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만남
요한복음 4장 3-14절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通過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洞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疲困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時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女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弟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洞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女子가 이르되 當身은 유대人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女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人이 사마리아人과 相從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께서 對答하여 이르시되 네가 萬一 하나님의 膳物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求하였을 것이요 그가 生水를 네게 주었으리라 女子가 이르되 主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當身이 그 生水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祖上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自己와 自己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當身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께서 對答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者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者는 永遠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永生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은 혼자 살 수가 없고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사회라고 하는 공동체를 만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이루는 첫 단계가 바로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만남을 통해서 사회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헤어짐을 통해서 그 사회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은 인류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변할 수 없는 법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어떤 만남은 우리의 인생에 많은 유익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손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만남이라고 하는 과정에 신중을 기합니다. 또한 언제 만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무 때나 만나는 것이 아니라 꼭 만나야 할 때,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난다면 그보다 더 좋은 만남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인생은 만남으로 시작해서 헤어짐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는 부모를 만나게 되고, 가족을 만나게 됩니다. 자라면서 친구를 만나게 되고, 사회에서 다양한 만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인생의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그 안에서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생을 마치는 날 우리는 그 모든 만남을 뒤로 하고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에서 만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그 수많은 만남 가운데서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만남은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의 만남이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만남, 그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만남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만남은 우리의 인생에서 아주 크고 특별한 의미를 주는 만남,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는 만남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만남 가운데서 아주 특별한 만남을 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이름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아주 깊은 의미를 가진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이 여인의 삶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 삶의 방향이 바뀌었고,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예수님과 이루어진 잠깐의 만남을 통해서 이 여인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화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만남이 있었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큰 전환점으로 삼을 만한 만남이 있었습니까?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분명 우리의 인생에서 너무나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만남이라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인생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만남에 대해서 확신이 없는 분이 있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 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아름다운 만남』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친히 찾아오신 만남입니다.
본문 3-4절에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떠나사”라고 하는 표현은 ‘버리다, 포기하다’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유대에서 밀려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떠나셨던 것입니다.
한편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과 관련된 표현 가운데 하나가 “때”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즉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사건은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곧 시간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시간표대로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지나가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통과하려고 하셨을까요? 사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의 동편을 통해서 다녔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서 검증되는 내용입니다. 사마리아는 본래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하지만 북왕국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한 후, 앗수르의 정책에 의해서 여러 민족이 사마리아로 이주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본토인들과 혼혈이 되어 이스라엘 민족의 혈통적 순수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하게 되었고, 상종조차 하지 않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자주 지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당신의 습관대로 사마리아로 지나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예수님의 발걸음을 막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 5-6절에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수가라고 하는 동네에 이르셨습니다. 이 동네는 과거 요셉 지파에게 주어졌던 땅입니다. 또한 야곱의 우물이라고 불리는 우물도 있는 역사적 의미를 가진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우물 곁에 앉으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때 예수님의 상태는 매우 피곤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유대에서 출발하여 사마리아까지 오신 길이 힘든 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을까요?
하지만 본문 7절에서는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찾아오신 분명한 목적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에서 정의한 대로 예수님의 발걸음은 항상 “예수님의 때와 시간표”를 띠라 진행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오셨다고 할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범죄한 아담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창3:8). 하나님은 온 땅이 죄악으로 뒤덮인 세상에서 당신이 은혜를 베푸신 노아를 찾아오셨습니다(창6:13). 하나님은 우상의 세계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를 선민의 조상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창12:1). 하나님은 일상적인 삶을 살던 당신의 사람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당신이 사용하실 선지자로 세우셨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친히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눅5:3).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늘의 보좌를 잠시 비워두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자기 백성들 가운데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요1:14).
성도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이 이름도 없는 한 여인을 찾아 사마리아로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이 여인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찾아오심으로 이루어진 이 만남보다 더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이 지구상에 또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자리는 예수님과 우리의 아름다운 만남의 자리요, 시간입니다. 혹자는 내가 내 발걸음으로 여기에 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먼저 움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여기에 왔고, 우리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Ⅱ.진리(복음)를 위한 만남입니다.
