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28.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종전4)
본문 : 벧전 4:7-10
제목 : 산 소망을 가진 성도의 삶.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의 소망이요 산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소망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희망이라는 말과 그리고 조금은 다르지만 욕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희망(希望)이란 “바랄 희”자와 “바랄 망”자를 써서 바라다 동경하다. 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욕망(慾望)이란 “욕심 욕”자와 “바랄 망”자를 써서 욕심을 내서 바라는 것 탐을 내서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소망(所望)이란 말은 “바 소”자와 “바랄 망”자를 써서 바라는 바, 바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소”자에는 “장소, 처소”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바라는 장소 바라는 처소라고 해석을 하면 우리가 바라보고 사는 영원한 처소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문이 의미하는 소망과 뜻이 맞는 단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로 사용이 되는 것은 ‘소망’으로 표기를 하고 인간적 기대나 바람 혹은 소원을 나타내는 비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소망을 가지게 해 주는 곳입니다.
우리가 거하게 될 처소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소망이 아닌 희망을 주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인간적인 기대나 소원을 성취하게 해 주려고 합니다.
그 희망이 지나쳐서 사람들을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게 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욕망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그 희망이 그 욕망이 절망이 될 때 교회를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희망을 버리고 절망 속에서 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좀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은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사도가 베드로전서를 통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희망이나 욕망이 아니라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의 바라는 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이 산 소망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 사라지고 욕망이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될 때 더 빛이 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가진 소망은 더욱 값진 것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을 들어서면 유난히 눈에 많이 뜨이는 단어가 있음을 봅니다.
“고난”이라는 단어가 그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1-2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이 세상을 사는 한 고난을 당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산 소망을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으면 죄를 짓지 않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이 세상의 희망이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를 즉 남은 생애를 희망을 위해서 욕망을 위해서 죄를 범하면서 살지 않고 바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고 소망하던 그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고 바르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가 매일 매일 마지막의 날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오늘 본문 7절 말씀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 성도들이 가슴에 담고 실천해야 할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말씀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 헬라어로 “소프로네오(σωφρονηω)”인데 그 뜻은 “올 바른 마음, 침착한 마음”입니다.
냉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 침착한 마음을 가지는 것, 경솔하거나 성급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근신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네포”인데 “술 취하지 않다. 정신 차리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근신하여”라는 말도 정신을 차리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술 취한 사람처럼 중언부언하면서 아무렇게나 기도하지 말고 바르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정신이 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냥 막무가내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들어준다고 하니까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잘못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떼를 쓰면서 기도를 들어 주실 때까지 기도를 하라고 하니까 금식을 하면서 작정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보려고 덤비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하기도 하고 무속 신앙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하기도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는 사람이란 그렇게 아무렇게나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바른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른 기도란 어떤 기도일까요?
비전성경사전에서 기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성도간의 교제, 대화를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찬양과 경배, 감사, 죄의 회개, 간구를 드리며 하나님은 성도의 아룀을 들으시고 성도의 간구에 응답하신다. 기도는 성도의 영적호흡이며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가지는 특권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도는 간구부분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간구가 기도의 요소에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크고 작던 간에 하나님께 간구해서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간구가 기도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간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도의 요소 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과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맑은 머리로 생각을 해 보면 하나님께 이미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무엇을 더 달라고 간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할 일이 있을 뿐입니다.
특별히 간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 은혜 안에 머물게 해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떠나지 않고 우리가 이 천국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에서 낙오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이 우리가 간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날도 그리 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금방 오시지 않으신다고 해도 우리 개인이 이 세상을 떠나 주님을 대할 개인적인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이때를 대비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이 기도를 드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뜨겁게 사랑하라
본문 8절 말씀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말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하되 디모데후서 3:2절의 말씀처럼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도 없고 더욱이 뜨겁게 사랑을 하는 사람은 더욱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이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대강 적당히 형식적으로 사랑을 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뜨겁게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앞에서 살펴 본대로 정신을 차리고 바른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른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 하나님께 대한 감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물질을 바치고 헌신을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앞서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진심으로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 물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 억지로 충성과 헌신을 드리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깊이까지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가슴깊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간에 사랑도 그런 질실한 사랑이 필요할 것입니다.
