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이 복음을 위해
빌립보서 1장 12-14절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는 많은 일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납니다. 때로는 기쁘고 즐거운 일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일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루어 갑니다. 그 어떤 일도 의미가 없이 지나가는 일은 없습니다. 그 모든 일이 합해서 나의 인생이 이루어집니다. 그 많은 일이 쌓이고 쌓여 나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무엇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을까요?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내 인생이라고 하는 역사는 무엇을 이루려고 진행이 되고 있을까요?
본문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당한 일”을 넓게 본다면 바울이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 가리킵니다. 즉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일입니다. 이 기간 동안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소아시아 지방과 마게도냐 지방과 아가야 지방,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당한 모든 일입니다. 그리고 결국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히게 된 이 모든 일입니다. 하지만 이를 좁은 의미로 본다면, 이는 자신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의 현실만을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
그 범위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이 겪어온 모든 일, 그리고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의 상황이나 내용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즉 자신이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일은 바울 자신의 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일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비록 바울 자신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요, 상황입니다. 아무리 약간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죄수의 몸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고 하는 것은 고통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그러한 형편을 통해서 오히려 복음과 교회를 굳게 세워가고 계십니다.
바울은 로마서 8정 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선(善;ἀγαθός)”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형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얽히고 설킨 고난과 역경이 가져다주는 값진 열매를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이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요,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이 당한 모든 일들, 즉 복음을 위해서 붙잡히고, 감금되고, 그 과정에서 당하는 그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바울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 아니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들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는 통해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비록 표현은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철저하게 복음을 중심으로 하고 복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바울의 투옥으로 인해 근심하고 염려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수 있기를 기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모든 일이 복음을 위해』라는 제목으로 함께 상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고난조차도 복음의 전파를 위해
본문 12절에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이 당한 모든 일은 복음 때문에 당한 일들입니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사탄의 방해 때문에 당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고난이 오히려 자신의 복음 사역에 유익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진전(進展;προκοπή)”은 본래 비난과 박해 속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지금 감옥에 갇히는 박해를 당하고 있지만 이러한 박해가 바울이 감당하는 복음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도를 가속시키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가 비록 몸은 죄수의 신분으로 갇혔지만, 이방 민족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현실을 중요시합니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그 사실에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 위대한 선지자 사도 바울이 잡히고 로마로 압송되는 것을 보면서 복음의 증거되는 속도가 현저하게 위축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당연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사도 바울만큼 활발하게 복음을 증거한 사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참으로 이방인의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대인들의 수많은 반대에 부딪히고 이제는 끝내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 우상의 소굴이요, 중심부인 로마로 압송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는 신으로 추앙을 받고있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가 온 인류의 구세주라고 증거한다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행위와 같은 행동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이 그 현장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바울의 생명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암담한 상황으로 치닫는다고 할지라도 오직 한 사람 사도 바울만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상황을 자신의 사역에 유익한 방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그 고난의 상황을 복음이 더욱 확장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모든 환난, 심지어 박해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곳으로 인도하셨다면 이 일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비록 자신이 옥에 갇혀 있지만, 이곳에서도 분명하게 복음의 확장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자신이 만나는 상황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오히려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더욱더 확장되었던 것입니다. 환난이라는 폭풍이 오히려 사도 바울이 탄 복음의 배가 더 빨리 가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찬송가 373장 2절).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좌절하거나, 불평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모든 상황도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나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조차도 복음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그 무섭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욥1:21). 마땅히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가 당한 고난이 일반적인 것입니까? 그가 당한 고난이 당연한 것입니까?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욥은 그 고난의 현장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을 때, 오히려 밤중에 옥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했었습니다(행16:25).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바울을 통해서 복음이 간수에게 전해지고 그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되는 열매가 맺히도록 하셨습니다.
성도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사명을 맡은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6-17절에서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3장 9절에서는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로 말미암아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교회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고난이 우리에게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절망하거나 좌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고난이 복음의 통로로 사용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그 기회를 선용해야 할 것입니다.
