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더 큰가?
다니엘 1장 8-16절
다니엘은 뜻을 定하여 王의 飮食과 그가 마시는 葡萄酒로 自己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自己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宦官長에게 求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宦官長에게 恩惠와 矜恤을 얻게 하신지라 宦官長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내가 내 主 王을 두려워하노라 그가 너희 먹을 것과 너희 마실 것을 指定하셨거늘 너희의 얼굴이 憔悴하여 같은 또래의 少年들만 못한 것을 그가 보게 할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머리가 王 앞에서 危殆롭게 되리라 하니라 宦官長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監督하게 한 者에게 다니엘이 말하되 請하오니 當身의 종들을 열흘 동안 試驗하여 菜食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後에 當身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王의 飮食을 먹는 少年들의 얼굴을 比較하여 보아서 當身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行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試驗하더니 열흘 後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潤澤하여 王의 飮食을 먹는 다른 少年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 그리하여 監督하는 者가 그들에게 指定된 飮食과 마실 葡萄酒를 除하고 菜食을 주니라 |
세계사의 중심은 구속사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한 보조 수단으로 존재합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가 나타나고 그들의 역사를 주관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존재했고, 그 목적을 다했을 때는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속사만큼은 중단되지 않았고,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대의 모든 역사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종결되는 날, 일반 역사도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구속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류의 일반 역사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나뉩니다,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in the year of our Lord)입니다. B.C.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A.D.는 하나님의 그 약속을 따라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역사는 장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한 역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다니엘서는 고대 중근동의 역사를 주도했던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를 살았던 선지자 다니엘이 기록한 책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B.C.722년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마저도 B.C.586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정복을 당했고, 성전은 무너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고, 성전의 기물들도 탈취를 당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완전히 중단될 것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역사가 끝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다윗의 후손도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이방 나라에 의해 단절이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암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비록 희미한 것 같지만, 그리고 아무런 힘도 없는 것 같지만, 계속해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 강한 나라들의 역사보다 더 생명력이 있고, 더 강하게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다.
다니엘서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세상의 힘이 더 강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역사에서 코너로 몰려 위기의 상황을 맞이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그 승리의 열매를 그 백성들이 먹게 하십니다. 즉 역사의 진정한 주인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심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역사의 주관자요, 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주인이십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역사가 어떤 정치인들에 의해서 주장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영향력 있는 사람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엑스트라일 뿐입니다.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방향을 따라가는 역사입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발견하고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잡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릴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시대에 나 한 사람을 붙잡으시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작지만, 비록 연약하지만,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붙드시고 사용하시는 사람은 강한 자요, 위대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누가 더 큰가?』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이 있습니다.
본문 1-2절에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바벨론으로 오게 된 사건은 느부갓네살의 제1차 예루살렘 함락과 관계됩니다. 때는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왕 여호야김의 통치 제3년째인 B.C.605년입니다. 이 때 느부갓네살은 애굽과 갈그미스에서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은 퇴각했고, 다시 중근동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중근동지역의 패권국가로서 바벨론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많은 귀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후로도 느부갓네살은 두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정복했고, 3차에 걸친 함락과 포로로 끌려감으로 말미암아 남왕국 유다는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만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첫 번째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아간 왕족과 귀족들 가운데 다니엘과 세 친구(하나냐, 미사엘, 아사랴)가 있었습니다(6절). 그런데 바벨론은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그 가운데서 사로잡아간 포로들 가운데 왕족이나 귀족들 가운데 인재들을 선발해서 제국의 통치에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정책은 뛰어난 인재를 등용한다는 명분과 함께 정복민들의 반란과 같은 반항을 억제하는 볼모의 역할을 했습니다. 결국 다니엘과 그 세 친구는 바벨론이 정책에서 의해서 선발되었고, 바벨론의 정치권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분명 저들에게는 엄청난 특권이었습니다. 저들은 나라의 멸망, 그리고 포로라고 하는 신분에서 바벨론의 정치가라고 하는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온갖 특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벨론의 정책을 따라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황실의 보호 아래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들은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통해 철저한 바벨론화 교육이 시행되었습니다. 나아가 저들은 학문뿐만 아니라 먹는 것과 사상, 종교에 이르기까지 바벨론화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저들의 이름까지도 바벨론식으로 바꾸었습니다(7절, 다니엘-벨드사살,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
