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와 함께해야 할 이유
빌립보서 1장 25-26절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오늘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은 서로의 존재조차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에서는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가깝게는 가족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 또는 동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는 정말 멀리 떨어지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얼굴에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하면 언제나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울과 빌립보 교회의 관계가 바로 이러한 관계라고 할 것입니다. 함께하고 싶고, 나누고 싶고, 기쁨을 주는 싶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이지만,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면 기쁨이 우러나옵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어찌하든지 자유의 몸이 된다면 빌립보로 달려가 성도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저들을 복음으로 양육함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우고 싶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바울을 잊지 못합니다. 바울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을 위해서 사랑을 계속해서 보내고 있습니다. 단지 물질뿐만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인 에바브로디도까지 로마로 보내서 바울을 돌보도록 했습니다.
비록 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습니다.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저들은 분명 함께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이라고 하는 주제 안에서 저들은 분명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미래에 자신이 빌립보 교회와 함께할 것에 대한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앞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아주 초연한 자세를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기를 소망했습니다. 오직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존재가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나라만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와서 사도 바울은 이제 죽음에 대한 것보다는 삶에 대한 확신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확신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왜 자신이 빌립보 교회와 함께해야 하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살아서 육신으로 빌립보 교회와 함께하는 것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바로 그 유익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유익은 바울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입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너희와 함께해야 할 이유』라는 제목으로 함께 상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바울은 확신이 있습니다.
본문 25절에 “내가 살 것과 …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라고 했습니다. 이를 원문에 따라 번역하면 “내가 머물러 있을 것과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두 가지의 확신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석방에 대한 확신입니다.
여기에서 “살 것”이라고 번역된 표현은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자신이 죽어 천국으로 떠나지 않고 이 땅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이 살 것에 대한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이 처한 현재 상황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감옥에 갇혀 있고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면 사도 바울에게 결코 유리한 방향으로 재판이 흘러갈 조짐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서는 여기가 자신의 인생이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자신이 풀려나게 될 것이라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분명 어떤 방법이 될지, 어떠한 절차를 거치게 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계속 연장될 것이라는 확신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러한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것을 다짐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소망은 빨리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서 할 일이 남아 있기에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 않을 것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아직 다하지 못한 사명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사명을 발견하게 되고 그 사명을 완수하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감옥에서, 저 로마 황제의 칼날 아래에서 반드시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빌립보 교회와 함께할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바울은 단지 자신이 석방되는 것에 대한 확신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를 방문하게 되고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만나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함께 거할 것”이라는 표현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친히 거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민5:3). 솔로몬은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할 성전을 건축하고 그 성전을 가리켜 “주께서 영원히 계실(거하실) 처소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왕상8:13). 신약에서 사도 요한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했습니다(요1:14). 또한 장차 주님의 재림과 함께 시작되는 신천신지의 세계의 모습을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계21:3).
결국 “함께 거할 것”이라는 표현은 단지 함께 사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들과 모든 것에 함께하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방문하게 될 것이고, 그들과 복음의 비밀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많은 영적인 유익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땅에 한 사람을 보내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이 세상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 뜻을 완수하게 되면 그는 더 이상 이 땅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기에 하나님은 그를 불러 가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의 삶이 짧든지 길든지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것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향하여 당신만이 가지신 뜻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 뜻을 아주 활발하게 성취해 가고 있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아직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 땅에서 아무 의미가 없이 살아가고 있는 자도 있습니다. 비록 자신은 무엇인가 이루었다고 큰소리칠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끝나는 인생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 앞에 섰을 때 어떤 평가를 받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 와서 얼마나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을 받았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온전하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이 완성되는 날 기쁨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요, 목적입니다.
Ⅱ.바울이 확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이 석방될 것과 자신이 빌립보 교회를 방문하게 될 것에 대한 너무나도 강한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토록 큰 확신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가 죽음이 두려워서,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빨리 생을 마치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남은 사명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이 감옥에서 살아나가게 될 때 나타날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감옥에서 나간다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아주 큰 유익에 주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 다시 말하면 바울의 석방과 만남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얻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믿음의 진보와 기쁨입니다.
