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사야 43장 1~3절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 이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입은 은혜를 저버리고 베풀어준 덕을 잊는다는 뜻으로, 은혜를 잊고 배신하는 태도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사자성어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의 표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고, 그 은혜를 갚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은혜를 쉽게 잊어버릴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내가 잘나서 된 줄 압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된 줄 압니다. 그러니 내가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내가 알고,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은혜가 있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는 보통 내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을 때, “우연(偶然)”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인과관계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가 예상한 일이 일어나면 “당연(當然)”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전제를 생각할 때, 과연 “우연”이라는 표현이나 “당연”이라는 표현이 합당할까요? 우리는 이 단어들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는 것을 다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를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표현을 너무나도 쉽게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2026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모든 시간과 우리가 걸어온 모든 길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고백합니다. 분명 우리가 살아온 지난 시간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당연히 이루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분명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그 모든 시간과 모든 역사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사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게 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약속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남왕국 유다도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롭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남왕국 유다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루실 그 모든 역사에 있어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그 약속을 성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가 성취된 때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나를 위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고, 바로 믿어야 하고, 바로 고백해야 하고, 우리의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연한 것도 아닙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철저하게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내 공로로 가로채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또한 내가 마땅히 누릴 것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은혜라고 고백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 나의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야곱이나 이스라엘은 결코 긍정적인 호칭이 아닙니다. 먼저 “야곱”은 ‘발꿈치를 잡은 자, 속이는 자, 빼앗는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허물과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을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언약의 계승자로 삼으시고,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개명시키시고 불러주신 이름입니다. 하지만 역사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그리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이름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끝까지 붙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야곱을 향하여, 이스라엘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당시의 이스라엘은 참으로 암울했습니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함이 덮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 이 난국을 극복해 나갈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본문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창조하였고,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 따라서 너는 내 것이다.”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이 말씀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나 만이 너의 주인이고, 나 만이 너의 전부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온 우주 만물과 나를 창조하신 분, 나를 존재하게 하신 분이 나의 주인입니다. 저 죄악으로 관영하고 혼탁한 세상 속에서 구속하여 낸 분이 나의 주인입니다.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나 한 사람을 주목하시고, 나를 부르신 분이 나의 주인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께서 나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것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반기를 들 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 말씀은 단지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신적인 선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언은 그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본문 3절에서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며, 당신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천지를 창조하시는 절대적이고도 무한한 권능을 지신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가 그분과 얼마나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들과는 완벽하게 구별되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우상들은 사람이 만들어냈고, 생명이 없는 헛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생명의 주인이시며, 자기 백성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은 이 땅의 그 어떤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들과는 완전하게 구별되시는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는 과거의 구원자만이 아닙니다. 이 구원자는 현재와 미래를 아우르는 구원자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애굽을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대신해서 주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지금의 이 위기에서도 구원하시는 분이시며, 장차 바벨론으로부터도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이 바로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나를 부르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를 반대로 이야기하면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토록 고귀한 존재가 되었지만, 그 과정이나 결과에서 내가 내세울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Ⅱ.나의 발걸음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2절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부르신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약속을 보면서 결과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결과에 앞서 하나님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겠다고 하셨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앞길이 장미를 뿌려놓은 탄탄대로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신다고 해서 우리의 앞에는 장애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가는 길에는 물도 있습니다. 강도 있습니다. 심지어 불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물 가운데로 걸어가야 합니다. 강도 건너야 합니다. 심지어 불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불 가운데를 지나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물, 강, 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만났던 일들을 가리킵니다. 즉 물은 홍해의 물이요, 강은 요단강이요, 불은 광야의 길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두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아주 혹독한 고난의 길입니다. 비록 저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어가는 동안 저들은 매우 힘들고 어렵고 두려운 시간을 지났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물과 강과 불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가장 귀한 말씀은 바로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도 홍해와 같은 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시는 길에도 요단강과 같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여정이 불과 같은 광야의 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 길이 험하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걸어갈 수 있습니다.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불같은 광야도 만나를 먹으며 반석에서 나는 물을 마시며 걸을 수 있었습니다. 언덕에 넘실거리는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널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 어떤 어려움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이스라엘의 여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그 은혜 안에서 저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이 아무리 힘든 길을 자기 발로 걸었고, 힘든 싸움을 하기도 했지만, 그 모든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길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주셨고, 오늘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는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있습니까? 한순간이라도 내 공로를 내세울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52주 주일을 지키고 예배당에 와서 예배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까? 사고가 나고,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직장에 어려운 일이 생기고, 우리가 생각하면 우리가 주일을 지키지 못할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형편 속에서도 우리가 주일을 지켰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또한 우리가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재물을 사용할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계산해 보면 내 수입으로 내가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소득에서 먼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러고도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나에게 말씀하셨고, 내가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아니 사람이 없습니까? 나보다 나은 사람이 없어서, 나보다 잘 감당할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맡기셨습니까? 나보다 시간이 많고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이 없어서 나에게 맡기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나보다 훨씬 합당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택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나에게 이 모든 일들을 맡기시고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사실 우리가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드리고, 맡은 자리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 앞에서 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지켰다고 내가 예수님 앞에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내가 있을까요? 우리가 그 모든 일들을 감당하고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라는 것이요(눅17:10),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 여러분!

 

오늘 2026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한 우리의 고백은 오직 하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아도 우연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당연한 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지나왔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셨고,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고백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이 고백으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와 찬양과 감사에 더욱 큰 은혜로 함께하실 것입니다.

 

 

우리 광성의 성도들은 우리 삶의 전체를 통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