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섬길 자유
갈라디아서 5장 13-15절
兄弟들아 너희가 自由를 爲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自由로 肉體의 機會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律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自身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萬一 서로 물고 먹으면 彼此 滅亡할까 操心하라 |
이 세상에는 많은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혈통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학업을 위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직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취미를 위한 공동체도 있습니다.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공동체들 가운데 교회만큼 특별한 공동체는 없습니다.
교회는 그 출발부터가 특별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구성된 존재가 아닙니다. 즉 사람이 이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의 목적을 위해서 조성된 공동체도 아닙니다. 그 누구도 교회를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 수도 없고, 삼아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조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당신이 부르신 자들을 통해서 조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교회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와 함께하시고,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철저하게 신적(神的)인 기관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제외한다면 이는 그저 세상 가운데 존재하는 공동체와 다를 바가 없는 기관이 됩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쓸모가 없는 기관이요, 가장 미련한 공동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의 중심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의 기준이요, 세상의 방향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가 바로 서 있을 때,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보일 때, 세상이 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교회를 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교회로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교회로 세워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우리 교회의 구성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더 심하게 말하면 우리가 죄악 가운데서 살면서 그것이 당연한 삶인 줄 알고 있을 때, 그 삶의 결과가 영원한 멸망인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멸망의 자리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길이 전혀 없기에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에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알게 하셨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근거로 구원이라고 하는 위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 구원의 선물을 받은 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면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게 되면 감사하게 됩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찬양하게 됩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충성하게 됩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면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섬김에 대해서 다른 측면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일은 어디에서 출발할까요? 오늘 우리는 이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시간 『사랑으로 섬길 자유』라는 제목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본문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유(自由;freedom)”입니다. 이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또는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무엇에게 구속되지 않는다는 의미는 같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나 행위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자유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를 자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에 대한 자유입니다. 둘째는 율법(정죄)에 대한 자유입니다. 셋째는 죽음(심판과 멸망)에 대한 자유입니다. 만약 이 자유를 국어사전의 의미를 따라 설명하면 조금 이상해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죄에 대해서 자유롭다고 해서 우리는 죄에 구속되지 않고 마음껏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자유롭다고 해서 율법의 정죄를 무시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죽음에 대해서 자유롭다고 해서 우리는 죽음을 무시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유로운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그 죄가 우리를 얽매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그 죄를 위해서 친히 대속의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정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를 범할지라도 율법이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하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그 죄값을 완전히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인 죽음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장차 천사장의 나팔 소리를 앞세우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에서 이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비결에 대해서 몇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믿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알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 진리는 복음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면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8장 36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친히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그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면 우리는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고린도후서 3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주의 영”은 “성령”입니다. 이 성령 하나님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대속의 결과는 성부 하나님이 정하신 자들에게 정확하게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자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 안에 임재하시면서 우리가 죄와 율법과 사망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참 지식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참 믿음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참 용기를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십니다.
결국 우리가 자유를 누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14:6).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된 자유로 가는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죄의 문제입니다. 이 죄가 우리를 자꾸만 흔들리게 합니다. 이 죄가 우리를 얽매서 자기의 종으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확고한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이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넘어지고 죄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죄가 우리를 얽매지 못합니다. 그 죄에 대해서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그 죄의 결과는 사망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이 모든 얽매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자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Ⅱ.사랑으로 섬기기 위한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우리에게 그러한 자유를 주셨을까요? 우리가 죄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껏 죄를 무시하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 자유를 주셨을까요? 분명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더 고상하고 더 위대한 것을 위한 것입니다.
본문 13절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극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것입니다.
첫째로 그 자유는 육체를 위한 기회로 사용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육체(肉體;σάρξ)”라고 하는 단어는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나는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의 신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삶을 지향하는 죄의 처소로서의 육신을 가리키는데, 특히 바울의 서신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바로 죄와 관련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회(機會;ἀφορμή)”는 본래 군사적인 용어로 ‘어떤 움직임이나 공격이 시작되는 장소’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성경에서는 ‘어떤 일을 시도하거나 수행하는 데 이용하는 자원이나 수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라는 표현은 ‘죄의 본성을 지닌 육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얻은 자유를 그 본성대로 죄의 삶을 사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하라’라는 아주 엄중한 경계로 사용된 것입니다.
