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높아지신 그리스도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아지는 것을 싫어하고 높아지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자기 PR을 중요하게 여기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낮아지는 것은 힘이 없기 때문이며,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굴하게 생각하고, 때로는 억울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어찌하든지 높아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정 높아지는 것만이 능사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낮아지라고 권면합니다. 낮아지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요, 더욱 높아지는 비결이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낮아짐의 최고의 모델로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3:11).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친히 행하심으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제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어리석고 미련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지만 낮은 자리에서 자신보다 더 힘이 없는 자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최고의 덕목으로 겸손을 꼽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본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겸손이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본을 받아 겸손의 자리에 있을 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하고 계실까요? 이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이 이루어낸 결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러므로(διό)”라는 표현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앞에서 나타난 일의 결과를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낮아지심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이루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본문은 그토록 낮아지시고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높이시고 영광의 존재가 되도록 하셨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겸손은 높아지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서 십자가에서 죽는데까지 낮아지심은 장차 성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장 높은 자리로 올리실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발적으로 낮아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높아지심은, 낮아지심의 결과이지 목적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단지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교회 안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그것이 자신을 높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겸손은 단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 가운데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한 자가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지극히 높아지신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겸손의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본문 9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를 비우시고 가장 낮은 자기까지 낮아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 복종이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역사가 시작됩니다. 즉 낮아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요, 그분의 높아지심은 성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제부터 시작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그분의 낮아지심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관계에서 정죄를 받으신 그리스도는 이제 그 형벌을 율법에 대한 의로운 관계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지만, 이제는 아주 부요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배척을 당하셨지만, 이제는 하늘에서 영접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철저하게 순종하셨는데, 이제 그분은 자신에게 위임된 능력과 권위를 실제적으로 행사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죽음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셨는데, 이제 그분은 그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승리하신 왕으로 교회와 우주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교훈은 많은 사람에게 거부되었지만, 이제는 참된 선지자로서 그의 몸된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이제는 그 구속의 사역을 근거해서 자기 백성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1.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비우시고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여기에서 “지극히 높여(ὑπερυψόω)”라는 표현은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졌다’라는 뜻입니다. 즉 더 이상 높일 곳이 없는 최상의 자리에 높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가장 낮은 자리까지 자신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높은 곳,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까지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 이전의 영광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요17:5).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께 그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의 주인되심의 지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하늘로 올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보좌를 비우시고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그 영광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막16:19).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가지셨던 영광과 존귀와 위엄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가지셨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회복시키셨고, 통치권을 회복시키셨습니다(마28:18).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으로서 그의 손에 모든 피조물과 교회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엡1:22-23).
2.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름(ὄνομα)”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하게 한 개인의 호칭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한 표시 정도가 아닙니다. 이 이름에는 그 개인의 진정한 본성인 내적 존재의 모습을 밝히는 지표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성격이나 신분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름에는 그 사람의 전부가 담겨있습니다. 그 사람의 출생과 상황, 그 사람의 사상과 업적이 그 이름으로 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사자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고 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의 이름은 분명 “예수(Ἰησοῦς)”라고 하는 이름일 것입니다. 이 이름의 뜻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를 의미합니다(마1:21). 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이 이름의 의미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즉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이 이름으로 전부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높아지심은 이 이름보다 더 높은 의미가 담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울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그 뛰어난 의미를 가진 이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바로 11절에 등장하는 “주(κύριος)”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여기의 주는 ‘그리스도께서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주권을 소유하신 주인’이심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세계 속에서 예수님은 실패한 인간의 전형일 뿐이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한 실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 “주(主)”라고 하는 존칭을 붙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에게 “주(主)”라는 이름이 부여된 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이름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 그 “주(主)”의 이름을 주시고, 그 자리에 앉히시고, 그 이름을 빛나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이름보다 더 아름답고 위대한 이름은 없습니다. 하늘의 영광 보좌를 비우시고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지극히 높이시고, 가장 뛰어난 이름 곧 “주(主)”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시고, 만유를 통치하는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뜻을 위해서 스스로 낮아지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그 “주(主)”라는 이름을 부여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성도”라고 하는 위대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피를 믿는 우리에게 “성도”라고 하는 엄청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이 맞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시고, “성도”라는 이름을 주신 목적입니다.
