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더 강한가?

다니엘 314-18

 

(단 3:14)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단 3:15)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단 3: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단 3: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오늘날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과학이요, 상식일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실험을 통해서 증명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 인해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이 역사적 사실에서 배제되기도 합니다. 분명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들 가운데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기록을 기록자가 목적을 가지고 꾸며낸 이야기라고 치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과연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이 사람들의 이성에 부합해야만 할까요? 과학으로 증명이 되어야만 할까요? 그래야만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야만 우리가 믿음으로 용납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이성에 부합하지 않고 과학으로 증명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성경에서 제외시켜야 할까요?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듣고, 그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될까요? 과학으로 증명될까요? 에덴동산과 선악과 사건은 어떻게 할까요? 노아 시대에 있었던 홍수 사건은 어떻게 할까요? 출애굽 사건은 어떻게 할까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사건은 과연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은 과연 어떻게 해석하고 소망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고,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허구라고 한다면, 성경 자체가 허구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의 믿음도 허구가 되며, 우리의 구원도 허구가 되고 맙니다. 나아가 이러한 허구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고 믿으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은 이성을 초월합니다. 과학을 초월합니다. 이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이해되고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그 무엇도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위대한 것입니다. 세상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상은 절대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믿음과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11:38).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건도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꾸며낸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취급되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이라고 하는 저자가 여호와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가상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내용은 상식 안에서 믿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자연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행하신 초자연적인 역사임을 믿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이적이 실재적인 사건이었듯이 본문의 사건도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이 바로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심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만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그 능력을 경험하며 살게 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세상에서 담대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만이 세상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누가 더 강한가?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굴복을 강요합니다.

본문 1절에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다니엘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장의 사건과 연결해서 생각해보면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본문 15절에서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일에 대해서 그 어떤 신도 관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이 일이 느부갓네살의 교만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앗수르를 정복하고 제국을 이루었음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 신상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2장에서 자신이 꿈에서 본 신상과, 자신을 금으로 된 머리라고 한 다니엘의 해석을 따라 자신을 상징하는 신상일 것입니다.

그런데 당 시대에 이러한 신상을 세우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자의 몸과 사람이 얼굴을 한 스핑크스를 세워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를 지키게 했는데, 그 높이가 80m 정도 됩니다. 또한 이집트 전역에는 파라오의 형상을 한 거대 조각상들이 곳곳에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B.C.5세기경 그리스의 올림피아에 약 13m 정도 되는 제우스의 신상이 세워지기도 했고, 바벨론에도 약 6m 정도의 벨의 조각상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의 규모는 어마어마합니다. 그 높이는 약27-30m 정도이고, 그 너비는 2.7-3m 정도가 됩니다. 아마도 그 신상은 나무나 청동으로 만들어졌을 것이고, 그 겉을 금으로 덧입힌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신상의 형태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신상을 보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갖게 할 정도였습니다.

본문 4-6절에 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느부갓네살이 이 신상을 세운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이 신상의 낙성식에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들의 대표자들을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상 앞에 절을 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여기에서 절을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완전히 낮춤으로 상대방에 대한 극진한 경외와 존경을 표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사용된 이 표현(סְגִד)은 신으로 여겨지는 우상 앞에 경배하는 행위를 나타낼 때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느부갓네살이 자신이 세운 이 신상을 신으로 여기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이는 자신을 신으로 경배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또한 왕의 이 명령에는 왕의 이러한 뜻과 명령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아주 강력한 보응을 담고 있습니다. 즉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는 않는 자, 더 분명히 말하면 자신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는 풀무불에 던져넣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왕의 명령을 따라 악기가 연주되자 낙성식이 참석한 모든 사람이 그 금 신상 앞에 절을 했습니다(7).

성도 여러분! 느부갓네살이 누구입니까? 2장에서 보면 그는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 때 그는 다니엘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이는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한 다니엘과, 그 다니엘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심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과연 이러한 모습이 2장의 모습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렇게 빨리 망각해 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요, 명령입니까?

하지만 오늘의 세상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면서도 따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더 교만한 자리에까지 올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얼마 못 가서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느부갓네살의 이러한 명령 앞에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입니다. 이들은 1장에서 다니엘과 함께 음식 앞에서 자신의 정절을 지켰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 결과 이들은 바벨론 제국에서 높은 관직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앞에 다시 한번 엄청난 문제가 닥친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벨론의 관리로 있는 한 왕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왕의 명령을 따라 금 신상 앞에 절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금 신상으로 대변되는 우상 앞에 절을 할 것인가? 바벨론의 높은 관직을 유지하면서 평안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왕의 명령대로 저 풀무불에 던져져 죽임을 당할 것인가?

