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예수 나의 산 소망

 

 

베드로전서 13~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할렐루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예배하는 광성의 모든 성도에게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죽음을 앞두고 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한 후 2년이 채 못되어 로마의 황제 네로에 의해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할 때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가 시작되었든지, 아니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박해를 맞이하는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저 성도들에게 믿음과 소망을 굳게 붙잡으라는 권면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도 죽음의 위기를 맞고 있으면서도 성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소망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서신을 통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3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박해나 순교라는 단어와 찬송이라는 단어는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사실 원문에는 찬송하리로다(Ελογητς)”라는 표현이 가장 먼저 나타납니다. 이를 통해서 성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그 환난을 앞에 두고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산 소망(λπίδα ζσαν)” 때문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소망(living hope)’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소망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살았던 소망도 아닙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살아 있는 소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극심한 환난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그 환난으로 인해 죽음에 이를지라도 우리의 소망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에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행하신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역사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와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하는 사건입니다. 이는 아무리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 있고, 택함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 그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온전한 속죄제를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이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 죄가 가리움을 받게 됩니다. 분명 죄인이지만 죄가 죄로 드러나지 않고, 인정되지 않고, 정죄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죄의 결과인 영원한 사망에 이르지 않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6:23, 5:24).

 

다음으로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이 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역사적 사실로 끝나버리면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건이 오늘을 살아가는 나와 어떤 관계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부활로 끝나버리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오늘 나에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이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에게 엄청난 의미를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원한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이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났습니다(왕상 17:22-사르밧 과부의 아들, 왕하 4:35-수넴 여인의 아들, 7:15, 나인성 과부의 아들, 8:55-야이로의 딸, 11:44-나사로). 하지만 그들은 다시 죽었습니다. 그들의 부활은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부활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명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들이 가진 소망은 영원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 영원토록 산 소망이 되는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십니다.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죽음이나 무덤의 권세가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완전히 이기심 주님, 장차 그 사망까지도 영원한 볼못에 던지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위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우리는 오직 주님만이 나의 영원한 소망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나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믿는 것 가운데 가장 심오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듭남(ναγεννάω)”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 말의 사전적인 의는 다시 난다, 다시 나게 한다입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의미를 따른다면 (하늘)로부터 태어난다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경험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그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3:3). 하지만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성경을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자였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더 심오한 말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3:5).

 

즉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그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물과 성령은 하나의 개념입니다. 즉 이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서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신 구속 사역의 결과를 성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입니다. 이 적용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역사가 바로 거듭남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거듭남은 위로부터 난다.”라고 말합니다. 즉 거듭남은 세상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 거듭남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거듭남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거듭남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증명된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심어지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요,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거듭남은 분명 영적인 개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3:6~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순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이전까지는 오직 육에 속한 자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육에 속한 것에는 영원한 소망이 없습니다. 육은 언젠가는 죽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는 영에 속한 자이기에 영원한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오직 주님만이 나의 영원한 소망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업을 잇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품는 영원한 소망은 무엇일까요? 즉 소망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을 본문에서는 유업(遺業;κληρονομία)”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상속받은 재산, 공적으로 인정된 재산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된 땅, 가나안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 유업의 개념을 땅의 것이 아닌 하늘에 속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결국 이 유업은 지금은 비록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후사(後嗣)이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장래에 누릴 기업 자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업은 종말론적 선물입니다. 즉 현세에서는 누릴 수가 없습니다. 장차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는 개인적인 종말이든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시작되는 우주적인 종말이든지, 그 때에 완성되는 기업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 유업에 대해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장차 우리게 받아 누리게 되는 유업의 영원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썩지 않는다는 것은 죽음이나 부패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또한 더럽지 않다는 것은 종교적인 부정(不淨)이나 도덕적인 부정에서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쇠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의 영향을 받아 점차 노쇠해지는 것(예를 든다면 꽃이 시드는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땅의 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변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아무리 지금은 완전한 것 같고, 영원할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이 땅의 것은 반드시 그 시작이 있는 것처럼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장차 우리가 받아 누릴 유업은 영원합니다. 이는 영원하신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업에는 불확실성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된 자들에게 이 유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장차 우리가 누릴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불변하시는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역사에서 불확실성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유업을 이미 준비하셨습니다, 그것도 바로 우리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께서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3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이 유업은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성취되어 저들은 가나안을 차지했고, 거기에 정착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이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때로는 우상숭배를 비롯한 죄악으로 인해 더러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도 했고, 때로는 그 유업을 빼앗기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도를 위해 하늘에 예비된 이 유업은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합니다.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합니다. 동록이 해하지도 못합니다. 죄로 인해 오염이 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우리에게 약속된 그 유업을 잃어버리거나 누리지 못할 염려를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분명한 유업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유업을 우리에게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로 연결이 됩니다.

 

우리는 비록 이 땅에서 아직은 그 유업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약간의 맛만 보며 살아갈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유업을 이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업 안에서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취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실을 믿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오직 주님만이 나의 영원한 소망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고, 우리를 그 부활과 영생에 동참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유업을 얻고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를 우리 광성의 모든 성도는 이 영원한 소망을 굳게 붙들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날에 하나님이 주시는 유업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우리의 영원한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