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0. 추수감사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막46)

  본문 : 막 11:1-10

  제목 : 주가 쓰시겠다 하라.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옛날 농담에 희미한 착각 속에 황홀한 오해를 하면서 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 혼자 착각하면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오해를 한다는 말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의 기질이 상당히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나온 목회를 되돌아보니 나 혼자 오해하고 착각한 일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그중에 제일 큰 오해와 착각은 제가 설교를 참 잘해서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삶이 바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오해이고 착각이었던 같습니다.

 

  저는 목회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성경을 연구하고 바르게 해석해서 설교를 바르게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 설교 준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제법 잘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성도들의 반응을 보니까 그것이 오해이고 착각인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꼬박꼬박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들으면 뭔가 좀 달라지리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늘 성도들에게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행함보다는 믿음을 강조해서 설교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선을 행함으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저의 기대는 성도들이 복음을 믿는 믿음의 위대함을 알기만 하면 자동으로 삶이 바뀐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삶이 바뀔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삶이 그렇게 바뀌지 않는 것을 보면 설교를 듣지 않든지 듣기는 하지만 공감하지 않거나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행함보다 복음을 강조하고 믿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교회의 단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로만 해서는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훈계든지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실천은 잘 안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성경의 핵심인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강조하는 교회는 삶이 없어서 점점 쇠퇴합니다. 그래도 삶을 강조하고 실천을 강조하고 체험을 강조하는 교회는 복음을 믿는 믿음을 무시하지만 교회는 부흥하고 성도들도 힘이 있습니다.

 

  지금 이슬람교가 굉장히 부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쇠퇴하고 있는데 이슬람교는 해마다 그 숫자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슬람교는 순종을 제 일로 하고 철저하게 교리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술도 안 마시고 돼지고기도 안 먹고 사치도 안 하고 모두가 평등한 사람으로 삽니다. 그들이 가진 신앙과 실천이 확실하게 같습니다. 믿음이 삶에서 늘 실천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교리대로 살고 교리를 지키지 않으면 바로 엄격한 처벌을 받습니다.

 

  그들은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합니다. 대강 적당히 하지 않습니다. 정한 시간에 늘 메카를 바라보며 정해진 자세로 정해진 내용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기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는 등의 정결 의식도 행해야 합니다. 일 년에 한 달은 아예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기도의 내용도 우리처럼 뭘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없습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그들이 섬기는 알라신을 높이고 이방인들처럼 살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이 정해진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유대교나 아직도 혼란스러운 기독교인으로 살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특히 성직자라고 할 수 있는 교리를 가르치는 교사나 모스크에서 봉사하는 이맘들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실하게 헌신하면서 봉사하면서 산다고 합니다.

 

  그들이 가진 교리를 우리 기독교인들이 보면 참 허접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신데 사랑도 없고 인정도 없는 하나님으로 가르칩니다. 진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엉터리 종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숫자는 매년 늘어난다고 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인 중에서도 모슬렘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실천이 없고 삶이 없는 기독교에 실망한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실천하는 것이 좋아 보여서 그들이 진짜인 것 같아서 그리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슬람교에 비하면 우리 기독교는 그런 철저한 행함이 부족합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 외에 그것도 형식적으로 앉았다 가는 것 외에 성도로서의 헌신적인 삶은 없습니다. 봉사나 헌신의 삶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 것이고 보통 사람은 그냥 교회에 다니기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점점 희미해지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줄어듭니다.

 

  오늘은 특별히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감사해야 하는 본문을 찾아서 특별한 설교를 하고 싶었지만 계속해서 마가복음 강해 설교를 합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를 몰라서 감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행함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 중요한 것이며 감사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대로 주가 쓰시겠다 하라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본문 2-3절에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때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공생애를 마치시는 마지막 주간의 첫날이라고 할 수 있는 일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다음 주 일요일이기 때문에 오늘부터 일주일간은 굉장히 중요한 주간입니다.

