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선, 오직 예수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어딘가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목표요, 자신이 바라보는 것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무엇을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본문은 “바라보자(ἀφορῶντες)”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다른 것들로부터 눈을 돌려 또 다른 어떤 것을 주목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것을 주목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만족하게 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얼마나 굳게 세워주었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굳게 붙잡아 주었습니까?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주목해 온 시선은 이러한 것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들에 주목하며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세상의 화려한 것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고 있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우리도 같이 원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사실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시선을 빼앗아 가기에 좋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바로 붙잡고 살아가기가 너무 힘듭니다.
하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그러한 시선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선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선이 바라보는 목적이 바뀌어야 한다고 합니다. 더 궁극적인 것, 더 영원한 것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예수 외에 다른 그 무엇도 우리의 시선이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바라보았던 것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삶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들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성도로, 예수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롭고 분명한 무엇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바라보아야 할 것에 주목하고, 그것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권면합니다. 우리의 시선이 오직 예수만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은 11장에서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 11장에서 사도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 1절에서는 그 신앙의 선배들을 “증인(μάρτυς)”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즉 저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가 신앙의 경주를 하는 과정에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증인들은 우리가 가진 믿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에 어떻게 고백 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나아가 우리가 진정 믿음의 사람이라면 우리는 어떤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하는지를 제시해 줍니다.
보통 우리는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도 우리 신앙인을 경주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경주자는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래서 경주자는 언제나 그 결승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경주자의 시선이 결승점에서 벗어나게 되면 노선을 이탈하게 되고, 결국은 엉뚱한 지점에 도달하고 맙니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아무리 빨리 달려도 결승점이 아닌 다른 곳에 도달했다면 그는 결코 상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결승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신앙의 경주자임을 믿는다면 우리의 시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지 않게 됩니다. 엉뚱한 지점에 도달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다면, 아무리 바람이 거세도 흔들리지 않고 목적지까지 전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024년 우리 광성교회의 표어는 바로 『우리의 시선, 오직 예수』라고 정했습니다. 2024년에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 많은 시도가 있을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우리의 시선은 분주하게 움직이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우리의 시선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시선이 여기에 고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시선은 오직 예수에게 맞추어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우리의 시선, 오직 예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2024년을 주님과 함께 시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Ⅰ.예수와 우리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본문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과 관련하여 어떤 관계를 가지신 분인지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본문을 원문의 뜻을 반영해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번역한다면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입니다.
여기에서의 “주(ἀρχηγός)”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주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만물의 주인이시며, 또한 우리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시작을 선도하는 자, 첫 번째의 원인을 이끄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에서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은 시작도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미래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믿음의 씨앗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소망이 천국을 믿고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완성자입니다.
본문에서 “온전하게 하시는 이(τελειωτής)”는 ‘완전하게 하는 자, 완성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앞에서 말한 우리 믿음의 창시자라는 표현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 믿음을 완성 시키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의 전부에 대해서 출발하게 하시는 분이심과 동시에 우리의 전부에 대해서 최종 목적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며, 우리의 구원주가 되시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심판주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의 시작이시며, 우리 구원의 마침이 되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의 시작이 되시며, 또한 그 믿음의 완성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익한 것이 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 것이 되지 않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엉뚱한 것이 되지 않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참된 것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저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요한계시록 22장 13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되십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창시자시며, 또한 완성자이십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이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우리의 그 어떤 것도, 특히 우리의 믿음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믿음(πίστις)”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이 장차 나를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다시 오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구원을 얻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 위대한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위대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시고,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위대한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시선을 맞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Ⅱ.왜 예수입니까?
그렇다면 왜 예수만이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가 되실까요? 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그 무엇도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가 될 수 없을까요? 왜 우리는 예수라고 하는 목표를 향해서 신앙의 경주를 계속해야만 할까요? 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본문에서 사도는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본문에서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서 행하신 가장 위대한 사역인 십자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십자가를 지신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참으셨다(ὑπέμεινεν)”라는 것은 ‘머물다, 기다리다, 인내하다’라는 뜻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극한 고통이 따르는 형벌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형벌은 불명예의 상징입니다. 그건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 머물기를 택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기다리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불명예를 참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그 치욕스러운 십자가를 참으셨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의 “기쁨(χαρά)”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 누릴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쁨은 십자가를 통과한 후 예수님 자신이 누리게 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게 되는 기쁨입니다. 또한 이 기쁨은 당신의 그 십자가를 통해서 죄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을 보시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 7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기쁨은 바로 이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쁨을 바라보셨기에 그 십자가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참으셨습니다. 이러한 기쁨을 함께하고 싶었던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개의치 않으셨다(καταφρονήσας)”라는 것은 ‘멸시하다. 가볍게 여기다, 엄신여기다, 무시해버리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치를 무시해 버리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치를 경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치를 업신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치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엄청난 수치였습니다. 이는 사람으로서는 참아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겪는 부끄러움과 야유, 조롱 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아예 무시해 버리셨습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조롱을 오히려 비웃으셨습니다. 사실 당시에 십자가형은 국가적인 반역을 일으킨 범죄자에게 시행했던 형벌이었기에 불명예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것조차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시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부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었습니다(마26:39).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었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백성의 죄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제물로 드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는 십자가의 수치보다 자기 백성이 구원이 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치 정도는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이고, 무엇이 더 위대한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장차 누릴 영광과 기쁨이 현재의 고통과 수치와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이라고 하는 문제 앞에서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가볍게 여기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방해하는 세력을 경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오늘도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앉으셨다(κεκάθικεν)”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이후, 영원토록 그 자리에 앉아계신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을 모독한 자, 로마 정부를 반역한 자라고 하는 오명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원한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히도록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든 비난과 멸시를 불식시키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하늘로 올리우셨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신 예수님에게 마땅히 주어지는 영광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창세 전부터 가지셨던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기 예수로 성육신하기 전의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시는 만왕의 왕으로서의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을 회복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자기 백성인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연약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대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인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한 대언자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장차 들어가야 하는 아버지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우리가 거기에 도달할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소망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 거기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바로 우리 모든 성도들이 도달해야 하는 신앙의 경주에 있어서 결승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될 것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리는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대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한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결국 오늘의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존재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일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시선의 중심이요, 전부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4년은 오직 예수만을 바라봅시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에게로 고정시킵시다. 우리의 발걸음이 예수님을 향하여 전진합시다. 다른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그 예수님으로만 만족하고, 그 예수님만 사랑합시다. 그 예수님만 자랑하고, 그 예수님만 찬양합시다.
원하기는 오직 예수님께 시선을 맞추고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임마누엘의 은혜가 날마다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