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6. 27.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24)
본문 : 딤후 3:8-9
제목 :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8.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9.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인도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저의 인생길을 설계하셔서 그 설계도대로 살게 하심을 믿습니다. 저의 육신과 정신세계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저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살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왕에 나의 인생길을 설계하시려고 하셨다면 처음부터 꽃길만 걷도록 설계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구원도 받고 세상 복도 받아서 돈도 마음껏 쓰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하고 큰소리치면서 떵떵거리면서 살도록 설계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셔서 나를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으면 고생 없이 행복하게 살게 해주시면 참 좋았을 텐데 왜 이런 고생길을 함께 주셨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신가요. 권력이 없으신가요. 돈이 없으신가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수 있으신 분인데 말입니다.
다만 한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나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고 그것을 잘 간직하고 그것을 빛나게 하시기 위해서 약간의 어려움을 주신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엄청난 능력과 가치를 가진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완벽하게 간직하고 지키고 빛나게 하기 위해서 그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삶도 어쩔 수 없이 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로 잘살면 신앙생활도 더 잘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도 각자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고난이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과정을 보아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엄청난 일을 하시는데 누가 감히 방해를 합니까? 방해하려는 세력이 있으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고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면 될 일을 왜 그렇게 어렵게 진행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세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라는 사람이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가 오늘 설교 주제이고 제목은 좀 줄여서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로 정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너무나 소중한 것인데 그 믿음을 통한 구원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데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데도 방해하는 세력이 있지만 그런 방해를 알고 그들의 유혹을 이길 때 우리의 믿음이 더 굳건한 믿음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본문 8절에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라고 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라는 이름이 본문 외에 다른 성경에는 기록이 없습니다. 모세가 활동할 당시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모세를 대적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얀네와 얌브레라는 사람이 모세를 대적했다는 것으로 보아서 모세 시대에 활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이외의 여러 문헌에서는 이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서 구약성경과 유대인의 전통을 잘 배워서 아는 바울은 그가 누구인지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가진 문헌이나 전통에 의하면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의 시대에 모세가 하는 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신 구원의 길을 방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셔서 그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셔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애굽의 바로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보내 달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자신은 말을 잘할 줄 몰라서 못가겠다고 하니까 말을 잘하는 그의 형 아론과 함께 가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강퍅한 바로가 뭐가 아쉬워서 뭐가 안타까워서 그들을 내보내 주겠습니까? 지금 종으로 잘 부려먹고 있는데 그 좋은 일꾼들을 내보내서 손해 볼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절대로 내보내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을 보이시고 재앙을 내리셔서 어쩔 수 없이 내보내도록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기적을 베풀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애굽의 요술사들이 등장해서 몇 가지 이적을 흉내 내고 따라 했습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게 하는 것도 따라 했고 물이 피가 되게 하는 첫 번째 재앙과 두 번째 개구리 재앙까지 그대로 따라 해서 바로가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재앙인 티끌이 이가 되게 하는 재앙은 따라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기적을 따라 하려고 했던 요술사 중에 대표적인 두 사람이 얀네와 얌브레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때뿐만 아니라 모세가 가는 길을 계속 따라가면서 모세의 하는 일을 방해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으로 따라나선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애굽에서 다른 이유로 종살이를 했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서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 끼어서 따라 나왔습니다.
얀네와 암브레도 거기 섞여서 따라 나왔다고 합니다. 애굽의 정책에 불만이 있어서 왔다기보다는 모세가 가는 길을 방해하기 위해서 따라 나왔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갈 때 때로는 마실 물도 없는 곳을 지났고 먹을 것도 늘 같은 만나만 먹게 되어서 고기나 채소도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불만을 가졌습니다.
모세에게 왜 우리를 광야로 나오게 해서 먹을 것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셔서 죽게 하느냐 애굽이 그립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을 부추겨서 모세에게 반항을 하게 한 주도자가 얀네와 얌브레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시간이 좀 걸리자 산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한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그 주동자도 얀네와 얌브레라고 생각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 라는 이름의 뜻도 의미가 있습니다. 얀네는 아람어로 '유혹하는 자'라는 뜻이고 얌브레는 '반란을 일으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얀네와 얌브레는 그 이름보다는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이 애굽에 와서 잘살아보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애굽 사람의 종이 되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서 자유롭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은 엄청난 길이요 영광스러운 길이었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길을 가는데 이런 방해세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왕 노릇을 하는 애굽의 세력이 방해를 했고 그 명령을 받은 애굽의 군대가 그들을 방해했고 그들의 사주를 받은 얀네와 얌브레 같은 사람이 그 길을 방해했습니다.
