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2. 8. 광성교회 주일 낮 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87)
본문 : 막 15:42-47
제목 :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제가 잘 아는 장로님이 한 분 계시는데 이분은 제가 인간적으로 참 부러워하는 분입니다. 저와 반대의 길을 사시면서 제법 성공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엔지니어로 좋은 회사에서 일하시면서 돈도 많이 모아서 아파트도 사고 건물도 사고 아이들도 잘 키워서 집도 사주고 장가도 잘 보내고 화목하게 살고 무엇보다 돈 많은 장로로 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은 아니지만, 머리는 참 좋고 계산도 잘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머리 때문에 말년에 한가지 실수를 하셨습니다. 이분이 실비보험을 하나 드셨는데 10년 동안 보험료 납부하신 돈이 천이백만 원 정도로 내셨고 10년 동안 치료비로 받은 혜택은 그 절반 정도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명석한 두뇌를 돌려서 보험을 해약하고 그 돈으로 적금을 들기로 했습니다. 좀 아프면 그 적금에서 치료비 내면 되고 안 아프면 그냥 다 남는 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됩니까? 사실 실비보험은 나이 들어서 아플 때가 많을 때를 대비해서 드는 것인데 나이가 들어서 해약을 했는데 아주 큰 사고가 나고 병원비가 아주 많이 드는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돈도 있으신 분이고 자식들도 잘살고 해서 병원비 걱정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좀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도 보험을 별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보험을 들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고 미래를 대비할만한 사치스러운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형편이 되면 질병이나 사고를 대비한 보험 하나쯤은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다가 보면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에 걸리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험료를 내는 것도 알고 보면 상부상조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고가 없어서 혜택을 보지 못하면 사고를 당한 다른 사람이 그 혜택을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낸 보험료가 그냥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당한 다른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보험에 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보험은 있을지도 모르는 불행한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지만 신앙은 반드시 꼭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고나 질병은 운이 좋으면 없을 수도 있지만 죽음이나 죽음 이후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보험료가 내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이는 것처럼 교회에서 우리의 봉사나 헌금이 우리 서로를 위해서 쓰이는 것은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나 재능이나 재물이 여유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교회의 공동체를 위해서 내어놓을 때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함께 미래를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머리가 좋아서 계산을 잘해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바치는 시간이나 헌금이나 헌신이 아깝다는 생각으로 보험을 해약하듯이 신앙생활을 그만두고 싶은 분이 있을까 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살았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한 예를 길게 서론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의 짧은 이야기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면서 사는 우리에게 큰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진 권력이나 재물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쓰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썼고,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그가 기다리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우리에게 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
본문 42절 43절에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은 예수님의 죽으심이고 장사 되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고 확실히 운명하셨으며 무덤에 장사까지 되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무덤에 장사하는 일에 중심이 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이야기가 간단하게 기록되었지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가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아리마대 출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존경받는 공회원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이 사람을 부자라고 했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고 공회원이지만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고 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설교할 때 주로 예수님의 복음을 중심으로 설교하고 사람의 공로나 행위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사람은 죄인일 뿐임을 강조하는 사람입니다. 구원도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사람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지만 믿음을 가지고 구원받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고 비교적 착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서 믿음을 가지게 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것처럼 택한 백성은 들을 귀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옥토와 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복음을 듣고 그 마음에 싹이 나서 좋은 삶의 열매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끔은 아주 악한 사람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이렇게 착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태어날 때부터 아주 특별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특별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고 거기에 걸맞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1)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우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나라는 이방 나라인 로마에 빼앗겨서 짐승만도 못하게 생각했던 이방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이스라엘이 옛날처럼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나라로 회복되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요셉은 마태의 지적대로 예수님의 제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막연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먼저 외치신 것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떤 모양이든지 그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에서도 신앙 생활하는 사람의 제일 큰 특징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데 그것도 결국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 그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보다 이 세상의 행복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그 믿음은 뭔가 좀 잘못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특징입니다.
2) 선하고 의로운 존경받는 공회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존경받는 공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공회는 유대인 사회의 종교 문제를 의논하거나 재판을 담당하는 최고의 기관이었습니다. 70명의 장로와 대제사장으로 구성된 오늘날의 국회와 대법원의 기능을 담당하는 최고의 기관이었습니다.
