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다니엘 5장 18-31절
(단 5:18)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단 5:19)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단 5:20)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완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의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의 영광을 빼앗기고
(단 5:21) 사람 중에서 쫓겨나서 그의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나귀와 함께 살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의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사람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자리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에 이르렀나이다
(단 5:22)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아직도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
(단 5:23) 도리어 자신을 하늘의 주재보다 높이며 그의 성전 그릇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구리, 쇠와 나무, 돌로 만든 신상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지라
(단 5:24)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단 5:25)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단 5:26)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단 5:27)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단 5:28)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하니
(단 5:29)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
(단 5:30)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단 5:31)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
다니엘서의 큰 주제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모든 역사를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역사 속에서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특히 성경의 주 무대로 등장하는 가나안 땅과 그 주변의 역사를 통해서 이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모든 나라를 세우시고 폐하실 때, 분명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과 관련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그 모든 역사를 계획하셨고, 진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 애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성하도록 하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를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징치하시는 수단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저 바벨론을 유다를 징치하시는 수단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페르시아가 제국을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과 성전을 재건하도록 사용하셨습니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 거룩한 기관, 곧 교회를 위해서 수단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를 존재하게 하고, 교회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배경으로 존재합니다. 때로는 교회를 징치하는 수단으로 존재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언제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목적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 세상을 우리의 사명을 위한 영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맡겨진 사명을 통해서 온 땅에 진정한 주인이 되신 하나님을 높이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다니엘 5장은 그 강대했던 바벨론이라고 하는 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사실 이 역사, 곧 바벨론의 멸망과 페르시아 제국의 출현은 세계사에 있어서도 너무나 큰 대변혁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이 멸망한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바벨론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분명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따라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간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하나님 없는 인간의 죄악된 모습이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벨사살 왕이 그의 귀족 천 명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베풀고 그 천 명 앞에서 술을 마시니라”라고 했습니다.
바벨론의 역사를 보면 느부갓네살왕이 B.C.572년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왕들은 아주 짧은 기간을 통치하는 4명의 왕들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바벨론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가 B.C.555년에 즉위해서 약 16년을 통치하고 B.C.539년에 바벨론이 멸망합니다.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벨사살 왕은 바벨론의 역사에서는 왕으로 기록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보니두스의 장남으로 그의 통치 말기 약 10년 동안 섭정을 통해 바벨론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29절에서 벨사살이 다니엘을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은 것입니다. 상징적인 일인자 나보니두스와 실제적 통치자인 벨사살, 그 다음의 자리인 총리, 즉 바벨론 관직의 최고의 자리를 다니엘에게 수여했던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 제국은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훗날 페르시아 제국으로 완성된다.)에 의해서 대부분 점령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바벨론 성이 저 연합군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이제 저 연합군과 바벨론 군사들의 마지막 전투를 통해서 운명이 결정될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 바벨론 성이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된 바벨론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된 이중 성벽으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 이 성은 내성의 두께가 7m, 외성의 두께서 4m였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이 이 성벽을 보강해서 내성의 두께를 7.7m, 외성이 두께를 8.3m로 건축했습니다. 이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좌우로 교차해서 달릴 수 있을 만큼의 두께입니다. 그리고 이 성의 높이는 약 14m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성을 일반적인 방법을 통해서 공격하고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 벨사살이 왕궁에서 큰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벨사살은 바벨론 성이 이 견고함을 믿었고, 저 연합군이 결코 바벨론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귀족들을 초대해서 연회를 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국가적인 비상 상황에서 이러한 연회를 열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 안 군사들과 백성들의 사기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잔치를 통해서 군사들과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것입니다. 이 성의 견고함과 충분한 양식이 있음을 알리고, 대적들과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2-4절에 보면 벨사살이 연회 중 갑자기 명을 내려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 온 그릇을 가져다가 술을 마시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벨사살의 모습은 분명 술에 취해서 정상적인 이성을 상실한 모습입니다. 비록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 나라일지라도 유대 민족에게 있어서 성전에서 사용하던 이 기명들은 거룩하게 여겨지는 기물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는 유대 민족들의 반감을 살 수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벨사살 왕이 술을 마시면서 이처럼 불경스러운 일을 행했음을 기록함으로 이 일이 가져올 큰 파장을 기대하게 하고 있습니다.
벨사살 왕의 이러한 행동은 단지 술에 취해서 저지르는 실수가 아닙니다. 이는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교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가져온 거룩한 기명들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만 사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지고 자신을 위해 사용한다면, 이는 자신을 여호와의 자리에 올리려는 지극히 교만한 행동입니다. 그런데 벨사살은 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여호와 하나님의 약하고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강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이로 인해 곧 벌어질 전쟁에서의 승리를 염원하기 위해서 이 일을 행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상에서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고 해서, 실제로 이방의 신이 강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약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유다를 징치하시고자 하심으로 허락하시고 섭리하신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일 뿐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성막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물인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탈취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힘이 약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경건과 여호와 하나님을 우상화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 언약궤를 통해서 블레셋을 징치하시고 저들 스스로가 그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도록 섭리하셨습니다.
