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든지 죽든지
빌립보서 1장 19-24절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 질문에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의 대답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대답을 하나로 연결하면 “소망(所望)”이라는 단어로 응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소망은 단지 무엇인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는 미래에 있을 분명한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 소망은 미래의 어느 날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말하기를 “오늘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것을 인내하며 사는 것은, 내일에 대한 나의 소망이 크고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오늘 우리는 내일에 있는 우리의 분명한 소망을 향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 안에서, 나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인도자가 되시고 힘의 원천이 되시는 성령 안에서 반드시 성취된 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한 그러한 삶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이 땅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입니까?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중을 받는 것입니까? 만약 이러한 것들로 끝나버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기준과는 무엇인가 다른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추구하는 것이 아닌 더 영원하고 더 높은 것을 향하여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면서도 꼭 이루고 싶은 소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는 이 소망 때문에 지금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소망 때문에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지 거기에 연연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이 소망 때문에 그는 복음을 향한 그 뜨거운 열정을 계속해서 불태울 수가 있습니다.
본문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자신의 생애의 모든 부분을 통해서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사역이 성공적으로 끝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살든지 죽든지 아무런 거리낌도 없고 오직 기쁨만 충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 다시 말하면 옥에 갇히고 죽음의 위험이 자신을 덮고 있는 이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을 가리킵니다.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이것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라는 표현은 욥기 13장 16절에 등장하는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라는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의 힘든 상황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이 고난이 심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이 고난의 상황에서 나를 건져내 주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소망은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반드시 도와주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우리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 모든 상황에서 좌절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 앞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서 반드시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십니다. 비록 그 고난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말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나타나는 바울의 고백처럼 그 어떤 고난의 상황도 그를 꺾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의 상황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드러내는 통로가 될 뿐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러한 믿음에 근거해서 자신의 분명한 소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사를 넘어서 반드시 성취하고픈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바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요, 복음을 위한 것이요,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통해 『내가 살든지 죽든지』라는 제목으로 함께 상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본문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의 심정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간절한 기대(ἀποκαραδοκία)”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목을 빼고 앞을 바라본다’라는 뜻입니다. 이를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사자성어로 나타낸다면 ‘학수고대(鶴首苦待)’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은 학수고대하면서 소망하고 또 소망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재판의 결과를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초월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지금까지 달려온 길에 대하여 조금도 후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기대와 소망은 오직 복음이었고, 성령의 도우심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이를 위해서 달려왔고, 이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재판을 받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일로 인해서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 일이 자랑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자신을 자랑하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렇게 붙드시고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은혜를 자랑하고픈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성령의 그러한 은혜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이토록 삶과 죽음의 문제를 떠나있기에 그는 재판의 결과에 관계없이 복음에 대해서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한 중심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의 구주로 변증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는 재판의 결과로 인해 자신이 감옥에 풀려나 살게 되든지 아니면 사형을 선고받고 죽게 되든지 간에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재판석상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함으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소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존귀하게 된다”라는 것은 ‘위대하게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대하게 드러내는 일을 위해서는 자신의 명예와 지식, 그리고 권력까지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지금 바울은 만약 자신이 석방된다면, 그는 자신의 남은 인생을 계속해서 복음을 위해 사는 사도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사형에 처해진다 할지라도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복음의 사도라고 하는 자신의 사명을 붙들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미래가 어떻게 진행이 되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충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ός)”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전부를 통해서 그리스도만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예수보다는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를 이용하는 삶은 아닙니까? 나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조력자로 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찾아와 우리에게 이것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탄의 속삭임과 유혹에 민감해야 합니다. 단호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진정 그리스도인은 예수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로 인해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만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목숨을 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과 죽음을 초월해서 예수만 나타나기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오직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Ⅱ.그리스도와 함께하기를