본문 25절에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유익은 바로 믿음의 진보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을 통해서 복음의 진수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선교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바울은 빌립보에 최소한 두 번 이상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오랫동안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 복음의 진수를 많이 증거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늘 마음 한 구석에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준 것은 아주 적은데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바울에게 아주 깊고 큰 사랑을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랑을 갚을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이 감옥에서 삶이 끝나면 그 사랑을 갚을 기회가 없을 것으로 알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삶에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먼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수를 전함으로 인해 저들의 믿음이 더욱 진보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익은 말씀 안에서 사는 기쁨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더욱 성숙한 신앙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 성숙한 신앙의 삶이란 바로 복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삶 속에서 열매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반드시 기쁨을 동반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면 분명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성도의 마음에 참된 행복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이 즐거움의 삶을 함께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마음에는 이 즐거움과 행복이 가득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그 기쁨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제 자신 안에 있는 그 기쁨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누릴 기회가 자신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는 항상 성도들의 영적인 진보를 위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감옥에 풀려나고 삶이 연장된다는 사실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진보시키고 저들과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저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있어서 이 두 가지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아니 성도의 전부라고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성도의 근본이요, 성도의 존재 이유입니다.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요, 그 믿음으로 인해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출발합니다. 복음을 알기 전에는 믿음도 없었습니다. 소망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복음이 들려졌고, 성령의 역사로 그 복음이 믿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영원한 소망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 복음은 단번의 역사가 아닙니다. 복음은 날마다 진보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숙해야 합니다. 날마다 더 견고해져야 합니다.
또한 성도는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 삶은 언제나 기쁨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바로 믿음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믿음은 우리의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의 감정도 아닙니다. 믿음은 곧 우리의 삶입니다. 삶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약2:26). 따라서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고백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근거하고, 믿음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풍성한 자랑입니다.
본문 26절에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자랑”은 ‘자랑거리, 자랑의 근거, 칭찬의 근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자랑 그 자체보다는 자랑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자랑할 것은 자신들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즉 바울을 옥에서 나오게 하시고, 또한 그 바울을 통해서 왕성한 복음의 역사를 인해서 자랑할 것이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자랑은 바울의 사역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라고 했습니다. 이는 과거에 분명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 있었고 그 때에도 저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기뻐했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정 때(행16:11-40)와 제3차 전도여정을 출발할 때(고후7:5),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면서(행20:6) 빌립보에 들렸습니다. 하지만 처음을 제외하고는 빌립보에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립보를 들릴 때마다 저들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확장되는 하나님의 복음 때문에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방에게 복음이 증거 되는지를 보면서 저들은 기쁨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 바울이 풀려나게 되면 또 다시 이러한 기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로마까지도 복음으로 정복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복음이 제한받을 곳은 이 땅에 어느 곳도 없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일들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큰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저들에게는 큰 자랑거리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은 이전부터 더 복음에 대한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바울과 함께하신 성령께서는 분명 복음을 자랑하는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붙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은 더욱 힘있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인하여 큰 기쁨과 함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도 바울이 풀려나서 다시금 왕성한 사역을 감당하게 되면 빌립보의 성도들은 더욱 더 풍성한 자랑거리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의 삶은 자신만의 삶이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 성도들에게는 큰 담대함과 기쁨을 얻게 되는 삶입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성도들이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 자신에게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 감옥에서 살아나가는 것이 바로 성도들에게 큰 기쁨을 주게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나를 어떤 모습입니까? 나의 믿음과 기쁨의 삶은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로 인해서, 나 때문에 내 주변의 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까? 내 믿음의 진보를 인해서, 내가 믿음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자랑거리가 되고 있습니까? 내가 교회에 속해 있음으로 인해, 나와 함께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음으로 인해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자신을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사실 성경에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역사적인 증거를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풀려나 다시 빌립보를 방문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토록 소망하고 확신했던 것처럼 그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를 방문하게 되고 영적인 유익을 나누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게도냐 지방과 소아시아 지방을 방문하여 교회들을 돌아보고, 마침내 서바나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롬15:28). 이러한 바울의 사역은 빌립보 교회로 하여금 더욱 든든히 세워지게 되고 복음이 더욱 크게 확장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바울이 가졌던 확신은 그 자신만의 생각이나 소망이 아니라 성령의 영감을 따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가지는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광성교회 안에서 하나가 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좋은 관계로 남아야 합니다.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서로에게 용기를 주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서로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든 광성의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더욱 믿음의 진보가 있고, 기쁨의 삶이 넘치고, 서로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성숙해 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