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9.광성교회 주일 낮 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83)
본문 : 막 15:16-20
제목 : 희롱당하신 예수님
“16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17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18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20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이며 수필가인 로맹 롤랑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이란 15분 늦게 들어간 영화관과 같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보아야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 이런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를 알 수 있고 이야기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들어가면 영화의 중요한 시작 부분을 보지 못해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고 그냥 의미도 모르고 보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생을 다 그렇게 중요한 시작을 모르고 삽니다.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바른 삶인지 모르고 그냥 살다가 갑니다.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부모님이나 선배들의 삶을 보면서 나름대로 인생의 의미를 알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사실 그 지식도 완전한 지식이 아니고 그 선배도 진짜 인생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똑똑하고 아무리 많이 배워도 결국은 진짜 인생의 의미도 모른 채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입니다.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15분 늦게 극장에 들어온 사람처럼 신앙의 참된 의미를 잘 모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복음이 그렇게 중요한지 왜 복음을 믿는 믿음이 중요한지 잘 모르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설교도 서론부터 잘 듣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서론에서 설교의 목적을 이야기하고 가는 방향도 설명하기 때문에 서론부터 잘 듣는 것과 중간부터 듣는 것은 많은 차이가 납니다. 설교가 귀에 잘 안 들어오는 것은 중간중간 듣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 우리가 이렇게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복음을 믿는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인생의 시작과 끝을 알고 성경의 시작과 기록목적을 알고 성경의 핵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최악의 조롱을 당하시는 모습입니다. 왜 성경은 이런 최악의 모습까지 기록하고 있을까요?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대로 기록했겠지만 뭔가 깨달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악한 로마 군병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 존재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악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아주 특별하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런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설교를 잘 들으시고 우리 인간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 그 흉악한 죄인인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군인들이, 온 군대를 모으고
본문 16절에 “군인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군인들은 로마의 군인들을 말합니다. 브라이도리온은 총독의 관저를 말합니다. 그리고 군대는 총독의 호위와 임무 수행을 위해서 데리고 온 부대를 말하는데 약 300명에서 600명 사이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군대는 유대인이 들어 있지 않은 이방인으로 구성된 군대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군사훈련을 받으면 반란을 일으킬까 봐 군에 입대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모두가 다 외국인이고 이방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봤을 때는 개나 돼지로 취급받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탄의 종들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받은 무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최악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희롱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께서 배반을 당하고 붙잡혀 가시고 재판을 받으시는 과정을 다 살펴보았습니다. 이 과정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들도 이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혀가시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도 이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로 구성된 공회에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유대를 통치하던 헤롯왕도 정죄했고 유대인의 온 무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이방인들도 이 과정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고 그를 따르는 이방인 군사들이 예수님을 희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지도자나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들이나 이 역사의 현장에서 악역을 담당한 사람들이나 다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인생이 사실은 다 이렇게 흉악한 인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요즈음 목회자 훈련원 세미나 강의를 준비하면서 구약성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몇몇 책을 보고 있습니다. 그중에 유대인이면서 기독교인이 된 성경학자들이 쓴 “모세를 읽으며 예수님을 보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모세를 읽는다는 것은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읽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세오경은 구약성경의 핵심입니다. 구약성경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의 핵심이며 우리 모든 인생이 알아야 할 중요한 핵심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오경에는 세상 만물의 창조과정과 인생의 삶이 시작된 모든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십계명을 비롯한 우리 인간이 살면서 지켜야 할 수많은 규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세오경을 토라라고 하는데 “모세를 읽으며 예수님을 보다”라는 책에서 “토라는 율법 위반을 예상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책은 서론과 결론에 그 핵심을 기록하고 있는데 모세오경의 서론인 창세기 앞부분과 결론인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인간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죄인으로 살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극장에 15분 늦게 온 사람처럼 이런 중요한 서론을 모르니까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어보려고 애쓰면서 삽니다. 율법의 극히 일부분만 지키고 의로운 사람처럼 행세하는 위선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기록한 목적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읽으면 죄인인 우리에게 필요한 예수님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본문 17절~19절에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하는 장면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갈대를 손에 들게 했습니다. 왕이 입는 옷과 왕관과 손에 드는 홀을 들려주고 왕의 모습을 하게 하고 희롱을 하고 있습니다.