아무나 그런 최고의 기관인 공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유능한 사람이라야 그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머리도 좋고 권력도 있고 돈도 많은 부자였습니다. 충분히 잘 살 수 있는 위치였고 더 악하게 살고 더 거만하게 살 수도 있는 위치였습니다. 그런데도 선하게 살고 의롭게 살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통 머리가 좋은 사람이나 부자이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들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런 것들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 옆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봐도 얻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머리가 좋고 권력도 있고 부자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도와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선하다고 칭찬했고 존경받는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칭찬을 듣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 듣고 싶으세요? 많이 나누어주면 됩니다. 자기 이익만 챙기면 나쁜 사람이고 나누어주면 좋은 사람입니다.
3) 그들의(공회원)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을 정죄하기에 바빴고 결국은 죄인으로 정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은 그런 사람들에게 휘말리지 않고 예수님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면서 그들의 뜻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4) 당돌하게 행동하는 사람
마음만 그렇게 착하게 먹은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행동에 옮겼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와서 장사지내기 위해서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나갔다고 했습니다.
당시의 형편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총독 빌라도에게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흉악한 죄인으로 몰려서 사형을 당한 사람의 시신을 달라고 하면 한편이라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보통 마음으로는 행동에 옮길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는데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한다는 것은 아주 큰 결심을 해야만 되는 일이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당돌하게 빌라도 총독에게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이런 용감함이 필요합니다. 인간적으로 눈앞의 이익만 보면 손해 보는 일 같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담대하게 용감하게 해야 합니다.
빌라도와 백부장의 시신확인
본문 44~45절에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해서 오늘날까지 욕을 먹고 있는 사람이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선언했고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민란이 일어날까 봐 사형선고를 했지만 마음에는 안타까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신을 달라고 요구할 때 순순히 내어주려고 했습니다.
시신을 내어주면서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라고 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벌써 죽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서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쉽게 죽을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많은 능력을 행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까지 하신 분이 그냥 맥없이 죽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인계하기 전에 백부장에게 정말로 죽었는지를 확인하고 난 후에 시신을 내어주었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장면을 처음부터 다 목격한 사람이었고 그 죽으심을 본 후에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확실히 죽으셨음을 보고하였고 그의 말을 듣고 총독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주었습니다.
이 기사는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확실히 죽으셨음을 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심하려고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진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확실하게 죽으셨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절하셨거나 잠깐 죽은척하다가 일어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로마 총독이 사형을 집행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확실하게 죽으셨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 모두가 이런 죽임을 당한 후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여 영생 복락을 누리가 위해서는 반드시 이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복이 있는 사람들은 생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바로 부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의 모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제일 걱정되는 것이 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을까, 죽을 때 그 아픔은 어떻게 견딜까, 죽을 때 그 외로움이나 무서움은 어떻게 극복할까. 이런 걱정을 하고 삽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음을 통과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 성도는 죽음 이후에 더 큰 영광스러운 삶이 있다는 것을 믿고 담대하게 죽음에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위 속에 판 무덤에 장사지냄
본문 46~47절에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받아 나온 요셉은 세마포에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서 문에 놓았다고 했습니다. 바위 속 무덤에 장사지내고 돌로 문을 막았고 마태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가고 부활했다고 거짓말할까 봐서 로마 병정들이 와서 돌을 인봉하고 지켰다고 했습니다.
이런 확실한 무덤의 장사도 결국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갈 수 없도록 확실히 큰 돌로 막고 인봉을 하고 군사들이 지키게 하였으나 예수님을 부활하셨고 시신은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또 하나 교훈을 받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장사지내는 요셉의 태도입니다. 요셉은 대강 장사를 지낸 것이 아니라 아주 정성을 다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쌀 세마포를 아주 값진 것으로 새로 사서 쌌다고 했습니다. 무덤도 아마 자신이 묻힐 것으로 준비한 새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정성껏 모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시신을 쌀 일이나 장사를 지낼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대할 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일, 믿음으로 사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일에 무엇보다 최선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내 생애 최고의 일이요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가 모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신실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좋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습니다. 복음의 씨가 자랄 수 있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도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삶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