Ⅱ.매임조차도 복음을 위해
본문 13절에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매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이 지금 이 로마에 와서 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바울에게 말씀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잡혀 옥에 있는 사도 바울을 향하여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유라굴로라고 하는 광풍을 맞아 위험에 빠져 있을 때도 하나님은 바울에게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행27:24).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사도 바울로 하여금 로마의 최고 법정인 가이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主)되심을 증거하도록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시위대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로마로 압송된 직후, 시위대에 갇혀 있을 때에 있었던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시위대는 본래 지방에 있는 통치자들의 거주지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죄수들을 지키고 관리하는 군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의 로마가 죄수를 관리하는 프로그램은 아주 특별합니다. 당시의 죄수는 담당하는 군사와 함께 묶여서 지냈습니다. 저들은 윤번제로 돌아가면서 죄수와 함께 거했고, 만약 그 죄수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그 담당 군사가 책임을 져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는 있다고 할지라도 그 곁에는 항상 로마의 군사가 붙어 다녔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매우 불편했고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은 늘 감시를 받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복음을 전하는 아주 귀중한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울은 자신의 매임이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이라는 것이요, 그의 매임을 통해서 주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은 자신과 함께 묶여서 생활하는 군사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매일 바뀌는 군사들에게 복음을 증거함으로 인해 저들에게서도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기거하는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증거했습니다(행28:30-31). 이로 인하여 바울 자신은 옥에 갇혀 있는 신세였지만, 복음은 바울을 통해서 감옥 밖으로 계속해서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 속에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주저앉아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의 마땅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했었습니다(고전4:2). 이제 사도 바울은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이 말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오직 자신을 부르시고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충성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실 바울의 매임은 억울한 것입니다. 그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매인 것이 아닙니다. 힘이 없어서 매인 것도 아닙니다. 그는 다만 예수께서 그리스도와 주가 되심을 증거하다가 매인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매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그 매임에서 빨리 벗어버리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매임을 복음을 위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시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이었기에 그는 훗날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하여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라고 권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딤후4:2).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나의 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나에게 맡기신 복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나 자신을 순종의 도구로 드려야 합니다. 나의 모든 상황이 오직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복음의 통로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Ⅲ.매임조차도 성도의 용기를 위해
본문 14절에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원문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나의 매임 때문에 주 안에 있는 대부분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하고 두려움 없이 말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형제”는 로마에 있는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이방인들 가운데서 개종한 자들과 유대인 가운데서 개종한 자들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사도 바울의 투옥과 그 안에서의 삶을 통해서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로마에 도착했을 때 유대인들은 바울이 유대인들을 송사하기 위하여 온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저들에게 오직 복음 때문에, 오직 예수 때문에 여기에 왔음을 설명했었습니다(행28:17f).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자신을 찾아오는 유대인들을 다 영접하면서 저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담대하게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 가운데서 개종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또한 저가 시위대의 군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저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저들 가운데서 개종자들이 생겨나고 또한 그의 가족들까지 여기에 합세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사도 바울의 모습, 곧 복음 때문에 옥에 갇힌 모습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당하는 환난에 대하여 담대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겁 없이”는 ‘두려움 없이, 부끄러움 없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객관적으로는 두려워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의외로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처음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매우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저들도 담대해지기 시작했고 저들의 입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 인해서 예수를 영접하게 된 자들도 분명 예수로 인한 환난과 박해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환난과 박해가 사도 바울을 제어하지 못했던 것처럼, 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도 제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들은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을 보면서 힘을 얻고 자신들도 그 모든 박해를 이겨내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사도 바울의 충성과 헌신의 사역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보는 바울의 모습은 어렵고 힘이 드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 상황 속에서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 상황을 기회로 삼았습니다. 비록 옥에 갇혔지만, 바울의 변함이 없이 의연한 태도가 오히려 성도들을 격려하고 대담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저들도 복음의 사역에 힘을 썼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성도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비록 자신의 현실이 어렵다고 할지라도 좀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통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믿음이 더욱 성숙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의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다른 성도들에게 더 큰 용기를 줄 수 있는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좋은 믿음이, 아름다운 헌신과 충성이 다른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 함께 헌신하고 충성하는 성도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여러분은 오늘 하루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분명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여야 합니다. 곧 우리의 마음은 오직 교회여야 하고, 복음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조차도 복음을 위해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매임조차도 복음을 위해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매임조차도 다른 성도들의 용기를 위해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바울만의 고백으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고백은 바로 오늘 이 시간 나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전체는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합니다. 나의 삶을 통해서 복음이 세상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우리는 철저한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예수쟁이다운 모습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성도들이 오직 주님께 온전하게 헌신 되어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복음을 위해서 아름답게 쓰임을 받는 통로로서의 삶이 되어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 큰 칭찬을 듣고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