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립보서 2장 1-4절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성도 여러분!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행동을 교정하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개인이나 단체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탁월한 윤리적 모범을 먼저 제시해 주고, 그 다음에 그를 따르도록 권면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 수사학적인 방법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배웠고, 그를 추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당시의 학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바울도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빌립보서에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을 닮아야 하는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라고 하면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또한 3장 4절 이하에서는 바울 자신의 삶을 소개하면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라고 권면합니다(빌3:17).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일어난 하나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 안에는 어느 정도의 ‘분쟁과 다툼’의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이는 외부적으로 시작된 정치적, 사회적인 박해와 내부에서 일어나는 유대주의적인 논쟁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이 문제를 시급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복음이 복음답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속히 이를 정리하고 교회가 바르게 서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가 권면하는 첫 번째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1:27). 그리고 이를 위해서 복음의 신앙을 위해서 협력해야 하고, 대적자들을 인해서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보 교회가 믿음을 지키고 고난 중에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빌립보 교회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바울과 함께 끝까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제시합니다. 즉 교회 안의 분쟁과 다툼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덕목은 “겸손(謙遜)”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보이신 겸손의 모범을 따른다면 그 어떤 분쟁이나 다툼의 문제도 아름답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가 이 문제를 아름답게 해결하는 것은 빌립보 교회의 큰 기쁨이요, 사도 바울 자신에게도 큰 기쁨이 된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의 안정과 성장, 그리고 성숙은 교회 자체에게 큰 기쁨입니다. 이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또한 이는 교회의 지도자에게 있어서도 큰 기쁨이 되는 일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애쓰고 기도하는 자에게 있어서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져 가는 모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이라면 자신이 속한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고, 믿음을 지키며,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지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자신의 충만한 기쁨의 대상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을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1장 8절에서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라고 말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아름다운 덕목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 덕목들을 온전하게 이루기 위해서 힘써야 할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사도 바울의 기쁨을 충만하게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는 제목으로 함께 상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
본문 1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그러므로(οὖν)”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이제부터 하고자 하는 내용은 앞에서 말한 내용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즉 빌립보 교회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저들이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한 결과입니다. 복음을 지키기 위해 용기를 낸 결과입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믿음을 지키고, 바울이 복음 때문에 겪는 고난에 동참한 결과입니다.
이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아름다운 덕목들을 소개합니다. 사실 본문은 가정법 접속사인 “εἴ(if)”를 사용하여, 마치 “만약 빌립보 교회 안에 이러한 것들이 있다면”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 어떠한 가정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 풍성하게 있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표현은 없는 사실을 가정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이제부터 제시되는 네 가지의 덕목으로 인해 빌립보 교회는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의 권면(παράκλησις ἐν Χριστῷ)”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권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권면(勸勉)”은 ‘위안, 위로’ 또는 ‘권유, 격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표현을 사용할 때, 반드시 성령의 능력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따른 권면입니다. 그렇다면 이 권면은 사람의 권면이 아닌 성령의 권면입니다. 다만 이 권면은 사람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이 빌립보 교회에 이 권면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먼저는 바울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출발부터 지금까지 저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으로 양육했습니다. 때로는 위로했고, 때로는 격려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여기까지 성장하며 복음을 위해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성도들 서로간의 권면입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함으로 약한 자들을 돕고 강한 자들이 더 힘있게 일할 수 있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권면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이나 내용으로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권면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권면이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위로(παραμύθιον ἀγάπης)”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사랑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위로(慰勞)”는 ‘부드러운 격려, 용기를 북돋움, 장려’라는 뜻입니다. 이는 앞에서 등장한 권면이라는 표현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는데, 보다 더 부드러운 의미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의 권면은 강한 권유의 의미가 강하다면, 여기의 위로는 부드러운 위로의 의미가 강하다고 할 것입니다. 특히 권면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통해 말씀으로 격려하고 교훈하는 것을 강조하지만, 위로는 “사랑의”라는 표현을 통해 상대방을 진정으로 위하는 사랑에 기초해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안에 이 사랑의 위로가 넘쳤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입니다(1:8, 24, 2:17, 4:1). 따라서 바울의 그 사랑에 근거한 위로를 충분히 받았고, 또한 받고 있는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위해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교제(κοινωνία πνεύματος)”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세 번째 이유는 성령의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교제(交際)”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교제는 천국 시민들로 구성된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친밀한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교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유기적인 모임인 교회의 생명이라고 할 것입니다. 진정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이 교제는 신약의 교회가 탄생할 때부터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바울과 빌립보 교회 사이의 교제를 가리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회는 비록 물리적, 공간적으로는 멀리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는 하나였습니다. 아주 가까웠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사랑을 받고 있고, 바울의 복음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바울과 하나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된 교회가 분열하거나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아닙니까?