결국 본문에 나타나는 벨사살 왕의 모습, 이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 곧 죄악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없기에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세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도전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이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에 관하여는 결코 양보와 타협이 없으신 분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이 보이는 죄악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아니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세우려고 하는 죄악입니다. 태초의 사람 아담과 하와가 왜 그 죄악의 자리에 섰던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와는 뱀의 한 말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라는 말에 넘어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습니다(창3:5-6). 하지만 그 죄의 결과는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커녕 사망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서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했고, 18장 12절에서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라고 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상은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그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그러한 자신들이 하나님의 멸망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시편 10편 4절에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저 교만한 악인들은 언젠가는 분명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후회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저들의 그 교만했던 죄악이 용서를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후회가 쓸모없기에, 이제 더 이상의 기회가 없기에 저들은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됩니다.
Ⅱ.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그릇들을 가지고 술을 마시며, 우상들을 찬양하고 있을 때, 왕이 경악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본문 5절에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석회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그 때”는 벨사살과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이 한창 주흥에 빠져있고, 우상들을 찬양하고 있을 바로 그 때를 가리킵니다. 왕이 술을 마시고 있는 정면의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신비한 글자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왕을 포함하여 그 잔치에 참여한 자들은 그 글자를 쓰는 손가락과 그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저급한 향락에 웃음이 넘쳐났던 그 잔치 자리가 두려움과 공포의 자리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벨사살 왕이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는지를 본문 6절은 “이에 왕의 즐기던 얼굴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의 무릎이 서로 부딪친지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벨사살의 모습은 1-4절에 등장하는 모습과는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술과 흥으로 말미암아 붉고 밝게 빛나던 그의 얼굴이 죽음의 빛으로 변했습니다. 우상을 찬양하던 그의 입이 완전히 막혔습니다. 그토록 기세가 등등하던 왕의 다리에 힘이 빠지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는 왕이 지금의 상황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멸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왕이 급히 바벨론의 지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읽고 해석하는 자를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글자는 당시 바벨론에서 공용으로 사용하는 글자 중의 하나인 아람어입니다. 하지만 바벨론의 지혜자들은 그 글을 읽을 수도 없었고, 그 글의 의미를 해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후에 다니엘은 그 글을 온전하게 읽었고, 해석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로만 읽을 수 있고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혼란과 공포,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왕비가 그 잔치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이 왕비는 분명 벨사살의 왕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이미 그 잔치 자리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왕비는 느부갓네살 왕의 시대에 있었던 사건(2장과 4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 느부갓네살의 왕비는 이 죽은 지 약 9년이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왕비는 벨사살의 어머니로 보입니다. 역사에 의하면 이 여인은 왕궁 안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고 합니다. 또한 왕의 부름이 없이 왕 앞에 나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상당한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왕후의 추천을 받은 다니엘이 왕 앞에 섰습니다. 아마도 이 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 때의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벨사살 왕의 부름에 즉각 왕의 잔치 자리에 왔습니다. 그런데 벨사살의 교만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벨사살은 다니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당시의 국가적인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던 사람임을 누고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에게 처음 한 질문은 “네가 나의 부왕이 유다에서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라는 것입니다(13절). 이는 다니엘을 멸시하는 표현입니다. 즉 다니엘의 과거가 어떠했든지 그의 출신이 포로로 잡혀 온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벨론의 최고 통치자라 할지라도 당시 80세 정도 되는 고령의 다니엘, 그것도 바벨론의 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기록된 사람에게 합당한 예우를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교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가 왕의 지위는 가지고 있을지라도 왕의 자질과 품위를 갖추지 못한 자임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드디어 벨사살 왕이 다니엘에게 벽에 기록된 글을 읽고 해석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그 보상으로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왕의 예물은 왕이 친히 가지시며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주옵소서 그럴지라도 내가 왕을 위하여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뢰리이다”라고 말합니다(17절). 다니엘이 왕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이 글은 단순한 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벨사살 왕에게 분명하게 전하고자 하시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다니엘은 그 글의 읽음과 해석에 따른 보상이 문제가 아니라, 그 글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뜻에 중점이 있음을 왕에게 먼저 설명합니다.