겉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는 참된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특징도 우리의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사탄의 특징은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을 하고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고통 속에 살도록 하는 것이 사탄의 특징입니다.
성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서 사람들에게 퍼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취미삼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참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이해하고 용서하고 덮어주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3.서로를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
오늘 본문 9절 말씀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대접이라는 것이 그저 밖에 나가서 식사나 같이하는 정도이니까 원망을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여유 있으면 대접하면 되고 형편에 맞춰서 형편대로 하면 되니까 원망을 해 가면서 까지 불평을 해 가면서 까지 접대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이 도시 저 도시를 많이 돌아 다녔고 그런 손님이 오면 호텔이나 여관이 잘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성도들의 가정에서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대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손님이 너무 자주오거나 한번 와서 빨리 안가고 오래 있거나 해서 좀 힘이 들기도 했고 자연스럽게 원망도 하고 짜증도 났을 것입니다.
남의 식구하고 한집에서 숙식을 같이하면서 산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요즘은 부모 자식 간에도 같이 살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힘이 드는 일입니다.
생전 보지도 알지도 못한 사람이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같은 성도다 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집에다가 모시고 섬겨야 한다는 것은 보통 신앙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평생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마감하면서 그에게 잘 대해 주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을 합니다.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자신을 가족같이 먹여주고 돌봐주고 대접을 해 주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와는 별 관계도 없는 사람이지만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임 많이 있습니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나의 손을 쳐다보면 참 불편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지 왜 남의 도움만 바라고 사는가? 라고 원망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원망하지 말고 도와주고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불우이웃돕기 성금들을 많이 거둡니다.
외면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후원금을 내시기 바랍니다.
남을 도와주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해마다 저희가 공동모금회와 함께 초등학교에 종이저금통을 나누어주고 아이들에게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한 모금을 합니다.
돈을 모아서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쓰기위한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기부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교육이 더 큰 목적입니다.
어릴 때부터 남을 돕고 대접하는 습관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아무라 나라가 잘 살아도 우리 곁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을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베풀 때 나누어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돈이든지 정이든지 무엇이든지 남을 위해서 쓰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 남을 위해서 대접을 하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나누게 해 주실 것입니다.
4.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본문 10절 말씀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라고 했습니다.
“봉사란 상대방을 섬기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봉사란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상대방을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물질을 희생하고 나의 시간을 희생하고 내가 가진 재주들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 잘 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 주고 기쁘게 해 주는 것이 봉사입니다.
이런 봉사정신은 우리가 사는 모든 분야에 다 해당이 되고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런 봉사자가 있으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직장에서 이런 봉사자가 있으면 그 직장도 행복한 직장이 됩니다.
어떤 단체나 다 이런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는 이렇게 섬기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교회에는 모두가 다 이런 봉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이런 봉사자들이 많이 있어야 교회가 운영되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우리 성도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 주어지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은사는 매우 다양하고 성도들마다 각각 다르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각각 받은 은사대로 봉사를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우리가 봉사할 때 가져야 할 자세 두 번째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주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들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은혜들은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그 선물의 관리자로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3)서로 봉사하라
봉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다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도 구경꾼이나 손님처럼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함께 서로를 위해서 봉사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특별히 대형교회의 특징은 일부 사람들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구경꾼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 함께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만 그렇게 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방관자로 구경꾼으로 손님처럼 교회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구경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이라도 모두가 다 함께 서로 한 몸이 되어서 서로 맡은 바대로 서로 봉사하면서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중이떠중이 다 천국 못 보내서 애를 태우시는 분처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크시지만 아무나 교회에 와서 그저 구경이나 하다가 천국에 가게 하시는 그런 분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음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 감격하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살려고 애를 쓰는 참 된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고 복된 삶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세월을 허비하면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청지기처럼 서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선한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 벧전 4:7-10
제목 : 산 소망을 가진 성도의 삶.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의 소망이요 산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소망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희망이라는 말과 그리고 조금은 다르지만 욕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희망(希望)이란 “바랄 희”자와 “바랄 망”자를 써서 바라다 동경하다. 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욕망(慾望)이란 “욕심 욕”자와 “바랄 망”자를 써서 욕심을 내서 바라는 것 탐을 내서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소망(所望)이란 말은 “바 소”자와 “바랄 망”자를 써서 바라는 바, 바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소”자에는 “장소, 처소”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바라는 장소 바라는 처소라고 해석을 하면 우리가 바라보고 사는 영원한 처소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문이 의미하는 소망과 뜻이 맞는 단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의미로 사용이 되는 것은 ‘소망’으로 표기를 하고 인간적 기대나 바람 혹은 소원을 나타내는 비신학적인 개념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써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소망을 가지게 해 주는 곳입니다.