결국 이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이지만 그 자유를 가지고 죄를 짓는데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베드로도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벧전 2:16).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자유는 의식적인 율법과 문자적인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하게 해방시켰습니다. 이는 분명 영적인 해방이요, 자유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가지고 육체의 죄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종의 기회로 삼는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그 십자가를 통한 대속과 그로 인해 선물로 주신 그 위대한 자유를 모독하는 어리석은 짓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데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랑(ἀγάπη)”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바울이 지적하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앞에서 그 사랑의 실체에 대해서 이미 설명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에서 발생하는 사랑입니다. 또한 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랑입니다. 결국 성도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사랑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랑을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의식적인 율법의 규례들로부터는 자유를 누리지만, 진정한 율법의 대강령인 사랑에 대해서는 온전하게 실행해야만 하는 자유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랑의 자유에서 “종노릇하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자유”와 “종노릇”이라는 개념은 완전히 상반된 것입니다. 어떻게 종이 자유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자유하는 사람이 종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이 둘이 모순이 없습니다. 서로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아름답게 어울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섬김은 자유하는 사람의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가장 완벽한 예(例)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입니다(요13:4-15). 예수님은 분명 제자들의 “주와 선생”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은 가장 하층에 존재하는 종, 곧 노예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조차도 유대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는 사람의 존엄성을 잃는 행동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죄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서로의 발을 씻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진정한 섬김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고, 제자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예(例)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분은 진정 하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를 잠시 비워두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인들을 위해서 친히 고난이 닥치셨습니다. 친히 자신의 목숨을 그 죄인들을 위해서 내어주셨습니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예수님의 사랑을 입은 사실을 믿는 자라면, 우리도 예수님의 그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 실천의 방법에 바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내가 섬겨야 하는 우리의 이웃은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을 이루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자유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할 자유이지 사랑을 받을 자유가 아닙니다. 그 자유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예수님을 본받기 위한 자유입니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섬기셨던 것처럼 우리의 형제와 이웃을 섬기기 위한 자유입니다.
Ⅲ.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자유입니다.
본문 14절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본문을 시작하는 단어는 “왜냐하면(γὰ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통해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노릇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이루어졌나니(πληρόω)”라는 표현은 ‘가득하게 하다, 가득 채우다, 완전하게 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거룩한 뜻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인용된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5절 이하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고 묻기를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것으로 하나님을 만을 사랑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을 향한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인용한 부분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부분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웃을 향해 섬김으로 나타내야 하는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나 자신을 향한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내야 하는 사랑은 구별이 있지 않습니다. 그 대상에 따라서 변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마치 우리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베푸신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은 바로 그 사랑을 우리가 본받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본래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사랑을 하나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나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섬기는 것은 바로 그 사랑의 실천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주신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향하여 가진 뜻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 전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10절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서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과 반대되는 내용을 첨가함으로 우리의 섬김의 문제에 경고를 울리고 있습니다. 본문 15절에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표현된 내용은 마치 육식 동물들이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서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이는 분명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물론 바울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성도들 사이에서 서로의 영혼에 상처를 주거나 비난함으로 괴롭히는 행동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생생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를 물고 먹는다면 그 교회는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종노릇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간다면 이는 분명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회를 하나님이 그냥 두실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교회를 존재하게 하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교회의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계2:5). 그 교회는 마치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밖에 버려지고 사람들의 발에 밟히는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될 뿐입니다(마5:13).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시고, 그 성령을 우리 안에 충만하게 부어주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사랑으로 교회와 성도를 섬기게 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우리의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호흡과, 우리의 재능, 우리가 가진 전부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쓰여져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아담처럼 그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자유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그 자유를 이웃을 사랑하며 서로 종노릇 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지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빛을 비추게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소금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세상이 예수를 발견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세상이 예수의 향기를 맡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보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 세상이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칭찬하게 해야 합니다. 저 세상이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인정하게 해야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서로를 섬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통해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와 우리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