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12.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35)
본문 : 딤후 4:17-18
제목 :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17.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8.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세상 살아가기가 참 힘드세요? 그럭저럭 살만하세요? 모든 일이 잘되고 늘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세상이 그리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옛날에는 대부분 모든 사람이 어려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인생이 그런 것이려니 하고 살았는데 요즘은 빈부 차이가 크고 또 그런 차이가 너무 잘 보이니까 못사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힘든 삶을 삽니다.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 앞에 서보면 우리는 참 힘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돈의 위력 앞에 서보면 가난한 사람은 참 초라한 삶을 산다는 것을 느낍니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인생의 세월 앞에 서보면 우리 인생은 참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느낍니다.
코로나 19 같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우리 인간이 큰소리를 치며 살지만 참 무기력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인생을 좀 산 사람들이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면 참 험한 고비들을 많이 넘기며 살았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생사의 기로에 서서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슴 치며 통곡하던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인생을 좀 살았다는 사람들은 다 이런저런 어려운 사연이 있었고 그 어려움 앞에 좌절하기도 했지만 참고 견디고 싸워서 이기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사도바울 생애의 마지막 장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회상하면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바울에게 힘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힘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이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기도 제목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말로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내게 하신 말씀이고 다른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하신 말씀이고 정말로 나의 삶에 적용되기를 간절히 믿고 바라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본문 17절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 개정에서는 번역하지 않았지만 헬라어 성경이나 다른 번역에서는 오늘 본문을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바로 앞 절인 16절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와서 재판을 받는데 바울과 함께 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다 바울을 버리고 떠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분 복음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 계셨고 바울에게 힘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바울 한 사람만 남아서 외롭게 재판을 받는 것 같지만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만왕의 왕이시고 최후의 심판을 하실 재판장이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바울에게 힘을 주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재판 때만 주님께서 바울과 함께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 주님은 늘 바울 곁에서 바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심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의 핵심을 알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일평생을 고난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이하에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라고 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늘 그와 함께 계셨고 이길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개인의 힘으로는 이런 고난들을 당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해주시고 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에게만 이런 약속을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예수님께서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재림하시기 이전에 세상에 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은 또 다른 하나님인 성령님께서 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앞에 인용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주셔서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 보혜사는 성령님을 말씀하는 것이고 또 다른 이라는 말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과 똑같은 분 즉 같은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바울 곁에 오셔서 힘을 주신 주님이 성령님이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분도 성령님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 성령님께서 늘 함께하시고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믿음의 길이 힘들고 어렵게 보여도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제가 바라기는 말로만 지식으로만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끼며 사시기 바랍니다. 의지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더 강한 힘을 주시라고 기도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1)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도바울과 함께하시면서 힘을 주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이방인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 이런 힘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로 말미암아”라고 했는데 “나를 통하여”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사도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바울 자신이 바울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선포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거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목회자들은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의 지식이나 자신의 철학으로 설교하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으로 설교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보다는 자신이 깨닫고 연구한 것에 더 중점을 둡니다.
우리가 경험했든지 안 했든지 내가 가진 지식으로 이해가 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깨달았든지 깨닫지 못했든지 복음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정확 무오한 말씀입니다.
“선포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선포된 말씀이란 전파된 말씀이라는 뜻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하신 말씀이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왕이 왕명을 신하를 통하여 백성에게 전달하듯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명을 선포자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전달하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를 선포자라고도 합니다. 설교자들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의 명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설교자들이 복음을 변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변호하고 증명해서 알아듣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증거들을 가지고 이 말씀이 정말로 사실이고 틀림이 없다고 변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설교자들이 설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좀 믿어봐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안 믿으려고 해 믿으면 너무나 좋다고 설득하기도 합니다. 요즘 전도라는 것은 대부분이 이렇게 설득하는 것입니다. 믿어달라고 사정하는 것처럼 비굴하게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는 선포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설교는 선포입니다. 왕명의 전달입니다. 구차하게 변호하고 증명할 필요도 없고 믿어달라고 사정하고 설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별히 이 왕명은 재판을 받으라거나 벌을 준다거나 힘든 일을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 최고의 은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 명을 받고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의로운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너무나 귀한 말씀입니다.
