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59)

  본문 : 막 13:9-11

  제목 : 말하는 이는 성령이시니라.

 

  “9.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10.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

 

  성령 충만의 삶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요즘에 들어서 더 많이 느낍니다. 성령 충만의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을 추구하라라는 책을 쓴 A. W. 토저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교회에서 성령님을 뺀다고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의 95%가 계속될 것이요 아무도 차이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신약 교회(초대교회)에서 성령님을 뺀다면 그들이 행했던 일의 95%는 멈췄을 것이요 모두 그 차이를 알았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따라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없었다면 아무 일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르게 알고 믿고 전하는 일은 교회가 하는 핵심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셔도 많은 일을 합니다. 복음을 바르게 알고 믿고 전하는 일이 교회의 핵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셔도 인간의 지식으로 인간의 정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일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차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요즘에 복음, 복음 하면서 복음을 노래하면서 사는데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고 외면합니다. 겉으로는 좋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공감하지 못하는 모습들도 많이 보입니다. 저는 그 차이를 성령님의 역사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따라 사는가, 아직도 인간의 지식만으로 사는가 하는 차이가 복음을 대하는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신학적인 지식이 많다고 해도 복음을 그렇게 감격스럽게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전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만 성경을 보면 복음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성령 충만을 받기 이전에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세상 출세를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고 나서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시고 난 후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복음을 알고 난 후에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고 그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성령 충만을 받기 전의 제자들처럼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살기 위해서 육신적인 유익을 위해서 교회에 다닙니다.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성령 충만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알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면서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들으시고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

 

  본문 9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끝나지 않은 종말의 시대를 사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삶은 그들이 바라는 평안하고 행복한 삶이 아니라 붙잡혀가서 심문을 당하고 벌을 받고 매를 맞는 그런 삶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때 스스로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할 때 내가 뭘 잘못했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잘못된 것인가? 괜히 예수님을 따라 다녔는가? 그만 포기하고 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인데 그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고난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에게도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제자들은 공회에 넘겨지기도 하고 회당에서 매를 맞기도 하고 세상의 권력 앞에서 심문을 받고 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순교의 길을 가는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대부분이 비참하게 순교를 당했고 바울을 위시한 많은 초대교회 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순교의 길로 갔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핍박을 가하는 사람은 유대교회와 로마 당국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집단이 기독교를 박해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이 몰라주고 반대하는 것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가장 크고 권세가 있는 종교집단이고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가 반대하고 박해를 가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붙잡아다가 감옥에도 처넣고 사형도 시킬 권한을 가진 로마 당국이 기독교를 로마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보고 로마 황제가 주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했기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아직도 고리타분하게 천국 이야기나 하는 골동품처럼 생각하고 교회를 부흥시키지도 못하는 목회 실패자들이 그런 소리나 한다고 비웃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가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기를 원합니다. 잘살기 운동 바르게 살기 운동을 해서 사람들이 죄짓지 않고 바르게 살고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고 어려운 사람 도우면서 사는 그런 단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런 일들도 교회가 해야 하겠지만 그런 것이 교회가 중점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아닙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교회를 와해시키기 위한 작전을 세웠는데 교회를 문 닫게 하지 않고 교회는 그대로 두고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못 하게 했습니다. 하나님만 유일하신 신이라고 하지 말고 일본의 왕도 신으로 섬기고 일본 사람들이 믿는 신을 모신 신사에 참배하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세상의 모든 나라는 다 망한다. 그런 말 하지 말고 이 세상에서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행복하게 사는 이야기만 하라고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는 단순히 우상숭배거부만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변질시키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지 못하게 하고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살고 잘살게 하는 교회를 종교화시키려는 정책에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장로교회가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 한지 80주년이 되던 해에 초교파적으로 많은 사람이 광화문에 모여서 신사참배 가결 회개운동 및 천만 기독교인 기도회를 했습니다.

