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3.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20)
본문 : 딤후 3:3
제목 :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사람이 마음속에 무엇을 생각하고 사는가가 참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생각대로 행동하게 되고 그런 행동들이 습관이 되고 습관으로 인해서 삶의 목적지가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착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착한 일을 하게 되고 악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악한 일을 하게 되고 결국은 그런 생각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대하는가도 너무 중요합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기초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고 하고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보고 성경을 보는 눈을 신학이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신학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이 여러 가지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는 특별히 우리 고신은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가진 교수들에 의해서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거기서 개혁주의의 신학을 배운 목사들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교단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개혁주의 신학 사상으로 하나님을 보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개혁주의 신학이란 무엇일까요?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핵심은 구원에 관한 교리를 말할 때 다른 신학과 아주 다른 특별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이 타락했을 때 그들의 주장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을 행하고 고행을 해서 하나님께 그 의를 인정받아야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개혁자 루터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도원에서 고행을 하면서 율법을 지켜서 의로운 사람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의로운 사람이 되지를 못합니다. 피나는 노력으로 조금은 선하게 되고 조금은 의로운 사람이 된 것 같지만 결국에는 또 죄를 짓는 일이 생기고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보고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의로 여기시는가 하는 의의 기준이 들어 있습니다. 그 의의 기준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인이 되고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산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고 더 깊은 뜻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한 마디로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로마 가톨릭의 엉터리 교리를 개혁해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사람아 되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부터 말세지말이 되면 세상 사람들이 가지게 될 악행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행함에 관한 이런 말씀을 대할 때 개혁주의 신학의 눈으로 보는가, 로마 가톨릭의 눈으로 보는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 신학으로 본문을 보면 무정하게 행하면 안 된다. 원통함을 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살면 죄를 짓는 것이고 벌을 받고 지옥에 간다. 그러니 똑바로 살라고 하면 됩니다.
루터나 칼빈 같은 개혁주의자들의 눈으로 보면 보아라 세상이 참 악하다. 세상 사람들만 악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도 그런 악한 것이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런 것을 다 행함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로운 사람이 되게 하고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게 됩니다.
오늘은 19가지 악행 중에서 본문을 중심으로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오늘 본문 말씀 중에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무정하게 살다가 보니까 서로 원통한 일이 생기고 그 원통함을 풀지 않으니까 모함을 해서 자신에게 원통하게 한 사람에게 복수를 한다는 것입니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 사람들이 하는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악한 일들이 말세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면 점점 더해질 것이며 이런 악행을 보면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악한 마음이 있음을 알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고 믿음을 더욱 굳게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세상 사람들의 이런 악행에 동참하지 말고 거기서 돌아서서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 무정하며
무정이란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사랑의 감정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은 아웃과 더불어 정답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서로 나누어 먹고 좋은 것이 있으면 서로 나누고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같이 슬퍼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해도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정답게 살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서로 도와가면서 오늘은 우리 집 일 함께하고 내일은 다른 집 일 함께하면서 정답게 살았습니다. 애경사가 있어도 온 동네 사람들이 자기 집 일처럼 함께 도우면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정답게 살았습니다.
요즘은 서울이나 시골이나 다 무정하게 삽니다. 서울에 출세하러 온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 옛날 정답던 고향을 찾아서 귀농이나 귀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시골도 옛날 그 정답던 모습은 없어졌다고 합니다. 서로 경계하고 돈 없는 사람이 오면 무시하고 부자가 오면 이상한 눈으로 보기 때문에 무정한 세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런 무정한 세상에 많이 물들어 있습니다. 무정한 세상을 살다가 보니까 우리 자신도 무정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서로 형제자매로 살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특별한 사이이지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세상 사람들처럼 무정하게 삽니다.
저의 목회는 나누어주는 목회였습니다. 아동센터나 청소년 공부방을 통하여 청소년들을 잘 되게 해주려고 노력했고 무료 급식소를 통하여 어르신들에게 사랑을 나누려고 했고 바자회도 후원금을 거두는 것보다 좋은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 더 큰 목표였습니다.
저의 설교도 성도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알려주려는 설교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알려주고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는 길을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손해인 줄 알면서도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복음만을 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30여 년의 목회 기간 제 개인의 이익을 챙긴 것도 별로 없습니다. 물론 잘 먹고 살고 어려움 없이 잘 지내기는 했지만, 이권 개입을 하거나 그래서 재산을 모은 일도 없고 노후를 대비해서 집을 사거나 저금을 해 둔 것도 없습니다.
그런 삶을 산 것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좀 쓸쓸한 생각도 듭니다. 제가 나누려고 한 만큼 사람들이 저에게 정답게 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사는지 왜 그렇게 사는지 관심조차도 없는 것 같아서 참 무정한 세상을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가끔 듭니다.