여기에서 다니엘과 그 세 친구에게 엄청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바벨론화 되는 것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서의 믿음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저 바벨론에 동화되어서 바벨론의 정치권에서 누릴 수 있는 특혜들을 누리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믿음을 지키려고 한다면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는 바벨론의 정책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즉 바벨론에 대항하는 반역으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목숨까지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결정은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이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정에 대한 평가는 바벨론이, 바벨론의 왕이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그 결정에 대한 평가는 다니엘이나 그 친구들이 넘어설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과연 다니엘과 그 세 친구는 이 위기의 상황을 넘어설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도 이러한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고 사는 성도라고 하지만 우리의 삶은 대부분 저 세상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 세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사는지, 믿지 않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사는지, 세속적인 삶을 사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저들은 우리도 자신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볼 뿐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반드시 넘어가야만 하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즉 ‘우리의 믿음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상황에 맞추고 적당히 타협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주일을 지키는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음식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우리의 사상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선택할 때, 우리의 삶이 더 힘들고 고달파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적당한 타협을 선택할 때, 우리는 좀 더 편하고 풍요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갈림길에서 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하여야 할까요?
다니엘과 세 친구가 만난 문제는 저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냐? 바벨론이냐? 믿음이냐? 상황이냐?
Ⅱ.믿음으로 이겨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바벨론의 바벨론화 정책에 의해 다니엘의 여호와를 향한 믿음에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 엄청난 위기 앞에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선택한 것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본문 8절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뜻(לִבֹּו)”은 문자적으로 ‘그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사람의 전 존재, 전 삶의 축이 되는 부분으로 감정이나 의지를 주관하며, 그 사람의 행동이나 삶의 태도까지도 결정하는 인격의 가장 깊은 좌소(座所)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이 지금 결정하는 것은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니엘의 이 결절은 그의 전 인격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전 삶을 걸고 하는 결정입니다. 다니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며 여호와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장애가 되는 것은 비록 바벨론의 왕이 주는 진수성찬이라고 할지라도 먹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사실 다니엘이 이렇게 결정하기까지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뜻을 정하여”라고 하는 표현은 그가 이러한 결정을 하기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은 지금 비록 바벨론 황궁에서 지내며 특혜를 누리고 있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바벨론의 포로입니다. 따라서 그는 바벨론의 법과 정책을 따라야만 합니다. 아무리 그가 높은 관직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멸망한 나라 유다 출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는 바벨론 왕궁에서 교육을 받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더욱 바벨론의 법률과 규례를 따라야만 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는 그리 단순한 음식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이는 제국 내에서 최상의 음식입니다. 그런데 왕이 그것을 교육받는 자들, 자신이 멸망시킨 나라에서 포로로 잡아 온 자들에게 내렸다는 것은 저들을 향한 최고의 호의라고 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하는 것은 왕의 명령이었습니다(10절). 그 시대에 왕의 명령은 그 자체가 법이었습니다. 아니 법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은 왕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숨의 위험은 물론이요, 교육이 끝난 후에 자신에게 주어질 높은 지위와 권력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 모든 내용을 모르고 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거절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다니엘은 왜 이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왕의 명령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음식들이 “자신을 더럽힌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니엘이 왕의 음식을 거절하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당시 바벨론 왕궁에서의 음식은 바벨론의 민족신에게 희생제물로 드린 것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다니엘이 이 음식을 먹는다면 그는 간접적으로나마 그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는 율법에서 강하게 금지하는 규정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다니엘의 이 결심과 결정은 율법에서 금한 음식을 먹음으로 인해 자신의 신앙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니엘의 이 결정은 그의 믿음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의 믿음은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의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바벨론 왕의 명령보다 우선했습니다. 그 믿음은 그 어떤 세속적인 것에 의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은 자신이 누리게 될 부귀나 영화보다 더 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의 단호한 결정은 이름까지도 바꾸면서 여호와 신앙의 정체성을 빼앗고 바벨론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기를 바랐던 저 바벨론 측의 의도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만나는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결정합니까? 