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
시편 136편 1-3절
여호와께 感謝하라 그는 善하시며 그 仁慈하심이 永遠함이로다 神들 中에 뛰어난 하나님께 感謝하라 그 仁慈하심이 永遠함이로다 主들 中에 뛰어난 主께 感謝하라 그 仁慈하심이 永遠함이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사실은 가장 단순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의 삶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힘이 듭니다. 가장 행복하게 살아야 하고, 행복할 수 있는데 가장 불행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날마다 웃음에 가득한 삶을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수 있는데 사실은 그 웃음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벗어버리고 살아야 하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는데 실제의 삶에서는 그 모든 근심과 걱정을 홀로 짊어지고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용기가 없어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그 하나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산다면 우리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세상이 누리지 못하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임재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산다면 우리는 날마다의 삶에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이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이유들 말고 우리가 실제적인 삶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쉽게 찾을 수 있고, 붙잡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답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존재인지도 자꾸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감사(感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임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도 바로 “감사(感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의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으로 성경을 제시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에 관한 것뿐 아니라 우기의 실제적인 삶에 관한 것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는 우리의 믿음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아가 성경이 요구하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금년도 추수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해의 삶을 살아가면서 어떤 특별한 절기나 날들을 맞이할 때만 이 감사라고 하는 단어를 이야기하는 아주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합니다(살전5:18). 또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라고 말씀합니다(엡5:20).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합니다(골3:15).
성경은 이렇게 우리를 향하여 계속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하는데 실상 우리는 이 감사라고 하는 단어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감사를 잊어버리니까 우리의 삶이 고달프게 느껴지고, 근심과 걱정이 앞서게 되고, 늘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이 되고, 불평과 불만이 우리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면 쉽게 인정을 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실제의 삶에서는 감사가 너무나도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마음으로 원하는 것과 실재의 삶에서 많은 괴리를 가지고 살아가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서 풍성한 지식과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나와의 관계가 어떤지도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면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시편 136편은 누구에 의해서 지어졌고, 어떤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라고 계속적으로 권면하는 예배시입니다. 이 감사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주 귀중하고 근본적인 말씀을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시편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유대인들의 삼대 절기인 유월절, 초실절, 초막절의 예배에 공식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아주 간결하고 깔끔한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찬양을 듣는 자들로 하여금 그 감사의 대열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 구절의 끝에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하는 후렴구가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마도 예배 중에 인도자가 앞부분을 선창하면 회중들은 후렴구를 통해서 화답하는 형식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여기에 등장하는 “인자(חֵסֵד)”는 언약에 기초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이 없는 사랑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어떤 이론적인 것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사랑입니다. 띠라서 이 사랑은 역사 속에서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구현되고 실현이 된 사랑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 사랑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도, 저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것도,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은 것도, 예수 그리스도가 저들을 통해서 세상에 오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저들을 통해서 온 세상에 전파된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비록 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때로는 오해하고, 때로는 거부하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인자(חֵסֵד)”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서 세 가지의 표현을 사용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라고 하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을 통해서 진정 감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감사를 통해서 또한 우리의 하나님을 높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Ⅰ.언약에 신실한 여호와입니다.
먼저 본문 1절에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이 표현에서 “그는 선하시며”라는 것은 앞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본문은 “선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구절의 후렴구를 감안한다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선하다(טוֹב)”라고 하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인격적인 속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어떤 일을 계획하심에 있어서 주권적이십니다. 즉 누구의 조언을 구하지 않으십니다. 누구와 의논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계획하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어떤 일을 진행하심에 있어서 주권적이십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세우신 계획을 따라 일을 진행하심에 있어서 누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또한 그 일을 진행하심에 있어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십니다. 셋째는 하나님은 어떤 일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주권적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진행하십니다. 그리고 최초에 가지셨던 그 목적을 정확하게 성취하십니다. 그 누구도 그 목적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최초에 가졌던 그 뜻을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טוֹב)”입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심과 동시에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모든 역사는 언제나 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시인은 그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יהוה)”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들에게 계시하신 이름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이 이 이름을 계시하셨습니다(출3:14). 이 이름이 가진 문자적인 의미는 “자존자(自存者)”,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이름이 가지고 있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대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에는 이러한 언약에 대해 신실하심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는 것입니다(출19:5-6). 사실 이 언약은 그들과 처음으로 맺은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셨던 언약입니다. 그 언약을 그 후손들을 통하여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시간은 많이 흘렀습니다. 시대적인 상황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원하신 대로, 계획하신 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아니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언약에 대해서 신실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심을 따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더 큰 기쁨을 얻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언약과 그 언약을 성취를 인해서 “좋았더라(טוב)”라고 하는 결과를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언약이 무엇입니까? 대표적으로 헤아린다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백성으로 삼겠다는 언약입니다. 둘째는 그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겠다는 언약입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한 상속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언약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언약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후손들, 믿음 안에서 그 후손들이 된 가고 오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과 관련해서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자주 그 언약을 깨뜨리는 어리석음과 죄악을 저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에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속성상 언약에 대해서 결코 외면할 수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선하신 여호와, 그분은 당신의 언약의 성취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선하신 여호와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여호와는 바로 나와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대해서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심으로 우리에게 그 언약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Ⅱ.