우리가 거하게 될 처소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소망이 아닌 희망을 주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인간적인 기대나 소원을 성취하게 해 주려고 합니다.
그 희망이 지나쳐서 사람들을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게 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욕망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그 희망이 그 욕망이 절망이 될 때 교회를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희망을 버리고 절망 속에서 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좀 더 나은 내일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은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사도가 베드로전서를 통하여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희망이나 욕망이 아니라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의 바라는 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이 산 소망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 사라지고 욕망이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될 때 더 빛이 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가진 소망은 더욱 값진 것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을 들어서면 유난히 눈에 많이 뜨이는 단어가 있음을 봅니다.
“고난”이라는 단어가 그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1-2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산 소망을 가지고 살지만 이 세상을 사는 한 고난을 당하면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산 소망을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으면 죄를 짓지 않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이 세상의 희망이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남은 때를 즉 남은 생애를 희망을 위해서 욕망을 위해서 죄를 범하면서 살지 않고 바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산 소망을 가지고 사는 우리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바라고 기다리고 소망하던 그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소망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고 바르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들으시고 우리가 매일 매일 마지막의 날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고 기도하고 뜨겁게 사랑하는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오늘 본문 7절 말씀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 성도들이 가슴에 담고 실천해야 할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기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말씀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 헬라어로 “소프로네오(σωφρονηω)”인데 그 뜻은 “올 바른 마음, 침착한 마음”입니다.
냉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 침착한 마음을 가지는 것, 경솔하거나 성급하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근신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네포”인데 “술 취하지 않다. 정신 차리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근신하여”라는 말도 정신을 차리라는 말과 비슷한 말입니다.
술 취한 사람처럼 중언부언하면서 아무렇게나 기도하지 말고 바르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정신이 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냥 막무가내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들어준다고 하니까 세상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기적인 마음으로 잘못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떼를 쓰면서 기도를 들어 주실 때까지 기도를 하라고 하니까 금식을 하면서 작정을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꾸어보려고 덤비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불교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하기도 하고 무속 신앙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기도하기도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는 사람이란 그렇게 아무렇게나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바른 기도를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바른 기도란 어떤 기도일까요?
비전성경사전에서 기도를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성도간의 교제, 대화를 말한다. 성도는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찬양과 경배, 감사, 죄의 회개, 간구를 드리며 하나님은 성도의 아룀을 들으시고 성도의 간구에 응답하신다. 기도는 성도의 영적호흡이며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가지는 특권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도는 간구부분에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 간구가 기도의 요소에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크고 작던 간에 하나님께 간구해서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간구가 기도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간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도의 요소 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과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맑은 머리로 생각을 해 보면 하나님께 이미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무엇을 더 달라고 간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할 일이 있을 뿐입니다.
특별히 간구해야 할 것이 있다면 우리가 이 은혜 안에 머물게 해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떠나지 않고 우리가 이 천국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에서 낙오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이 우리가 간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날도 그리 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금방 오시지 않으신다고 해도 우리 개인이 이 세상을 떠나 주님을 대할 개인적인 종말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이때를 대비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이 기도를 드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2.뜨겁게 사랑하라
본문 8절 말씀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말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에 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하되 디모데후서 3:2절의 말씀처럼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도 없고 더욱이 뜨겁게 사랑을 하는 사람은 더욱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이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대강 적당히 형식적으로 사랑을 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뜨겁게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앞에서 살펴 본대로 정신을 차리고 바른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른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 하나님께 대한 감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물질을 바치고 헌신을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앞서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진심으로 영광과 찬송을 드리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 물질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마음이 없이 억지로 충성과 헌신을 드리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깊이까지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가슴깊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 간에 사랑도 그런 질실한 사랑이 필요할 것입니다.