우리가 살다 보면 참으로 선택하기에 어려운 상황을 만납니다. 때때로 세상은 우리에게 큰 것을 가지고 시험하지 않습니다. 아주 작은 것, 아주 사소한 것을 가지고 우리를 떠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쉽게 결정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유익한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썩은 동아줄을 잡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까? 상황과 믿음 사이에서 어느 편을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했던 저 이스라엘의 모습과 오늘 우리의 모습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저들을 향하여 손가락질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오늘날 다니엘이 만난 문제로 우리가 시험을 받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음식과 관련된 율법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마가복음 7장 18절에서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심으로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를 더럽히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음식의 문제가 신앙 양심을 속박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고전8:4). 따라서 오늘의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으셨음을 믿으며 감사함으로 먹으면 됩니다(딤전 4:4). 우리는 음식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과 연결 지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사도 바울의 권면을 따라 내 신앙 양심의 자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믿음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내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결정해야 합니다. 내 결심과 내 결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야 합니다.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어떤 상황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Ⅲ.하나님의 크심을 나타낼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믿음 안에서 살아갈 때, 그 믿음에 대해서 철저하게 책임을 져 주십니다.
본문에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환관장과 열흘 동안 시험을 했습니다. 즉 ‘왕의 명령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다니엘의 믿음대로 할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난 다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본문 15절에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열흘 동안의 시험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을 따라서 생활한 사람들과 왕의 명령이 아닌 믿음으로 생활한 다니엘과 세 친구를 비교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여기에서 “보인지라”라는 표현은 단순히 눈에 보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이는 보는 사람이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지 않을지라도 역력하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니엘과 그 친구들의 외모나 건강의 상태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확연하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는 말이 안 되는 결과입니다. 어찌 진수성찬을 먹는 자들보다 채식과 물만 먹은 사람이 더 건강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건강은 오늘날의 기준과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의 얼굴이 더 포동포동하지 않겠습니까? 그 얼굴에 기름기가 흐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본문이 의미하는 바가 다니엘과 세 친구들을 제외한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나빠져서 저들이 좋게 보였다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도 다니엘과 세 친구를 제외한 사람들의 건강도 좋았을 것입니다. 왕의 명령을 따라 관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건강이 나빠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건강 상태가 저들보다 더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사람의 힘으로, 자연의 힘으로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셨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믿음으로 왕의 명령을 거절하는 다니엘과 세 친구를 돌보셨습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먹는 진수성찬의 음식이 아닌 채식과 물만을 먹을지라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건강이 더 좋아지도록 주장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 모든 음식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비록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시험 기간 동안 배후에서 모든 역사를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과가 나타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고,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만 하나님을 인간의 얄팍한 지식 속에 가두려고 합니다. 미천한 경험 안에 가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의 지식이나 경험 속에 가두어진다면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얼마나 우스운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결과를 분명하게 책임지실 것입니다. 비록 그 결과가 우리의 생각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우리의 기대에 충족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분명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그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그 어떤 상황보다도 크고 위대하심을 증명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후의 모든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반드시 우리의 믿음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오늘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놓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을 정해야 합니다. 그 상황을 바라볼 것인지, 우리의 믿음을 바라볼 것인지를 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지 세상을 의지할 것인지를 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상황도 우리의 하나님보다 크지 않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자신들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배후에는 반드시 우리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 믿음을 따라 결정하고, 믿음을 따라 행하는 자들과 함께하십니다. 그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크심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우리 앞에 닥치는 상황이 아닌 그 상황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의 소리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도구요, 수단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승리자의 자리에 세우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