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6.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딤후37)
본문 : 딤후 4:19-22
제목 :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19.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20.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 21.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22.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믿음만 있으면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이 모든 성경의 약속이고 특별히 바울서신을 통해서 우리가 셀 수도 없이 많이 살펴본 바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믿음이 있는가를 어떻게 아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눈에 보아서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선택한 사람만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누가 믿는 사람이고 누가 믿는 척만 하는 사람인지를 바로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분별하기가 어려운 것이 믿음입니다. 교회에만 열심히 나오면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교회에는 잘 오지 않아도 그 마음속에 진실한 믿음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그냥 짐작만 할 뿐이지 확실하게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심성도 좀 비교적 착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도 바르게 살고 또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나누어줄 줄 알고 좋은 일을 하려고 애를 쓰고 세상에서 복도 받아서 성공하고 잘 살면 신앙이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우리가 일반종교에 얼마나 세뇌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불교나 유교나 무속신앙이나 세상의 모든 종교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똑바로 살고 선한 일 많이 하고 세상에서 복 받아서 잘살고 출세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점입니다.
우리 기독교에 이런 것들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착하게 살고 선한 일들을 많이 하고 복도 받아서 세상에서도 출세하고 잘살고 하는 것도 성경에 있는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믿음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사는 것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사는 것이 핵심이 아닐뿐더러 잘못하면 이런 것들이 바른 믿음을 빼앗아가 버리는 악한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믿음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흉악한 죄인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흉악한 죄인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데서 믿음이 시작됩니다.
인간의 그 알량한 선행이나 좀 성공한 것이나 좀 잘사는 것이 하나님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사람이고 선한 일보다 오히려 악을 행하면서 사는 삶이 우리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런 악한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도 가지게 되고 구원도 받게 되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디모데후서 마지막 시간입니다. 디모데후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끝납니다. 서신 첫 부분에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후1:2)라고 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디모데후서의 맨 끝에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인사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한 마지막 인사가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우리가 힘쓰고 노력해도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영원한 천국에 능히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문안하라
본문 19~20절에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들어서 밀레도에 두었노니”라고 했습니다.
“문안하다”라는 말은 안부를 묻는다는 뜻입니다. 잘 있는지 건강하게 사는지 살펴보고 인사하라는 말입니다. 본문에서의 문안은 단순한 인사라고 하기보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늘 잊지 않고 그리워하고 있음을 전달하라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도와주고 그와 함께 하는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죽음을 앞두고 그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안부를 묻고 싶은 사람 중에 늘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이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바울이 잊을 수 없도록 바울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도왔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가는 아굴라의 아내입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보통은 남편의 이름을 먼저 부르고 그다음에 아내의 이름을 부르지만 브리스가는 주로 남편보다 이름을 먼저 부릅니다. 여자인 브리스가를 먼저 부른 것은 그녀가 남편보다 주님의 일에 더 적극적이었고 더 중요한 직책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습니다. 아굴라는 원래 유대인이었는데 그의 부모님이 소아시아지방에 있는 본도라는 곳에 와서 살다가 낳은 아들이 아굴라입니다.
아굴라는 큰 꿈을 품고 당시 최고의 도시였던 로마로 올라가서 로마에서 잘살고 있는 가정의 딸인 브리스가를 만났습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아굴라는 가죽을 잘 다루는 기술자였고 브리스가는 돈이 많은 집의 딸이라서 같이 가죽으로 천막을 만드는 사업을 같이하다가 부부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마에서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추방을 당하게 되었는데 브리스가는 로마 시민권을 가졌으면서도 남편을 따라 로마를 떠나서 고린도라는 곳에 가서 거기서 천막을 만드는 사업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마침 고린도로 오게 되었고 사도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자신들과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게 해주었고 바울을 도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마감하면서 그들의 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16:3-4) 사도바울을 위해서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놓는 사람이었고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 16:19)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은 교회당으로 제공되었습니다.
또 이들 부부는 아볼로라는 사람에게 복음을 자세히 가르쳤다고 했습니다.(행18:24-26 참조)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언변도 좋고 성경도 능통한 사람이었고 회당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자세히 가르쳤지만 하나님의 도 즉 복음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 아볼로에게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사도바울에게 배운 복음을 정확하게 풀어서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바울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그들을 칭찬하고 그들을 그리워하면 살았습니다.
세상에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사람들을 미리 준비해 두셨고 그 사명을 받은 사람들을 그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게 하셨습니다.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사도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여러 번 위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바울이 붙잡혀서 로마 감옥에 있을 때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바울을 찾아와 만났다고 했습니다.
에라스도와 드로비모도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도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평생 잊을 수 없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을 도와준 사람입니다.
드로비모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였는데 사도바울과 선교여행 중에 병으로 인하여 밀레도에 두고 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복음을 전하러 다니다가 병든 사람을 왜 거기에 두고 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도바울이 한참 때는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을 가졌고 그가 쓰던 앞치마나 손수건만 만져도 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울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힘을 다하다가 병까지 얻은 사람을 고쳐주지 않고 그냥 두고 왔을까요?
복음전파는 이 세상에서의 어떤 이익을 위함이 아님을 알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한 것이지 믿는 사람들에게 늘 일어나는 일이 아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하고 순교까지 마다하지 않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다고 해도 병이 든다고 해도 여한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흔히 성도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기적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일에 동반합니다. 이 땅의 삶은 수고하고 땀 흘린 대로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이 적용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수고와 노력이 헛되지 않게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그런 바울이 병든 드로비모를 두고 그냥 떠나온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마음이 아팠을 것이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을 버리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문안하느니라
본문 21절에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로마에 있지 않고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문안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디모데에게 문안 인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는 오늘 본문에만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이라서 그들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그들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바울이 붙잡혀 감옥에 갇히자 많은 사람이 바울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위험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었고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믿음도 버리고 바울도 버리고 세상으로 떠난 사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험한 로마에 있으면서 믿음을 지키며 사는 사람도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끝까지 바울 곁에 남아서 도와주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비록 복음전파를 위해서 특별하게 한 일이 없지만 어려운 시기에 믿음을 버리지 않고 믿음을 지킨 것만 가지고도 칭찬받을만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세상의 모든 성도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이 험하다고 다 믿음을 버린 것이 아닙니다. 붙잡혀서 감옥에 가고 끔찍한 사형을 당한다고 다 믿음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믿음을 귀한 것으로 여기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성도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그런 모습입니다. 바울이나 바울 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우리는 믿음을 위해서 한 일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있고 헌금 좀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같이 이기주의자들이 많고 욕심이 많고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8)라고 하신 것처럼 정말로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없다는 말세지말의 세상에서 이런 믿음을 그것도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본문 22절에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육신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우리의 육신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 생령을 영혼이라고도 하고 오늘 본문에서처럼 심령이라고도 합니다. 이 생령 즉 영혼은 짐승들에게는 없는 것이고 우리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것입니다. 이 영혼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주도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시는 것이 우리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영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육신에 역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육신이 잘 되고 육신이 복을 받고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에 역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에 역사하셔서 진실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 있어야 영원한 생명도 살아 있는 생명이 됩니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은혜란 값없이 대가 없이 거저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라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행적을 기억하면서 그들에게 안부를 전하라고 당부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도록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마지막 인사말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인간의 모든 행동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소중한 것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그것 자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임을 강조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비록 미약하지만 교회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가 우리 인간의 공로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거나 바르지 않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잘될 때는 자신의 공로로 생각하고 어쩌다가 어려움을 만나면 불이익을 당하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거나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늘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도록 기도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을 마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가 항상 임하도록 기도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