야곱의 우물에서 여인을 만난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그 여인에 대해서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 사회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은 부정한 자들이요, 다른 사람까지도 부정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여자는 혼혈에 대해서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겼기에 남자들보다 더 심한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남자와의 관계가 아주 복잡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인은 행실의 문제로 인해서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조차도 소외된 삶을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러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여인과의 만남을 “물”이라고 하는 매개를 통해서 시작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본문 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물을 좀 달라고 말하는 유대인 남자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지금의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관해서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문하는 여인에게 두 가지를 대답으로 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에서 “선물”이 과연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는 것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가리킬 수도 있고, 성령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안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면 이는 “생수”라고 할 것입니다. 이 생수는 단순한 물이 아닙니다. 이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이 선물은 이 세 가지의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생수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장 37-38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십니다(요16:7). 그리고 성경은 성령을 생수로 표현하기도 하고 있습니다(요7:38).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관련된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누구인지 알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지금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만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만나도 그분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예수님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바른 지식을 가졌던 사람은 극히 일부였을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가지를 하나로 규합하면 그것은 곧 “진리(眞理)”라고 하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물에 관한 내용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진리입니다. 나아가 이 진리를 아는 것이 곧 구원의 길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복음(福音)”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존재를 진리라고 하는 단어와 자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했습니다. 1장 17절에서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8장 32절에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14장 6절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의 아름다운 만남을 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분만이 우리에게 있어서 진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만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진리를 알 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 진리를 알 때, 내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 진리를 알 때,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 진리를 알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 진리를 알 때,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진리를 알 때,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진리를 알 때, 나에게 저 영원한 천국이 유업으로 준비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진리입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복음입니까? 이 진리를, 이 복음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이 여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이 만남이야말로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Ⅲ.생명(구원)을 위한 만남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모습은 아주 진지하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여인 하나를 만나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구원을 위해서 친히 발걸음을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이라고 하는 매개체를 통해서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무지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곧바로 깨달아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본문 11-12절에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여인의 생각은 현실에 머물러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은 차원이 높은 영적인 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 여인은 땅의 것에 매여 있습니다. 또한 이 여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야곱에게 비교되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사마리아인들은 야곱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비록 혈통은 혼합되었지만, 여호와 신앙과 민족적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나아가 나름대로 메시야 사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예수님이 그 메시야이심을 발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 저들의 영적 눈은 열려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이 여인의 대화에는 아직까지 분명한 접점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인 말씀을 주셨습니다.
본문 1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여인의 질문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야곱이 그의 후손들에게 남겨 준 이 우물의 물과 예수 자신이 사람들에게 주는 물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아무리 마시고 또 마신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갈증을 영원히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마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목마름”은 일차적으로는 육신의 갈증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의미는 영적인 갈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지금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친다고 할지라도 육신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은 스스로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당신만이 그 갈증을 영원히 해결하실 수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본문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를 강조하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당신이 주시는 물은 이 세상의 물과 다르다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한 번만 마시면 영원히 갈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고 하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그 물을 주실 수 있는 주체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원문에서 예수님은 “내가(ἐγὼ)”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것으로, 예수님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러한 일을 행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친히 그 갈증을 경험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영원한 생수는 예수님 자신의 고통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친이 양식이 되셨고, 또한 음료가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포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할 수 없었고,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이 영원한 생수,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사마리아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우물에서 이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녀의 영안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결과는 그녀의 입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소리가 나오게 되었습니다(29절).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을 만나게 되면 그 결과는 우리의 구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를 위해 천국을 예비하기 위해서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날에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서 천사들을 대동하시고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다시 이루어진 예수님과 우리의 만남은 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만남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와 예수님의 만남은 이 세상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과 만남이 가지는 의미를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남을 가지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찾아가는 만남입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더욱 깊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얻은 구원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만남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광성이라고 하는 교회 안에서의 아름다운 만남을 통해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서로가 나누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