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징계

 

 

히브리서 12장 4~13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성도 여러분! 사도는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을 소개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도전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12장에 들어서면서 성도를 경주자로 묘사했습니다. 이는 성도라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 끝까지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와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 것처럼 느껴집니다. 앞부분에서는 흔들리는 성도들을 붙들어주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을 격려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징계(懲戒;παιδεία)”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의 징계는 어떤 잘못에 대한 징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훈육(訓育)”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적절한 처신과 행동의 규칙에 따라 누군가를 훈련, 교육하는 일’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징계의 목적은 바르게 세우는데 있는 것입니다. 즉 이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분명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 어려움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내용과 본 서신의 수신자들이 맞이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저 성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문 4~5절에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는 저들에게서 발견되는 두 가지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저들이 신앙의 경주를 대충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피 흘리기까지는”이라는 표현은 ‘피를 흘리고 죽기까지는’이라는 의미입니다. 저들은 분명 죄와 싸우기는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영적 무기력의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들에게 다가온 환난이나 어려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훨씬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흔들리고 있고, 심지어 도망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저들이 하나님이 마치 아들들에게 권면하는 것처럼 주신 말씀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저들을 종이 아닌 아들로 대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땅히 아들의 자리를 지키고 아들의 모습을 갖추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그 작은 환난 앞에서 그 말씀을 잊어버리고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을 향해 사도는 5절에서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라고 권면합니다. 즉 성도들이 지금 맞이하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징계를 받는 성도들은 그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징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징계로 인해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멸망으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지언정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징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실까요? 그 징계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 시간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징계』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Ⅰ. 하나님의 자녀 됨의 증거입니다.

 

본문 6~7절에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표현은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아들의 성경에 대해서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는 “그 사랑하시는 자”요, 다른 하나는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자는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를 사랑하시는데, 그들이 멸망하는 악으로 빠지지 않도록 징계라고 하는 과정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흔들리거나 곁길로 가려고 하는 성도들을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랑하는 자녀가 그릇된 길로 가고 있음에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 부모라면 그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에 빠지거나 불의한 일에 가담하고 있음에도 하나님이 전혀 우리를 상관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두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에서는 “(징계가)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자녀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자녀 삼기 위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내버려두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징계를 통해서라도, 때로는 채찍질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구나”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징계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사실 채찍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하지만 그 채찍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견디기 힘든 징계일지라도 인내해야 합니다. 마치 군인이 훈련이 힘들다고 그 훈련을 거부한다면 싸움에 나갈 용사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징계가 힘들다고 원망하고 거부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의 길을 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힘든 길에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징계이든, 훈육이든, 아니면 연단이든,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나를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시기 위한 과정입니다. 마치 욥이 그토록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고백하며 인내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선진들이 그렇게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진들이 믿음의 영웅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Ⅱ.우리의 거룩함을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는 구체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9절을 보면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본문에서 육신의 아버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가져와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즉 육신의 아버지도 우리를 징계합니다. 이는 우리가 바른길을 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식이 못된 길로 가도록 징계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아버지가 있다면 그 아버지는 아버지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할지라도 그 아버지를 공경합니다.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고 해서 그 아버지를 버리거나 무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징계 또는 훈육의 의미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우리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징계를 우리가 받는다면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분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어 자녀가 된 우리의 영적인 건강과 성숙을 위해서 때때로 징계라고 하는 수단을 종종 사용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셔서 이러한 징계가 임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성령의 강동하심을 따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축복하기도 했습니다(요삼1:2).

 

또한 본문 10절에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그들”은 육신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들이 자녀를 징계할 때는 분명 자녀들의 유익을 위해서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것과 관계없이 개인의 감정이나 생각에 따라 징계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즉 육신의 아버지가 행하는 징계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를 공경하고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는 언제나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에 당하는 고난은 결국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이요, 연단의 과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유익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관련된 말씀으로 데살로니가전서 4장 7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영원히 동참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 부정한 것으로부터, 모든 죄악으로부터, 모든 생명이 없는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구별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훈육)하심으로 우리를 연단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훈육)를 받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 징계(훈육)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마치 욥이 그 고난 중에서도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라고 고백했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욥23:10).

 

 

Ⅲ.의와 평강의 열매를 위함입니다.

 

본문 11절에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징계를 받는 것은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이라면 이것이 보통의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이 징계를 반가워하고 기쁘게 생각하겠습니까? 마땅히 슬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머물지 말고, 잠시 머물러서 더 깊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믿음의 감각으로 느껴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는 현상에서 멈추지 않고, 육신의 몸으로 느끼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과 느끼는 것 너머에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징계는 아름다운 연단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단을 통해서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그 연단을 통해서 우리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와 평강의 열매”는 본래 “의라고 하는 평강의 열매”입니다. 여기의 “의”는 칭의가 아니라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마쳤을 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완전한 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의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딤후4:8). 즉 성도가 궁극적으로 이르게 되는 완전한 구원의 상태입니다. 또한 “평강”은 피가 말리는 경쟁을 끝낸 선수가 누리는 휴식을 의미합니다. 즉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승리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완전한 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의 “맺는다(ἀποδίδωμι)”라는 표현은 ‘되돌려 주다, 빚을 갚다’라는 뜻입니다. 즉 마땅히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을 되돌려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징계를 통해서 연단을 받은 자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열매를 준비해 놓으셨고, 그 열매를 주시기 위해서 징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의 마지막은 언제나 아름답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기 자녀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셨고, 반드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징계(훈육)는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 곧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 징계의 과정을 믿음으로 승리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다가오는 그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광성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잘못이나 죄로 말미암아 겪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때로는 나의 잘못이나 죄와는 상관이 없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취해야 하는 자세가 바로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이기에 이러한 어려움이 찾아왔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다듬어 가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크게 사용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 때때로 징계라고 하는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머물면 안 됩니다. 본문 12~13절에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성도의 길은 혼자만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이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들이 연약한 상태에 빠져 있다면 힘을 북돋아야 합니다. 쓰러진 자가 있다면 일으켜 세워주어야 합니다. 저들의 길을 인도해서 바른길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경주를 완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원하기는 우리 광성의 모든 성도들은 언제나 믿음 안에서 환경을 바라보고, 극복하고, 승리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인정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