그 방해세력들 때문에 그들과 같이 원망하고 불평하고 다시 우상을 섬기려고 했던 대다수의 기성 유대인들이 다 광야에서 죽임을 당하고 훈련을 잘 받은 젊은이들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세 시대에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했던 것처럼 바울 시대에도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란 그동안 반복해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그 말씀의 핵심인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체를 방해하고 복음을 전한 후에 복음을 변질시키고 다른 복음을 따르게 함으로 복음을 대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는 복음을 통한 구원의 길도 방해하는 세력이 많습니다. 불신의 세상이 죄의 종이 된 악한 사람들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얀네와 얌브레와 같이 위장하고 교회에 들어온 이단이나 거짓 선생들이 우리가 가는 길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세력들을 그대로 두고 우리가 힘들게 구원의 길을 가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런 시험을 통해 가라지를 걸러내고 알곡이 더 탐스럽게 자라서 그 믿음이 정금 같이 빛나게 하고 신앙인으로서 강하게 우뚝 세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정금 같이 단련되고 빛나는 신앙을 가진 참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대강 적당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많고 그 길은 쉽지만 진정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십자가를 붙잡고 그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지는 일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시련이 없이는 그런 시험들을 이겨낸 경험들이 없이는 참된 믿음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시련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진리를 바르게 알고 바른 믿음을 고백하고 진짜 신앙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인인 척하고 교회에 다닐 수는 있겠지만 진실하게 믿음을 고백하고 믿음을 따라 사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이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서보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 고통 그 괴로움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보시면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응원해주신 우리 하나님이 계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본문 8절 하반절에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라고 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과 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은 그 마음 자체가 부패한 사람이고 믿음에 관하여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한 자요”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부패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했고 그들의 신앙고백이 이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한 고백이 아니라 거짓된 고백 위장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그런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교회의 핵심인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의 핵심인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의 핵심인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해야 할 목회자들까지 이 구 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복음이 아닌 다른 것을 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아직 부패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쾌락을 위한 세상의 부귀영화를 위한 욕심이 그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하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복음을 따르지 못합니다.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버림받았다는 말은 거절당했거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유기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을 우리 인간 편에서 믿거나 믿지 않거나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때만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믿음을 고백한다고 다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그럴듯하게 믿음을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시니까 진실한 신앙고백을 할 수 없고 그의 고백은 결국 가짜이거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들어온 이단이나 거짓 선생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고 마음에 세상 욕심이 가득한 부패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오히려 진리를 대적하고 복음을 거절하는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떠난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바른 판단을 해서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그것도 작은 일에 외면을 당하고 버림을 받는 것도 서글픈 일인데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 엄청난 일에 거절을 당하고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인생 최대의 비극이고 비참한 일입니다.
그러고도 그렇게 비참한 일을 당하고도 교회에 안 다니니까 평안하고 좋다. 마음대로 살아도 되니까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좋은 일입니까? 거절당하고 버림받은 비참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것도 모르고 좋아합니까?
자유인이 됐다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독한 사탄의 종 죄의 종 죽음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인으로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거절당하지 않고 특별히 구원받는 일에 선택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 믿음을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
본문 9절에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라고 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할 때 일시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몇 번의 기적은 따라 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속임수를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때도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가진 로마 당국이나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일시적으로 그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박해할수록 기독교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이나 거짓 선생들이 복음을 거부하게 하고 거짓 복음으로 교회를 어지럽혔지만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거짓은 금방 탄로가 나기 마련이고 진리는 결국 알려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신자들 가라지들은 거두어갈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데려갈 수 없습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능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핵심인 복음을 거부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머리가 좋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합니다. 성경을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고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 활용합니다. 그것은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참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일입니다. 복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그 짧은 세상에서 그 작은 행복을 위해서 외면하다니요.
여러분이 저를 만나서 행복하다고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만난 사람들이 저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삶의 목적이고 목회의 목적입니다.
무엇 때문에 저를 만나 행복하십니까? 제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 배경이 있습니까? 능력이 있습니까?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엄청난 비밀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고 진리를 옳게 분별하여 복음을 전하는 저에게서 이 복음을 잘 배워서 바른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최고의 행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얀네와 얌브레와 같은 사람들이 진리를 대적하며 우리가 가는 이 구원의 길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패한 사람이요 어리석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가는 이 구원의 길 복음의 길 믿음의 길이 최고의 길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고 구원의 길에 선택을 받아서 어려움을 이기고 이 길을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