 

  거기에 제가 순교자 후손 대표로 가서 잠깐 인사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인사 끝에 우리가 회개할 것은 신사참배 가결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을 회개해야 한다고 간절하게 호소했습니다. 아무 반응도 없었고 누구 한 사람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 일제가 강요한 이야기들이 해방된 지금까지도 사람들에 의해서 똑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천국이나 지옥 이야기 못 하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착하게 바르게 행복하게 사는 것만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이런 압력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십자가 복음 천국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왜 이런 방법으로 일을 하실까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환대를 받고 교회도 부흥하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다 천국 백성이 될 것인데 왜 이런 고난의 길로 가게 하셨을까요?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도 더 잘되고 행복하게 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히려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더 가난하게 더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삽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것을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는 것이,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믿고 따르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진짜이고 하나님 나라가 진짜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렇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저렇게 순교까지 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이 진짜 사실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저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저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복음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수록 끝까지 믿음을 지켜 복음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감사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시려는 성령님의 역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

 

  본문 10절에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은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마가복음 끝장인 1615절에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은 온 천하에 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오셔서 중점적으로 하시는 일도 이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 사도행전 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예수님의 명령인데 성령님께서 오시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땅끝까지 가서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로 미루어보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사명은 땅끝까지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이런저런 행사 이런저런 사업들을 많이 하지만 그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며 복음을 믿게 하는 일입니다.

 

  특별히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교회는 성령 충만을 받은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교회는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삶을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 교회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며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목적입니다.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일이며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 예수님의 명령과 성령님의 사역에 의해서 2천여 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복음이 백여 년 전에 우리나라에도 들어왔고 계속 서진하여서 다시 이스라엘까지 도달하였습니다.

 

  문제는 그 복음이 2천여 년 동안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본질이 조금씩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변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 진리를 해석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그 시대도 복음이 엉뚱한 사람들에 의해서 자꾸 변질이 됩니다. 가서 복음을 전할 때마다 오직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복음이라고 가르쳤지만 돌아서서 나오면 사람들이 다른 복음 변질된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6-8)라고 했습니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을 중심으로 한 교회는 이런 오직 믿음이라는 복음이 변질 되어서 되지도 않는 행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역사를 살펴보고 인간의 모든 삶을 다 살펴보아도 스스로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데 그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면서 자기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에 들어온 복음도 오직 믿음이라는 복음과 함께 행함이라는 변질된 복음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하도 말로만 믿는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정의 규칙을 정하고 그것을 지킬 때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해주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랫동안 행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복음을 믿는 믿음보다는 그 믿음으로 행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똑바로 사는 것 좋은 일 하면서 사는 것 누가 나무랄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충분히 권장할만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 행함이 믿음을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은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변질되지 않은 그 진짜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니라.

 

  본문 11절에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늘 불안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일은 목숨을 담보하고 죽을 것을 각오하고서야 참석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배드리다가 발각되면 붙잡혀가야 하고 심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느냐?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는 증거가 무엇이냐? 이런저런 심문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럴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로 변명할지 무슨 말로 증인이 될지 성령님께서 다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런 염려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그런 직접적인 박해는 없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누가 뭐라고 하거나 붙잡혀갈 일은 전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유롭게 마음대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믿음에 대한 질문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질문에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복음을 설명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아무리 곤란한 질문에도 확실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우리 성령님이십니다.

 

  우리 성도들의 일반적인 언어생활도 참 중요합니다. 실컷 좋은 일 많이 하고 말 한마디 생각 없이 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을 세상 사람들이 유심히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부정적인 말을 할 때 세상 욕심을 내는 말을 할 때 내 교만함을 드러내는 말을 할 때 거짓말을 할 때 우리가 믿고 전하는 복음도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한 거짓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언어생활에도 성령님께서 역사해주시도록 기도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심코 하는 말 한마디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능력 있는 말이 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목회자들의 언어생활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목사가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고 어떤 말씀으로 설교를 하는가는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 설교하는가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설교하는가 그 차이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기도 하고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독약이 되기도 합니다.

 

  이번에 양용근 목사 순교 기념사업회 사무실을 개소하면서 부설기관으로 복음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순교 기념사업회가 순교자의 업적을 자랑하기보다는 그를 순교의 길까지 가게 했던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더 자세하게 연구하고 정리하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기도하고 또 기도를 요청한 것은 성령님의 충만하신 역사가 기념사업회에 임하시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복음을 연구하고 알리고 세상 끝까지 전파하게 하는 일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모임 또한 인간 자랑이나 자기 이익 챙기는 집단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기념사업회가 복음 연구소가 우리 교회가 성령님의 충만하신 역사를 통해서 정말로 예수님께서 명령하시고 바울을 통해서 온 세상에 전파하신 그 복음을 잘 분별하여서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씀하신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따르는 복음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증거되고 전파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을 당할 때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이 사람들에게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이 변질되지 않고 정말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복음이 되어서 전파되는 일이 소중한 일이며 성령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임을 기억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이 일을 위해서 성령님께서 우리의 언어를 지켜주시고 복음을 전하는 입술을 지켜주시고 마땅히 할 말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언어생활에 특별히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께서 함께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