리가 그대로 본받고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저 조상들은 우리가 걸어야 할 방향과 방법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이 있음을 믿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그 모든 약속의 결과를 준비하시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심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을 부지런하게 살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서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질 저 영원한 천국의 기업을 받기 위해서 믿음과 인내로 우리의 경주를 달려야 합니다. 마치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저들의 믿음과 인내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영원한 기업이 있다.” 이 사실을 확신하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심을 믿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받은 분명한 약속의 결과물이 있음을 확신하며 오늘을 믿음과 인내로 우리의 경주를 달려가야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확신 속에서 날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경주를 다함으로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과 영광을 얻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우리의 영원한 푯대이자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