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기쁨과 감사

 

빌립보서 13-8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나에게 아주 중요하고 큰 의미를 부여한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 만나고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내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못하든 많은 사람을 만나고 지나치며 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나에게 기쁨을 주고, 나에게 감사하게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은 누군가를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연스럽게 감사가 나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까? 반대로 이러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율아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복한 후, 이제는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가슴 속에서부터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식과 내용은 다른 서신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비단 빌립보 교회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의 줄을 놓지 않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 3-4절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생각(μνεία)”입니다. 이 단어는 기억, 회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표현은 오직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서신에서만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편지를 받는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이 생각이라는 표현에 담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이 비록 빌립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자신이 빌립보에서 사역하던 때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 지신을 향한 빌립보 교회의 지극한 사랑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자신의 사역을 회상할 때마다 그는 항상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나의 하나님(τθεμου)”이라고 하는 표현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신앙을 고백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실 바울이 처해있는 현실은 기쁨이나 감사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망이나 불평이 더 어울린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기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많은 교회에 편지하면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라고 권면했었는데, 바울은 말로만 그렇게 권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자신과 함께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강하게 권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기쁨과 감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 또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사랑으로 바울을 후원하고 있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그토록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이 기쁨과 감사의 제목들은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바울의 기쁨과 감사라는 제목으로 함께 상고해 보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κοινωνί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첫날이란 바울이 빌립보에 처음 복음을 전했던 때를 가리키고, 이제는 바울이 로마 옥에 갇혀 있는 지금의 상황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이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연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복음(福音)”입니다.

이 복음이라고 번역된 유앙겔리온(εαγγέλιον)”은 본래 좋은 소식을 전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시작된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총 76회가 사용되었는데, 그 중 60회를 바울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초기에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거기에서 더 나아갔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화해한 일에 대한 소식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안에서도 바울이 사용하는 복음은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바울에게 있어서 이 복음은 그의 선교사역의 핵심이자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복음 사역에 빌립보 교회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 사역에 빌립보 교회가 함께하고 있다는 표현을 참여(κοινωνία)”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래 이 단어는 동료, 동역자를 의미하는 말에서 나왔는데, 함께 나누다, 공유하다, 동참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도 신약에서 19번 등장하는데, 그 중 바울이 13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이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과 성도와의 수직적인 관계와 성도 상호간의 수평적인 관계로 등장합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코이노니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부활하고, 그와 함께 유업을 받고, 그와 함께 다스리는 위치를 가짐으로써 과거 예수 밖에 있을 당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는 인간 본질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즉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에 있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영광에 참여함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장 쉽게 말한다면 예수 밖에 있던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성도 상호간의 관계에서의 코이노니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 간에 이루어지는 교제를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가장 많이, 그리고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교제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성도들이 서로 마음을 함께하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동역하고,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은 성령의 교제, 혹은 믿음의 교제까지도 공유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이 코이노니아는 성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평적인 코이노니아를 가리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외롭고 힘든 투쟁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배척을 당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협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이 그 모든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직접 함께하지는 않을지라도 뒤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협력하는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교회의 보습을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바울을 위해서 빌립보 교회가 연보를 한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빌립보 교회도 그리 풍족한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첫 시간 서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사역을 위해서 정성을 다하여 헌금을 해서 에바브로디도의 편에 보내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정성을 가리켜 복음을 위한 참여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즉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그 복음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전한 것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아주 견고하고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사역을 위해서 끊임없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 아름다운 코이노니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토록 복음 안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빌립보 교회를 인해 기쁨과 감사가 넘쳤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복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복음을 인해서 우리는 구원에 이른 자들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는 우리 서로가 복음 안에서, 복음을 위하여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복음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가지고, 그들만이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은 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구호로 가든지 보내든지 하라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위한 진정한 코이노니아인 것입니다.