넷째는 “긍휼과 자비(σπλάγχνα καὶ οἰκτιρμοί)”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네 번째 이유는 긍휼과 자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긍휼(矜恤)”은 문자적으로 ‘장기(臟器)’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비유적으로 사용해서 ‘애정, 온유함, 동정, 친절’ 등 사람의 마음에 있는 감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자비(慈悲)”는 ‘연민, 동정심’ 같은 감정들을 묘사하는데, 약한 자들에 대한 ‘동정’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이 두 표현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데, 특히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보이시는 따뜻한 애정과 동정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결국 빌립보 교회는 하나님의 이 긍휼과 자비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애정과 동정도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들 상호간에도 이 긍휼과 자비는 실천되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긍휼과 자비가 풍성한 교회에서 분열과 다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시고 그 열매를 통해서 세우신 거룩한 기관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입니다. 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고백합니다. 한분 성령을 보혜사로 고백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유일한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또한 한분 하나님으로 인해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그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분열될 수 없습니다, 다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권면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위로가 넘쳐야 합니다. 성령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풍성해야 합니다, 이럴 때, 교회는 교회다워집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교회가 복음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 광성 교회 안에 이러한 덕목들이 풍성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Ⅱ.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본문 4절에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표현이 우리 성경에서는 4절의 끝에서 번역되었지만, 원문에서는 2절의 맨 처음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2-4절의 내용 중에서 이 표현이 가장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 교회가 본문 1절의 덕목이 자신들 안에 있음을 알고, 이를 바탕으로 2-4절의 내용을 이룬다면, 그것이 바울의 기쁨을 충만하게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바울은 이미 빌립보 교회로 인해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에게 부족한 것 한 가지, 즉 저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된다면 바울의 기쁨은 더욱 더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뜨거운 가슴으로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한 마음, 한 뜻을 품어야 합니다.
본문 2절에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했습니다.
이는 교회 안의 성도들이 내적으로 화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표현은 ‘같은 생각을 하라’라는 뜻입니다. 이는 단지 지성적인 요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의지적인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의 모든 성도는 지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까지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같은 사랑을 가지라”라고 말합니다. 이는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사랑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교회 안에서 실천할 때, 교회는 그 어떤 다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분쟁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이 사랑 안에서만 교회는 교회다워질 수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할 때, 드디어 뜻이 하나가 되고 마음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의 구성원들은 많은 다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성이 다르고, 배경이 다릅니다. 하지만 그 많은 다름을 하나고 묶을 수 있는 것은 같은 마음과 같은 사랑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치 여러 악기가 모여서 아름다운 오케스트라가 되듯이, 많은 사람이 모여 아름다운 합창의 하모니를 이루듯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어찌 보면 비슷한 표현을 반복하면서 빌립보 교회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여야 합니다.
본문 3절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도들의 외적인 태도와 화합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타인을 존중하고 높여 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심 또는 교만은 화합을 방해하는 악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공동체 안에 당파심을 만들고 불필요한 경쟁심을 유발해서 화합을 깨뜨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다툼(ἐριθεία)”은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욕구, 즉 이기주의를 가리킵니다. 이는 앞에서 등장한 “성령의 교제”와 대조되는 표현입니다. 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타인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함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진정한 교제(κοινωνία)를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허영(κενοδοξία)”은 헛된 생각, 잘못된 생각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자만심에 빠지고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올바른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공동체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입니다.
오히려 성도는 겸손의 미덕을 갖추어야 합니다. 본문의 “겸손한 마음”은 ‘자신의 무가치성에 대한 깊은 인식’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신이 기록될 당시의 개념으로는 이 표현이 아주 부정적이고 천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즉 ‘지위가 낮은 것, 생활이 빈약한 것’이라는 뜻으로 ‘추구할 가치가 없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사회에서 이 단어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피의 대상이었지 추구할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는 미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왕상 18:23). 하나님은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는 자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시112:4-6). 결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비천과 겸손은 자기를 현실적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태도이며,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세인 것입니다(빌2:7).
또한 “남을 낫게 여기고”라는 표현은 저 사람이 나보다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사에 신중하게 검토하고 판단해서 상대방의 뛰어난 점을 발견했을 때, 이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라는 말입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저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했을 때, 시기하고 질투하기보다는 그것을 인정해 줌으로 그 사람이 그 장점을 통해서 교회와 복음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습입니다. 또한 이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할 때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바르게 아는 자만이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의 자세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서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자기 일”은 ‘자기가 맡은 일’입니다. 또한 “돌본다”라는 것은 ‘주의 깊게 살핀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집중해서 잘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앞에서 말한 겸손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실 성령의 교제(κοινωνία)를 경험한 사람은 형제를 등한시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위해서 친히 세상에 오셨음을 믿는 사람이 어찌 형제의 일에 무관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심과 같이 우리도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서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교회가 하나가 되는 참된 연합을 위해서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여기고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통해서 더 큰 기쁨을 얻기를 소망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지금까지도 바울에게 기쁨을 주는 교회였지만, 더 아름다운 교회,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기쁨이 되는 빌립보 교회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교회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겸손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세상이 볼 때는 비굴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근거로 타인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또한 내가 맡은 일에 충성하고, 타인의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협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교회는 자연스럽게 교회다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 교회는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의 기쁨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나를 위해 사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고전10:31).
이를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아름다운 덕목들을 굳게 세워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의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가 우리 안에서 풍성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야 합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겸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타인을 위해 일하는 희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광성교회를 교회답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주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세상에 나타내는 교회로 세워갈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해 드리는 아름답고 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