 

  그래서 교회력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하고 다음 날부터 고난주간을 지킵니다. 마가복음은 11장에서 16장까지 이 중요한 일주일 동안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중요한 날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뜻밖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중에 두 사람을 부르시고 특별한 일을 시키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면 거기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니까 그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주인이나 사람들이 왜 끌고 가느냐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겠다하고 끌고 오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두 제자가 그 말씀을 따라 맞은편 마을로 갔더니 예수님 말씀대로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끌고 오려고 하니까 주인인듯한 사람이 나귀 새끼는 뭘 하려고 끌고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라고 하자 보내 주었다고 했습니다.

 

1)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두 제자도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나귀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도 주님께서 쓰신다고 하니까 바로 순종했습니다. 나귀 새끼는 짐승이라 사람이 끌고 오면 끌려와야 하지만 아직 훈련도 받지 않았고 낯선 사람이 끌고 가는데도 끌려왔습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여기 주님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물의 주인이시고 특별히 우리를 구원하신 구주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이나 만물들이 다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중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은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더 이상 사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의 종노릇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그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여 여기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은 이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에 쓰임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쓰시고자 하여서 이렇게 좋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천국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구원의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2)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주가 쓰시겠다고 하시면서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하시는 일이 그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귀 그것도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고 하셨을까요? 이왕이면 아주 높은 사람이나 타는 백마나 타시든지 호화로운 마차를 타시든지 하지 않고 초라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려고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같은 사건이 기록된 마태복음 21장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21:4-5)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스가랴서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왕이 임하시는데 그분은 공의를 베푸시는 분이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지만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메시야로서 오시는데 화려하게 임하시지 않고 겸손하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선지자들이 예언하신 그 메시야로 오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에 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나귀 새끼나 타고 오는 사람을 만왕의 왕으로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선지자들의 말씀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분이 메시야심을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모여서 주의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시며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같잖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같은 작은 교회를 보면 작은 교회에 사람들이 하는 일이 뭐 대단한 일일까? 하고 비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외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사람을 구원으로 영생으로 인도하는 엄청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일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실 때 순종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잖은 작은 일이라도 주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이 이 세상의 어떤 엄청난 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본문 9-10절에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두 제자가 나귀 새끼를 끌고 오자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등에 얹어 놓고 예수님을 타시게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겉옷을 펴서 길에다 깔고 또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다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 위에 깔았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가는 사람들과 뒤에서 따라가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찬송을 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하면서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히브리어를 발음 그대로 가져온 단어라고 했습니다그 뜻은 우리가 당신께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입니다. 구약성경 시편 11825절의 말씀에서 가져온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기도이면서 찬송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간절히 바라면서 그 구원의 주님이 오신 것을 높이 찬송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을 호소하며 구원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타락과 구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따라서 살면 참 좋았을 것인데 타락한 인생은 금방 구원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또 하나님을 떠납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이런 죄와 타락에서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그 죄로 인해서 인간답게 살지 못한 죄에서의 구원이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들을 통하여 구원하신 일은 일시적이고 계속 구원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단번에 영원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구원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이 구원을 간절하게 구하고 그 구원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만드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그 나라라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세우실 것이라는 그 나라를 지금 예수님께서 세우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구원자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온 우주 만물에 일어난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임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임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여러분 머릿속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메시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은 최고의 것으로 예수님을 환영하며 최고의 것으로 영광과 감사를 돌리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등에 혹은 나귀가 지나가는 길에 펼치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고 손에 들고 목이 터지라고 함성을 지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크게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목회를 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그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최선을 다해서 구원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가장 귀하고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최고의 교훈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까? 무엇 하려고 교회에 다니십니까? 교회의 핵심은 이 두 가지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어디에 가든지 이 두 가지가 없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서 쓰시겠다라는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런 주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일에 쓰임 받게 해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 구원의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