먼저 다니엘은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의 시대에 행하셨던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즉 우리가 4장에서 보았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분명 느부갓네살의 교만에 대해서 하나님이 경고하셨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던 사건입니다. 나아가 이를 통해서 인간의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신 사건입니다. 다니엘은 이 사건을 회상함으로 그 어떤 왕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벨사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의 그릇을 가져다가 술을 마시고 우상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벨사살의 교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글을 기록하셨다고 합니다.
이제 다니엘이 그 글을 읽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는 아주 간명하게 나타냅니다. 이 글은 세 새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가 완료형입니다. 즉 이미 완료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은 이 글이 해석된 이후에 발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 사건이 완료된 것으로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미 확정되었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먼저 “메네(מְנֵא)”입니다. 이 말의 뜻은 ‘계산하다’라는 의미형입니다. 이 단어가 반복된 것은 하나님이 계산하고 또 계산하셔서 그 계산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나님이 벨사살의 나라를 계산하셨고,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벨사살의 나라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데겔(תְּקַל)”입니다. 이는 ‘무게를 달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마치 저울의 양쪽에 다른 물건을 올려놓고 무게는 재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평가가 공정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문제는 왕이 하나님의 그 평가에 부족함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벨사살 왕의 인격이 하나님의 기준에 형편없이 모자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벨사살이 왕의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레스(פְּרַס)”입니다. 본래 “우바르신”은 “베레스”의 복수형입니다. 이는 ‘찢어지다, 쪼개지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종이를 찢듯이, 옷이 찢듯이 벨사살의 나라가 찢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를 메데와 바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바벨론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해석한 이 글을 종합해서 설명하면 “하나님이 벨사살과 그의 나라를 계산하고 또 계산하셨습니다. 그리고 저울에 달아서 재어보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재어도 왕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왕의 시대가 끝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의 나라, 곧 바벨론을 찢어서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라는 것입니다. 벨사살은 지금 자신의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바벨론을 저 연합군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아닌 다른 신들은 아무런 힘이 없고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위기의 상황에서도 연회를 열고 유흥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벨사살이 그토록 멸시했던 여호와 하나님이 벨사살과 바벨론의 운명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벨론 성이 견고하다 할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방어의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바벨론과 벨사살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해서 세워지고 폐해진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사람들을 계산하십니다.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그 가운데 우리 개인들과 우리 교회도 포함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계산에서 하나님의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나의 능력과 권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 나의 삶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믿음과 삶의 열매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과 고백의 삶이 바로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 믿음과 고백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습니다.
Ⅲ.바벨론의 끝과 새로운 세계의 주관자
본문 29절 “이에 벨사살이 명하여 그들이 다니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을 그의 목에 걸어 주고 그를 위하여 조서를 내려 나라의 셋째 통치자로 삼으니라”라고 했습니다.
벨사살은 불려온 다니엘을 보면서 그가 히브리 노예의 출신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다니엘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벨론의 지혜자들이라고 자부하던 자들 가운데 아무도 그 글을 읽고 해석할 수가 없었는데, 다니엘은 아주 간단하게 그 일을 해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록 다니엘의 해석이 자신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니엘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벨사살은 다니엘에게 보상했습니다. 여기에서 벨사살이 보상한 내용은 세 가지였는데, 이는 왕이나 왕에 버금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자주색 옷”을 입혔습니다. 이 자주색 옷은 통치자가 입는 전형적인 색깔의 옷입니다. 훗날 예수님이 로마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실 때, 예수님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그 앞에서 절하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조롱했습니다(막15:17-18).
다음은 “금 사슬”을 목에 걸어 주었습니다. 이는 왕의 목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니엘이 이 목걸이를 걸었다는 것은 왕적인 위엄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은 “셋째 통치자”로 삼았습니다. 벨사살은 다니엘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에게 주어진 이 보상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밤에 벨사살이 죽임을 당했고, 바벨론이 멸망했기 때문입니다(30절). 벨사살은 다니엘을 통해서 나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급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에 대하여 대비하지 않았고, 끝내는 개인의 죽음과 나라의 멸망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본문 31절에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 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당시 62세의 고령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리오가 그 강력했던 바벨론을 멸망시켰습니다. 다니엘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생각과 다른 일, 사람이 예상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이루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님만이 역사의 유일한 주관자이심을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바벨론의 역사를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나라 페르시아를 세우셨습니다. 그 과정에는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만이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심을 확실하게 증명하셨습니다. 또한 벨사살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임을 당했고, 나라의 멸망을 막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 등장하는 벨사살의 모습은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즉 예수님은 분명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종말에 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전파한 최초의 복음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것이었습니다(마4:17). 그리고 공생애를 마치시는 시점에서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마24장). 예수님이 회개를 촉구하시고, 마지막 때의 일을 말씀하심은 바로 그 때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처럼, 주인의 달란트를 맡은 종처럼,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 그 때,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과 영광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마25:21).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