Ⅱ.뛰어난 이름을 주신 목적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뛰어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主)”라는 이름을 주신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심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심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최종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1.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본문 10절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뛰어난 이름을 주신 첫 번째 목적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主)”라고 하는 뛰어난 이름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 앞에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에 있는 존재들이 무릎을 꿇고 경배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무릎을 꿇는다(γόνυ κάμψῃ)”라는 표현은 이사야 45장 23절에 기초한 것인데, 거기에는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에서는 모든 무릎을 꿇어 엎드리는 대상이 하나님 자신으로 되어 있는데, 바울은 이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이 표현이 4번 등장하는데, 본문과 로마서 14장 11절에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서 11장 4절에서는 바알을 숭배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4절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분을 섬긴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을 섬겨야 하는 대상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늘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천사들입니다. 이 천사들은 영원 전부터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섬겼습니다. 그분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도 천사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수종들었습니다. 이제 그분이 영광을 얻으시고 하늘의 보좌를 회복하셨을 때도 저 천사들은 예수님의 곁에서 그분께 복종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찬양하며, 그분의 역사를 수종들고 있습니다.
둘째는 ‘땅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 계획 속에 포함된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 모두는 예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성도들대로 자신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섬기게 될 것입니다. 또한 버려진 자들은 저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후회하며 그분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죄악을 핑계하지 못하고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땅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나 마귀와 같은 존재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에게는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직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만이 남아 있는 자들입니다. 저들도 결국은 예수의 이름 앞에, 그 영광 앞에 무릎을 꿇고야 말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 있는 모든 존재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존재이든지, 아니면 이 땅을 살아가는 육적인 존재이든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입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2. 모든 입으로 그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본문 11절에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뛰어난 이름을 주신 두 번째 목적입니다. 즉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에서 “시인한다(ἐξομολογέω)”라는 것은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 역시 이사야 45장 23절의 말씀 가운데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라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서 14장 11절에서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라는 표현으로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한다고 하는 내용으로 전용(轉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통치를 받고 있는 당시의 사회에서 이 “주(主)”라는 단어는 오직 황제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다른 이에게 적용하는 것은 황제를 부인하는 것이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반역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황제가 아닌 “나사렛 예수가 주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황제에 대한 모욕이며 도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 고백을 하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대중들 앞에 나서서 복음을 선포했던 저 사도들은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행2:36). 예수 그리스도가 “주(主)”가 되신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했고,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3.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본문 11절에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역사는 오직 당신의 영광에 귀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고, 그의 이름을 뛰어나게 하시고, 그로 인해 모든 무릎이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시는 그 역사를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는 것과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한 마리의 어린양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아들이 속죄의 양이 되어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갈보리로 올라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무덤에까지 내려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시고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은 온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취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구속사역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신다면, 그 영광은 아버지 하나님께도 직결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영광을 받으시면 아버지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며(요13:31-32),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아들도 그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이 돌려져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결핍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께 부족한 영광을 채우기 위해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영광이 충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것이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충만한 그 영광을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만이 가장 뛰어난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 앞에 모든 만물이 꿇어 경배하게 됩니다. 하늘의 천사들과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의 대적자인 마귀조차도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시게 되면 모든 우주 가운데서 경배를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들은 지극히 뛰어난 그리스도의 영광이 너무나도 위대하기에 그분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입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 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구원자만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주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창조자요, 통치자이십니다. 나아가 그분은 만물을 심판하실 주이십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미래의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우리가 무릎을 꿇어야 하는 유일한 대상입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찬양해야 하는 유일한 대상입니다. 또한 우리가 숨을 쉬는 이 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主)”이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성도임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한 순종만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매 순간의 삶 가운데서 오직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께만 경배해야 하고, 그분만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하나님은 지극히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그에게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이 가져온 놀라운 결과입니다.
성도가 교회 안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겸손을 보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뛰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동참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영원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진정 믿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겸손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 영광에 동참하는 복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