본문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고백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는 말씀과 함께 바울 자신의 인생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극단적인 모습과는 달리 그 결과는 동일합니다. 즉 그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도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삶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완전하게 연합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 자체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 중심적인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존귀나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존귀와 영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삶의 모든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겸손한 성품을 마음에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와의 깊은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됩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음으로 하남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서게 됩니다. 이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신앙을 오직 그리스도에게 두며,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의 평생에 그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처럼 사는 것이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었다면 죽는 것도 그리스도로 인해서 그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죽는다면 그는 자신에게 있는 육체적인 고통이나 삶의 무거운 짐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유익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가 죽음으로 인해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주와 함께 ‘본향(本鄕)’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은 바울에게 더 큰 유익으로 다가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되면 그는 더 확실한 지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는 더 온전한 헌신의 자리에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는 더 넘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는 더 기쁨으로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죽음이 저에게 더 유익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라고 과정은 사도 바울을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이끌어 주고 그리스도를 바울에게 더 가까이 이끌어 주는 도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지금 무조건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해서 죽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죽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는 것은 자신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는다고 해도 그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본문 23절에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라고 고백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삶과 죽음의 의미가 동일한 자입니다. 이 땅에서 산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요, 죽는다 해도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에 의한 삶,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삶 앞에서 늘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삶은 늘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삶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바른 자세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Ⅲ.성도에게 유익이 되기를
본문 22-24절에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인간으로 살면서 아무리 비천하고, 괴로워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인들이 쉽게 하는 말 가운데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을 사실로 믿지 않습니다. 그만큼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 누구도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천국을 소망한다고 하지만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말처럼 쉽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본문의 바울도 이 두 사이에 자신이 끼이었다고 말합니다. 즉 바울도 지금 “삶과 죽음” 사이에서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사도 바울에게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의 고백대로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그에게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분명한 확신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욕망보다는 이 땅에서 자신의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사역이 자신이 맺어야 하는 열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땅에 자신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만을 생각하면 빨리 죽기를 원하지만, 사랑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면 저들을 복음 안에서 더욱 성숙하게 양육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는 것을 더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 편에서 생각하면 죽음이 유익한 것이지만,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한다면 바울이 살아있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둘 사이에서 바울이 무엇을 선택하야 할지는 모르겠다고 합니다. 즉 무엇을 더 좋아해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무엇을 선택하든지 결과는 유익이기에 자신은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자신의 형편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는 가장 합당한 방법으로 인도하실 것이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는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곳의 성도들은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입니다. 이제 겨우 우상 숭배와 부도덕한 삶에서 벗어났을 뿐입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고 훌륭한 교회 같았으나 사도 바울의 눈으로 보면 아직도 연약한 교회요, 위험은 안고 있는 교회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저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는 저들과 함께 하면서 저들을 양육하고 싶은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일(삶이든 죽음이든)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 속에서 이루어질 일이라고 믿는 믿음은 확고합니다. 따라서 여기에 관련된 모든 일들을 준비해 왔습니다. 자신이 살게 될 경우를 위해서 선교의 계획도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게 된다 해도 자신의 뒤를 이어서 교회들을 돌보게 될 제자들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남겨두고 자신만 떠나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저 영적으로 궁핍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목자적인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과 죽음의 초월해서 오직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도 저들에게 영적인 도전과 소망을 주기를 원합니다. 살아서는 저들에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의 양육을 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나의 삶을 통해서 다른 성도에게 어떤 유익을 끼치고 있습니까? 나 혼자만 살기에 급급해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심은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믿음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성장하고 성숙해진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가 함께하고, 함께 성장하고, 함께 성숙해져야 합니다.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다른 성도들이 유익을 얻기를 소망하는 사람, 나를 통해서 다른 성도들의 더욱 더 성숙해 지기를 소망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문제를 초월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들이여!
왜 오늘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까? 왜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라” 하심으로 우리의 인생을 마감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예수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우리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한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인생관과 영원한 소망을 바탕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내가 오늘 어떤 삶을 살아도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어디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내 형제, 내 자매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광성교회를 위하여!
광성의 성도를 위하여!
이 구호가 우리 광성교회 성도들의 영원한 소망이요,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