만유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에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원문을 따라 번역한다면 ‘모든 신들 중의 신께’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신(אלהים)”이라는 표현은 본래 하나님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이는 이방신들을 가리킬 때로 사용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앞에 등장하는 신은 이방신들을 의미하는 것이요, 뒤에 등장하는 신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이 이방신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성경이 이방의 신들에 대해서 그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것을 “우상(פסל)”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우상은 어떤 형상입니다. 즉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고안해내고 사람이 만든 것을 신처럼 섬기는 것을 가리켜 우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서 가르치는 우상이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는 ‘허무한 것, 쓸데없는 것, 무익한 것’ 등입니다. 즉 우상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복이나 화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에 유익이나 해를 끼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그 우상이 자신들에게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자신이 만들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인데도 말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이방신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신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방신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하나님만이 절대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본문에서 등장하는 “하나님(אלהים)”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여호와(יהוה)”라는 표현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되는 신명(神名)입니다. 그중 여호와가 언약에 관련된 이름이라면, 엘로힘은 만유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의 면모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시편 기자는 본문 4-9절에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큰 기이한 일을 행하셨습니다(4절). 여기에서 “큰(גָּדוֹל)”은 ‘수효가 많다, 규모가 크다, 중요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행하신 그 창조의 일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고 많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이한 일(פָּלָא)”은 ‘인간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그 어떤 존재도 할 수 없는 일을 친히 하셨습니다. 그것도 누구의 도움이 없이 홀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로 하늘을 지으셨습니다(5절). 여기의 “지혜(智慧;תָּבוּן)”는 ‘통찰력, 분별력, 지식 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어떤 일을 수행하는 솜씨나 능력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신 것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결코 흔들리거나 변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와 능력은 그 하늘 아래에 사는 자들로 하여금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지으셨습니다(6절). 여기에서 땅을 물 위에 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삶의 거주지인 땅을 발로 밟아 탄탄하게 다지듯이 매우 견고하게 만드셨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의 사상에서 물은 혼돈의 상징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땅을 물 위에 펴셨다는 것은 아무리 강력한 바다와 같은 세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는 땅을 넘볼 수 없게 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와 달과 빛들을 지으셨습니다(7-9절). 하나님은 해를 지으시고 낮에 비추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달과 별을 지으시고 밤에 비추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과학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는 과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일 뿐입니다. 또한 이러한 빛과 발광체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 운행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을까요? 본문은 그 이유가 바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이 이 모든 창조 역사의 배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늘과 땅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을 지으셨습니다. 빛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창조한 모든 것들이 자기 백성들의 삶을 위하여 정확하게 운행되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창조의 역사를 이루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창조의 역사를 바로 우리를 위해서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창조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의 세계를 오직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친히 주관하시고 운행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인자(חסד)”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그 위대한 창조의 역사를 행하신 그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Ⅲ.우리의 주인(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절에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단어로 등장하는 “주(אָדוֹן)”는 ‘주인, 소유자, 주권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오직 하나님만이 만유의 주인이시며, 유일한 통치자이시며, 참 주권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주인이 되실 수 있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0-24절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 사역에 대해서 고백하며, 찬양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서 애굽을 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에게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내보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 내보내기를 거절했습니다. 그 결과 애굽 땅에는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10가지 재앙이 내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지막 재앙, 곧 장자를 죽이는 재앙 앞에 바로는 무릎을 꿇었고 이스라엘은 430년이라고 하는 긴 애굽에서의 세월을 마감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여 출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애굽이라고 하는 나라가 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가야 할 길을 막는 것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홍해에 애굽의 군대를 빠뜨리셨습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애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저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40년 동안 저들을 양육하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와 반석의 물로 먹이셨습니다. 저들을 그 광야의 뜨거운 햇볕과 밤의 추위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막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내는 동안 늘 저들의 중심에 임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앞을 가로막는 대적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아말렉 족속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물리치셨습니다. 바산 왕 옥을 물리치셨습니다. 저들은 당신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대신 싸우시는 이스라엘을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친히 싸우셨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열매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약 500여 년이 지난 후였지만 그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게 성취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땅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저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를 지나면서 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주인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 만민 가운데서 특별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왕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그 왕의 명령을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왕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저들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해 주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감사하며 찬양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누릴 영원한 행복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종으로 있을 때,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 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셨고, 죄의 결과를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 사망의 종에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영원한 주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약속하신 대로 영원한 천국이 유업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며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역사를 온 세상에 고백하며 전파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26절에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하늘(שָׁמַיִם)”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과 구별되는 곳입니다. 즉 그곳은 하나님이 좌정하시는 곳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우리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마땅히 감사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만이 우리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원하기는 우리의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는 삶으로 충만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