경례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하며, 꿇어 절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왕에게 인사하는 예의를 갖추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 되신다는 말에 반기를 들고 희롱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가 있고 로마 황제가 임명한 헤롯왕이 있는데 예수님이 왕이라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희롱하고 있습니다.
앞서 유대인들에게 재판을 받으실 때도 유대인들에게 희롱을 당했습니다.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치면서 선지자 노릇 해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의 불만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말에 불만을 품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지도자로 잘하고 있는데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서 자신을 아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성경에 예언한 메시야가 되신다고 하자 알아보지도 않고 반기를 들고나왔습니다.
이런 악한 본성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내가 최고이기를 바라고 내 권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뭐든지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우리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는 아주 최소한의 규칙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 규칙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피조물 중에 최고의 지위와 최고로 좋은 육신과 유일한 영혼과 영원한 생명과 최고로 잘 갖춰진 에덴동산을 주셨는데 거기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엄청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거부하고 우리를 너무나 잘 다스리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심지어 우리를 구원해주시려는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만왕의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믿고 이 자리에 와 있습니다. 가끔은 우리도 저 로마 군인들처럼 하나님을 예수님을 희롱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살면서 속으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삶을 잘 살펴보면 나도 모르게 그런 죄를 지으면서 살수도 있습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성경의 결론 부분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모세를 통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고 말씀을 하고 교육을 하고 경고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멸시하고 말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말라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 1:6)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여러 제사 제도들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제단에다가 더러운 떡을 드리고 제사 드리는 척했다고 했습니다. 죄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제사 제도를 만들어주셨는데 죄를 지은 손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오히려 잘난 척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도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예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말라기 2장과 3장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멸시하는 이스라엘의 악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결론인 말라기서에 이렇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은혜를 베풀고 아무리 많은 것으로 교육을 하고 아무리 많은 사건을 통하여 훈련을 시켜도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희롱한 군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을 희롱하는 사람은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자색 옷을 입히고 면류관을 씌우고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왕을 섬기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와 함께 예수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는 예수님을 희롱하는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살펴봐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노골적으로야 예수님을 희롱하겠습니까? 그런데 은근히 예수님보다 자신을 높이고 자랑하는 일들은 수시로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들은 늘 있는 일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무시하고 인간의 행위를 자랑하는 일은 그렇게 힘들게 지고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본문 20절에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악한 행위로 예수님을 희롱하고 난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하여 끌고 나갔습니다. 가증스러운 행위로 예수님을 희롱하고 침 뱉고 때리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일개 인간에게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그들을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그렇게 비참하게 희롱하고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악한 일을 웃으면서 즐기면서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왜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용서해주고 마시든지 아니면 싹 쓸어버리고 아주 착한 사람으로 다시 창조하시든지 하시면 될 것 같은 데 왜 이렇게까지 흉악한 죄인들을 그렇게 힘들게 구원하셨을까요?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이 악해도 자신이 낳은 자식을 사랑하듯이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너무 크고 놀라워서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설교 말씀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인간이 다 악하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도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것이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말로 교육하고 아무리 어려움 일을 통하여 훈련시켜도 고쳐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밖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흉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악 된 본성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훈련으로 교육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혹시 15분 늦게 극장에 들어간 사람처럼 인생이 무엇인지 왜 살게 되었는지 모르고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은 아닙니까? 혹시 15분 늦게 극장에 들어간 사람처럼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지 잘 모르고 교회에 다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너무나 흉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같이 악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을 통한 구원밖에 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혹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희롱하는 사람은 아닌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 영생의 복음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