이러한 코이노니아가 있는 교회는 기쁨과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코이노니아에 부름받은 성도는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바로 복음을 위한 이 코이노니아가 있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이 기쁨과 감사의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빌립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굳게 믿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나타나고 있는 대목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가장 아름다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 모든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착한 일은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베풀어 주신 구속 사역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는 일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구속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움직이시는 것을 시작으로 합니다. 결코 어느 인간의 요청이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고 저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눈물로 기도했던 사람은 바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구속 사역의 출발자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그 모든 역사를 시작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어느 한 순간이나 한 시대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 완성을 이루는 그 순간까지 결코 중단되거나 중지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구속의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이 완성되는 날까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인류의 역사를 손에 쥐고 당신의 계획안에서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의 그 구속의 역사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는 날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모두 찾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모든 자들이 믿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들어가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약속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날을 그 날’, ‘그리스도의 날’, ‘주의 날’, ‘우리 주 예수의 날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날은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 날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과 같은 이 땅의 많은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착한 일 곧 구속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 있는 자들, 복음을 거절한 자들, 끝내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가운데 포함되어 있으며, 하나님은 반드시 저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고 저 교회와 성도들을 그 날에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도록 하실 것을 분명하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하여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내가 전혀 착하지 않을 때, 내 안에 착함이 전혀 없을 때, 하나님은 내 안에서 당신의 그 착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심으신 역사입니다. 내가 죄의 권세 아래에서, 흑암의 권세에서, 그것이 영원한 사망의 자리임을 알지도 못하는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은 내 안에 빛을 주셨습니다. 내 안에 생명의 씨앗을 심으셨습니다. 나로 하여금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나의 주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저 영원한 하나님 나를 유업으로 받는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 안에서 행하신 착한 일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이 그 착하신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그리고 완전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붙잡으십니다. 나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나를 사용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가장 큰 뜻을 이루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접하여, 예비하신 나라로 인도하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그 착하신 역사 안에 있음을 믿을진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그 모든 뜻을 성취하심을 믿는다면, 우리 안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에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과 빌립보 교회의 후원이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의 목자적 심정이 담겨져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생각이라고 하는 단어는 지적인 생각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애정과 관심을 함께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결코 떠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저들이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저들은 결코 둘이 아닌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내 마음에 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마음(καρδίᾳ)’은 인간의 의식과 인격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사람의 가장 솔직한 본성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자신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사도 바울의 마음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저들이 바울의 매임에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은 바울의 잡힘과 투옥에 대해서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돕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저들은 헌금을 해서 사도 바울을 도왔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의 매임에 함께 동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저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지금 갇히게 된 이유는 가이사 앞에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법정에 서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목숨을 내건 일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이 일에 동참했습니다. 저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유인들이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 사도 바울을 위해서 이 모든 자유와 특권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을 함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은혜(χάρις)”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쓰임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의미는 바울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복음 전도자로서의 사명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동역자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저들이 바울처럼 직접 이방인들의 세계로 가지 않는다 할지라도, 저들이 바울처럼 복음을 변증하는 일이 직접 나서지 않는다 할지라도, 저들이 바울처럼 복음 때문에 옥에 갇히는 일을 겪지 않는다 할지라도, 저들은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이 복음 사역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이 그 복음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큰 기쁨과 감사의 제목이 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음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습니까? 그 복음의 위대함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복음을 위한 사역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서, 물질을 통해서 우리는 그 복음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것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본문 8절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빌립보 교회를 향한 사랑과 저들을 인한 기쁨, 그리고 저들 때문에 우러나오는 감사는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를 증명할 길이 없는지라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마음이 간절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바울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부터 이러한 사랑의 고백을 듣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 또한 행복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을 인해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의 것 때문에 누리는 기쁨은 잠시 잠깐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인한 감사는 껍데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 저 하늘의 것, 그리고 내가 예수 안에서 누릴 그 영원한 은혜를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교회 때문에, 성도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기쁨과 감사가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삶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