세상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남에게는 자연적으로 무정합니다. 세상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돈 생기는 일이라면 남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무정하게 자기 이익만 챙깁니다. 세상은 부모를 거역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에나 형제지간에도 무정하고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정마저도 없이 냉정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우리는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은 무정하고 냉정하지만 그러나 너희는 정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남을 배려하고 좋은 것을 나누고 도와줄 줄 아는 정다운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무정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살다가 보면 그런 무정한 사람들에게 원한이 많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려울 때 잘 사는 네가 조금만 도와주고 손을 잡아 줬으면 나도 잘살 수 있었는데 냉정하게 뿌리친 것 때문에 평생 고생하면서 산다는 원한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래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정이 많은 만큼 한도 많은 사람입니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라는 노래가 있는데 그렇게 정을 주고 사랑하던 사람이 무정하게 야속하게 떠나버리는 것이 가슴에 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원통한 일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래서 평생 그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려서 부모에게 학대를 받은 사람, 친구들에게 폭행을 당한 사람, 남에게 사기를 당한 사람, 남에게 배반을 당한 사람,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배반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쭙잖게 들은 말 한마디가 평생에 상처가 되어 가슴에 남습니다. 저는 그런 상처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참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봅니다.
원통한 일이 있더라도 털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가슴에 담고 있어봤자 나만 손해입니다. 나 자신만 더 고통을 당하고 아무런 이익이 없습니다.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하고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3) 모함하며
무정의 극치는 모함하는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있는 것처럼 꾸미고 아주 작은 일을 엄청난 일로 꾸며서 나에게 원통하게 한 사람에게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최고의 계명을 주신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인데 그런 사랑을 행하지 않고 무정하게 사는 것도 큰 죄라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은 무정하면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지 않는다고 원통하게 생각하며 그 원한을 풀지 않는 것이 더 큰 죄입니다. 사랑하기는커녕 사랑해야 할 사람을 미워하고 모함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는 것은 더 큰 죄일 것입니다.
일부로 모함을 하지는 않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함을 하는 경우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말을 옳길 때 좋은 말은 다 빼버리고 중간에 잠깐 한 나쁜 말을 확대시켜서 옮기는 것 또한 모함하는 것이 됩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불필요하게 남의 말을 옮기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왕 옮기려면 좋은 말만 옮기고 그 사람이 들어서 오해하지 않는 말만 옮기시면 됩니다. 나쁜 말은 옮기지 않기, 좋은 말은 더 강조해서 옮기기, 이런 각오를 하고 사시면 좀 더 정다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3절 말씀 후반에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사나운 것과 연결되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악한 일들은 그 족보가 사탄의 유혹으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에 결국은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1) 절제하지 못하며
참을성이 없고 자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는 죄악 된 것들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나마 이 정도로 사는 것은 그 악한 본능을 참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악한 마음에서 선한 마음을 가지고 살게 하는 것은 참고 절제하는 능력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지금 하나님을 떠나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하면 그동안 참았던 것을 모두 버리고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다면 정말로 엉망으로 살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참는 것을 싫어합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립니다. 참지 않고 마음대로 할 때 기분이 좋은 것 같고 잘 사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참는 것이 우리 삶에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뭐든지 참고 절제할 줄 아는 것이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먹는 것도 좀 절제하고 먹을 줄 알면 건강해집니다. 말하는 것도 하고 싶은 말 좀 참으면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돈을 쓰는 것도 절약하면서 살 줄 알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2) 사나우며
사납다는 것은 난폭한 것을 말합니다. 성격이 포악하여서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래도 교회 안에 살고 신앙이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살기 때문에 비교적 순한 사람을 만나고 삽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너무나 사나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납게 보이려고 일부러 문신을 하고 남이 나를 깔보지 못하게 하고 덤비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나운 모습으로 사는 사람은 더 사나운 사람을 만납니다. 주먹으로 안 되면 몽둥이를 들고 싸우고 몽둥이로 나가면 칼을 들고 오고 그러면 총을 들고 나갑니다.
그런 사람들을 피하고 만나지 않도록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납게 하고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것보다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순한 사람들과 만나고 순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3) 선한 것을 싫어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을 하려고 힘쓰지도 않고 선과 악을 분별해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잠언에서 선한 일이란 “공의와 정의와 정직”(잠 2:9)이라고 했습니다.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사는 것을 선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선한 일을 싫어하고 정직하게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선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선한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선하고 하나님의 뜻이 선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이 선하고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선한 방법이었습니다.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는 그 선하신 분이 선하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앞서 배운 디모데전서 6장에 배운 대로 우선은 악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것이 선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배우고 있는 세상의 악한 일 19가지를 따르지 않는 것이 선한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있어서 최선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도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 6:12)라고 했습니다.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믿음을 따라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일이고 최선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말세지말이 되면 점점 더 악해지는 세상 사람들의 죄악 몇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는 것이 악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악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가까움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죄악들이 있음을 알고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런 악을 행하지 않을 수도 없기에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면 멸망할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소중한 일이며 이런 악한 사람들에게서 돌아서는 것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