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브리서 3장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는 과거로 돌아가려는 유혹 앞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기록된 서신입니다. 죽 저들은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과거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나름대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사회에서도 아무런 문제나 저항이 없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원만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주변의 이웃과 사회에 큰 도전을 주었고, 걷잡을 수 없는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 처음에는 사회에 신선한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 예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이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자신들과 다른, 아니 자신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시기와 질투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세상은 자신들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자신들과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사회에서 격리하고, 심지어는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점점 더 거세졌습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위기가 찾아왔고, 갈등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왜 예수를 믿는데 이러한 어려움이 찾아올까? 왜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저 죄악에 빠진 자들에게 박해를 받아야 하는가? 이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왜 이러한 상황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나를 제약하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내 양심을 따라서 살면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우리는 많은 제약을 받게 됩니다. 이전에는 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은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입지 못하면 아무런 소망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내 마음대로 했는데, 이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지금까지는 내 욕심대로 살고 내 의지대로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는 전혀 다른 삶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를 이상하게 바라봅니다.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오늘의 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자신들과 다른 우리, 자신들보다 더 수준이 높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배척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때때로 혼란을 겪습니다. 아니 과거로 돌아가고 싶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으로 돌아가서 내 마음대로 살고 싶기도 합니다. 그냥 세상에 묻혀서,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세상과 어울려 살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과 유혹, 그리고 방황하는 자들을 경고하고 권면하기 위해서 기록된 서신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그리고 비교할 수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 위대하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토록 위대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장과 2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우월하심을 보았습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조금 더 실제적인 비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난 인물, 그리고 저들의 삶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희생 제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증명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제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교 대상의 수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우월하심이 더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본문으로부터 시작해서 10장 18절에 이르는 내용의 대전제가 되는 표현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신분과 사역에 있어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신 분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온갖 유혹과 혼란과 위기를 직면하고 있는 자들에게 “대제사장인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를 원문을 따라 번역한다면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에게 관심을 가지라, 예수를 보고 깨달으라.’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매일 매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저 세상으로부터 밀려오는 유혹과 도전 앞에서 승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우리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본문 1절에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서신을 받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대목입니다. 즉 이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당시의 사회에서는 아주 생소한 표현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의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헬라어에서는 이 부르심의 개념이 공인된 전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호출의 개념으로 ‘부름이나 초대’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소명(召命)”이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 “부르심”이라는 표현이 11번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9번을 사도 바울이 사용했고, 이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나타낼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하늘의 부르심”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따라 이루어지는 소명과 관련된 것입니다. 특히 에베소서 1장 4~5절에서 사도 바울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가 구별된 자들이요, 매우 특별한 존재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고 예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그 선택과 예정된 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 곧 소명에는 전도자의 복음 전도를 통해서 부르시는 외적 소명과 함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내적 소명도 포함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위대한 사실이 있는데, 바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대해서 결코 거부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라고 합니다.
또한 성도는 “함께”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는 성도는 ‘함께 나누는 자요, 동참하는 자요, 동역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성도는 모두가 다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파트너입니다. 결코 성도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라고 하는 자신의 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적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저 세상의 도전 앞에서 흔들리기 쉬운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이때 성도들이 하나가 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준다면 이 시험을 이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도 동일한 시험 앞에 직면하고 있음을 알고, 저들도 동일한 싸움을 싸우고 있음을 안다면 자신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한 분 성령을 따라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삼위 하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나 같은 자 하나를 위해서 삼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분명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너와 나의 모양이 다르고, 삶의 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이 위대한 사실이 성도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성도답게 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성도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언제나 함께해야 합니다. 기쁨과 슬픔을 함께해야 하고, 형통함과 어려움을 함께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함께 지체가 된 형제들을 돌아보아야 하고, 저들과 서로 힘을 합해서 다가오는 시험에 맞서야 합니다. 전도서 4장 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Ⅱ.예수는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전부입니다.
본문 1절에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믿는 도리의”라는 말은 ‘인정하다, 고백하다, 공언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계약이나 동의를 나타낼 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이 표현이 지금 이 서신을 받는 자들이 이미 고백한 신앙을 가리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을 때 공적으로 하는 신앙고백의 내용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의미는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할 것입니다.
결국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성도가 하는 신앙고백의 유일한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신앙고백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즉 저들의 신앙과 저들의 삶의 중심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분문은 이에 대해서 두 가지의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使徒)이십니다.
사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ἀπόστολος)”라고 부른 것은 본문이 유일합니다. 그런데 본래 ἀπόστολος는 ‘사절, 사자, 대표’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공적으로 파송된 자요, 임무와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유대인의 사회에서는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사자를 가리키고,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고, 파송한 제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눅6:13, 행9:27).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도(ἀπόστολος)”라고 부른 것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공생애 기간이 이 사실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42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cf. 요6:5, 11:42, 17:18, 18:9).
특히 ἀπόστολος가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특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ἀπόστολος는 자신을 파견한 자의 권위를 대표합니다. 즉 그는 자신의 권위로 일하지 않습니다. 그를 보낸 자의 권위로 일합니다. 따라서 왕이 보낸 ἀπόστολος라면 그는 왕을 대신하는 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ἀπόστολος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권위로 일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람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ἀπόστολος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신 ἀπόστολος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성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로 ἀπόστολος가 전하는 말은 그를 파견한 자의 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ἀπόστολος는 자기의 생각이나 뜻을 전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의 말 한마디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철저하게 그를 보낸 자의 말이요 의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들이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자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ἀπόστολος로서 행하신 모든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 모두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지 않는 것은 성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ἀπόστολος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해서 오직 순종으로 고백하는 것 외에 우리의 선택지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大祭司長)이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대제사장은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중재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대제사장은 아론입니다. 하지만 아론 이전에도 제사장은 존재했습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했고. 그의 후손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제사장의 존재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제사장의 제도와 대제사장이 등장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고, 아론을 지명하여 세우셨습니다. 이후 아론의 자손에서 대제사장이 세습되도록 제도를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대제사장의 역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즉 죄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결코 용납하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을 대신하여 짐승을 잡고 그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론 자손에서 세워지는 대제사장은 불완전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 자신이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도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로 죄인을 대신했는데, 이도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반드시 그 죄인의 죽음으로만 사함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짐승의 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요,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짐승의 피로 일시적인 용서가 아닌 영원한 용서를 이루어내실 메시야를 소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 메시야가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죄와는 상관이 없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죄인들을 대신하기 위해서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스스로 하나님의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또한 자기 피를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영원한 제사가 성립되었습니다. 분명 사람인데 죄가 없는 사람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죄의 결과인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속죄 제사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대제사장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죄인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완전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서 대변하십니다. 또한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시기에 인간들에게 하나님을 대변하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인 우리와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고백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앙고백의 대상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신앙고백의 대상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마16:16).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요1:49). 마르다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요11:27). 이들의 고백은 표현은 다르지만, 그 내용은 같습니다. 이들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시며, 또한 죄인을 구원하시는 대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고백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신앙고백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신앙고백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내용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고백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만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하고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 목수의 아들 예수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요 고백의 대상이 되시는 사도요 대제사장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며, 우리의 영원한 소망의 근거가 되십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이 참 사도이시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고, 그분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그분 앞에 우리의 믿음과 고백을 드림으로 세상의 그 어떤 유혹이나 도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