2) “온전히 전파되어”라고 했습니다.
온전하게 전파된다는 것은 완전하게 널리 전파된다는 뜻입니다. 조끔씩 맛보기만 해준다든지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복음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지만 그 복음이 부분적이든지 조금 잘못되었든지 완벽하지 못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욕심이 많은 장사꾼처럼 사기꾼처럼 감추고 속여서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고 거짓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복음에다가 뭘 섞으면 안 됩니다. 복음에 있는 무엇을 빠트려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그대로를 전달해야 합니다. 주시는 하나님도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데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중간에서 이익을 취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3)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과 함께하시면서 힘을 주신 것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선포된 말씀이 온전하게 널리 전파되기를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파된 복음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한곳에 머물러 목회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온 세계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와 같은 일을 했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하여 선포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디모데나 디도 같은 목회자들이 나와서 지역 교회를 담당하고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씨를 뿌리고 아볼로나 디모데 같은 목회자들은 그 복음의 씨가 열매를 맺도록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에게 배운 복음의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잘 자라도록 성경 말씀으로 저들을 양육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일 뿐이고 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믿음 생활 잘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그런 노력만으로는 믿음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성령님께서 그 곁에 오지 않으시고 성령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지 않으시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고백하지 못합니다.
긍정적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전하기만 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셔서 믿음을 가지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이 복음을 우리 주변에서 세상 끝까지 전하면 됩니다. 이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이 듣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17절 마지막 부분에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자의 입은 실지로 기독교인들이 원형경기장에 던져져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형벌을 받지 않았다는 말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아무리 흉악한 죄를 지어도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되게 하는 이런 극형에 처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극형에 처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본문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신 것에 의지한다고 했기 때문에 사자의 입은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바울의 복음전파를 방해했습니다. 그런 방해 공작을 하는 사람들이 사자처럼 달려들어도 주님께서 다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별로 어려움이 없이 교회에 잘 다니고 평생 신앙생활 잘합니다. 그런 사람은 참 복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가족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비교적 평안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잘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은 가정에서 혼자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참 어렵습니다. 가족들의 반대도 있지만 혼자 신앙 생활할 때 사탄의 유혹이 많습니다. 무엇이든지 함께 더불어서 하는 것이 좋은데 혼자서 할 때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초등학생과 중고등학생 전도를 많이 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인이 되도록 계속 신앙생활 하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한 계단 두 계단 올라갈 때마다 낙오자가 생깁니다.
성령님께서 특별하게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신앙생활이 힘듭니다. 주님께서 곁에 서서 그런 유혹들을 이길 힘을 주시라고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곁에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사자의 입은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게 하려고 유혹하는 세력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바로 전하는 일을 방해하는 세력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5장 8-9절에 그 사자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사자를 믿음을 방해하는 대적 마귀라고 했습니다. 그 마귀가 마치 배가 고파서 우는 사자처럼 믿는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가만히 있으면 그래도 쉽게 신앙생활 계속할 수 있겠는데 이 마귀가 믿음이 좀 약한 사람 초신자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마귀는 귀신같이 우리의 약점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약한 것을 공격하거나 유혹을 합니다. 약점을 공격하여 죄를 짓게 만들고 타락하게 만들어서 이 귀한 믿음의 자리에서 떠나게 만듭니다.
돈에 약한 사람은 돈으로 명예에 약한 사람은 명예로 이성에 약한 사람은 이성으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쾌락으로 유혹을 합니다. 마음이 약한 사람은 고난을 당하게 하고 어려움을 당하게 하여 믿음을 버리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선포한 복음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사자의 입에서도 건짐을 받았고 모든 마귀의 권세를 물리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 귀한 믿음을 지키고 살게 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서서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이 귀한 믿음에서 빼앗아가기 위해 우는 사자같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지만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함께하신 그 주님이 우리의 삶에도 함께하실 줄 믿습니다. 이 말씀 붙잡고 기도하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공격에 사탄의 공격에 두려워하지 말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말씀을 의지하고 맡기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