하나님과 우상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 이 세 친구는 단호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는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서 왕에게 탄핵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본문 8절에 참소하니라라고 했는데, 이는 아주 독특한 표현으로 조각조각 씹어 삼켰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저 갈대아 사람들이 이 친구들에 대해서 얼마나 적대감이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119절에 기록한 대로 이들은 여느 사람들보다 지혜롭고 특출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삶았습니다. 거기에 자신들의 다신교적 종교관과 달리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일신 종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저들의 눈에는 거슬리는 존재였고, 결국 이 왕명을 거역하는 모습은 그들이 찾던 좋은 먹잇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세 친구가 왕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본문 14-15절에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이르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한다 하니 사실이냐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의 탄핵에 왕은 극도로 분노함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 앞에 끌려온 세 사람 앞에서는 지극히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왕도 이 사람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들의 탁월함을 왕이 익히 알고 있기에 이들을 즉각적으로 처형하지 않고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느부갓네살은 갈대아 사람들의 참소하는 내용이 사실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고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는 금 신상에 절하라고 하는 왕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을지라도 이제부터는 왕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하는 권면입니다. 이는 앞에서 극히 분노했던 왕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는 그만큼 저들을 아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신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인해 실추된 왕의 자존심을 저들의 순종을 통해서 되찾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즉 왕이 이러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저 세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기도 했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왕은 자신의 권세에 도전할 자가 아무도 없다고 과시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의 명령에 맞설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저 세 사람이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입니다. 즉 비록 여호와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자기 손에서 너희들을 건져낼 수 없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이를 더 심하게 말하면 아무리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무능한 신이며, 자신이 그 신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이 세 사람이 왕의 말을 따르게 되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여호와 하나님의 무능함을 시인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세상은 우리에게 아주 크고 강력한 것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아주 사소한 것을 요구합니다. 때로 우리는 본문의 사건을 이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왕이 보는 앞에서는 신상에 절하는 흉내라도 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위기를 모면하고 돌아가서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겉모습이 중요하냐고 묻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의 신앙은 그렇게 해도 되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적당히 타협하고, 뒤돌아서서 우리의 신앙을 지키면 되는 것일까요? 우리의 믿음은 그러한 것일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 이러한 일들이 다가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적당한 타협과 양보를 요구합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세상도 섬기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를 향한 믿음과 세상에 동화됨의 양다리를 요구합니다. 과연 이러한 요구 앞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가진 대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손이 세상의 그 어떤 힘보다 강합니다.

, 이제부터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왜 중요한 것인지, 우리의 믿음이 만들어내는 결과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저 세 사람의 믿음과 그 믿음에 대해서 반응하신 하나님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저 세 사람은 느부갓네살 왕의 요구 앞에서 세 가지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왕의 질문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본문 16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표현을 보면 이 세 사람의 각오가 얼마나 단단한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왕의 이름을 당당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들의 죽음을 이미 각오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도 왕의 말에 대해서 더 이상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 할지라도 그 명령이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재고의 여지조차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왕의 경고와 그 결과가 준엄하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 명령에 순종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왕의 뜻에 따르지 않을 것이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우리에게 양보나 타협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를 이 풀무불과 왕의 손에서 건지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7절에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원문의 의도와는 조금 다르게 번역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원문에 따라 번역한다면 만약 왕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불에 던지신다면,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저 세 사람은 아무리 뜨거운 풀무불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구원해 내실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서 이 역사를 주장하실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무조건 복종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저 세 사람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셋째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우상에게 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8절에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표현은 눈에 보이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왕에게조차 당당하게 맞서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저 세 사람의 성숙한 신앙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이는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능히 저 풀무불에서 구원하실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그 풀무불에 죽게 하신다고 할지라도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중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하시느냐 따라 행동하는 신앙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입니다. 나의 필요를 따라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단지 그 하나님만을 섬기는 믿음입니다. 욥이 고백한 대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는 고백으로 살아가는 믿음입니다(1:21).

하나님이 저 풀무불에서 구원하지 않으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그리고 우리가 그 고난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 하나님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형편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지, 우리가 관여하고 우리가 주장할 바가 전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뜻을 위해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본문 17절에 이르렀다면 엄청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섭리주로서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대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즉 나의 형편과 처지를 살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비록 나의 뜻대로 되지 않아도, 내 필요가 채워지지 않아도, 그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의 답변에 왕이 분노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왕 앞에서 이렇게 대답했으니, 어느 왕이 이를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결국 느부갓네살은 그 풀무불의 뜨겁기를 칠 배나 더하게 하라고 명령하고 이 세 사람을 결박해서 그 풀무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풀무불의 뜨겁기는 저 세 사람을 붙들었던 사람들을 태워버림으로 그 열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증명했습니다. 이제 저 세 사람은 그 뜨거운 풀무불에 살라지고 말 처지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저 세 사람을 그 불의 세력에 넘겨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저 세 사람이 던져진 그 불 가운데로 오셔서 저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우리는 저 세 사람이 풀무불에 던져지는 장면에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보다는 하나님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려고 합니다. 즉 불 속에 던져지는 세 사람보다 그 세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결국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저 세 사람을 죽일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불 가운데 있는 세 사람을 향하여 나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저 세 사람은 불 가운데서 자신의 발로 걸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불에서 나온 저 세 사람의 모습은 그 뜨거운 풀무불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27절에 총독과 지사와 행정관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지금 갑자기 그 풀무불이 약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불은 여전히 뜨거운 불입니다. 저들을 붙들어 불 가운데로 던진 군사들을 태워버린 그 불입니다. 하지만 그 뜨거운 불이 저 세 사람을 조금도 해하지 못했습니다. 육체는 물론이고 저들이 입고 있는 옷조차도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불에 탄 냄새도 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이 부르자 지체없이 그 불 가운데에서 나왔습니다. 아무리 뜨거운 불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사람을 태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이사야 432절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얼마나 완전하게 보호하시는지에 대해서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이 예언을 저 세 사람에게는 문자적으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왜 저들이 고난을 당하기 전에 구해주지 않으시고 고난의 현장까지 몰고 가셨을까요?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시는 역사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야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고난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확고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너무나도 분명함을 믿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고난이나 조급함으로 인해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세상의 권력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풀무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위협을 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붙잡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어떤 것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그 손길은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손길입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는 못하실 일이 전혀 없는 전능하신 손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지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독생자까지도 십자가에 내어주십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소망하는 하나님입니다. 바로 내 편이신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단순하게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믿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하나님으로만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세상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구원과 심판은 그 어떤 존재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가장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대적할 그 어떤 존재도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하나님을 얼마나 확고하게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서 있을 때,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믿음대로 우리를 위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의 역사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모두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통해서 승리자의 영광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