겉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는 참된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사랑의 특징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의 특징도 우리의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사탄의 특징은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을 하고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통해서 고통 속에 살도록 하는 것이 사탄의 특징입니다.
성도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서 사람들에게 퍼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의 잘못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취미삼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뜨겁게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상대방의 허물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참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이해하고 용서하고 덮어주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3.서로를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
오늘 본문 9절 말씀에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대접이라는 것이 그저 밖에 나가서 식사나 같이하는 정도이니까 원망을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여유 있으면 대접하면 되고 형편에 맞춰서 형편대로 하면 되니까 원망을 해 가면서 까지 불평을 해 가면서 까지 접대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이 도시 저 도시를 많이 돌아 다녔고 그런 손님이 오면 호텔이나 여관이 잘 없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성도들의 가정에서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대접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손님이 너무 자주오거나 한번 와서 빨리 안가고 오래 있거나 해서 좀 힘이 들기도 했고 자연스럽게 원망도 하고 짜증도 났을 것입니다.
남의 식구하고 한집에서 숙식을 같이하면서 산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요즘은 부모 자식 간에도 같이 살려고 하지 않을 정도로 힘이 드는 일입니다.
생전 보지도 알지도 못한 사람이 단순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같은 성도다 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집에다가 모시고 섬겨야 한다는 것은 보통 신앙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평생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전도를 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마감하면서 그에게 잘 대해 주었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을 합니다.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자신을 가족같이 먹여주고 돌봐주고 대접을 해 주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와는 별 관계도 없는 사람이지만 도와주어야 할 사람들임 많이 있습니다.
주변에 어려운 사람이 있어서 나의 손을 쳐다보면 참 불편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지 왜 남의 도움만 바라고 사는가? 라고 원망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원망하지 말고 도와주고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연말연시가 되면 불우이웃돕기 성금들을 많이 거둡니다.
외면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후원금을 내시기 바랍니다.
남을 도와주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해마다 저희가 공동모금회와 함께 초등학교에 종이저금통을 나누어주고 아이들에게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한 모금을 합니다.
돈을 모아서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쓰기위한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기부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교육이 더 큰 목적입니다.
어릴 때부터 남을 돕고 대접하는 습관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아무라 나라가 잘 살아도 우리 곁에는 항상 가난한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을 대접할 줄 아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베풀 때 나누어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돈이든지 정이든지 무엇이든지 남을 위해서 쓰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 남을 위해서 대접을 하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으로 나누게 해 주실 것입니다.
4.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본문 10절 말씀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라고 했습니다.
“봉사란 상대방을 섬기는 것이고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봉사란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상대방을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물질을 희생하고 나의 시간을 희생하고 내가 가진 재주들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 잘 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 주고 기쁘게 해 주는 것이 봉사입니다.
이런 봉사정신은 우리가 사는 모든 분야에 다 해당이 되고 유익한 일일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런 봉사자가 있으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직장에서 이런 봉사자가 있으면 그 직장도 행복한 직장이 됩니다.
어떤 단체나 다 이런 봉사자가 필요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는 이렇게 섬기는 자들이 필요합니다.
교회에는 모두가 다 이런 봉사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이런 봉사자들이 많이 있어야 교회가 운영되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우리 성도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 주어지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 은사는 매우 다양하고 성도들마다 각각 다르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각각 받은 은사대로 봉사를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2)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우리가 봉사할 때 가져야 할 자세 두 번째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주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들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은혜들은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그 선물의 관리자로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3)서로 봉사하라
봉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다 봉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사람도 구경꾼이나 손님처럼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함께 서로를 위해서 봉사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특별히 대형교회의 특징은 일부 사람들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구경꾼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원이 되어서 함께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만 그렇게 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방관자로 구경꾼으로 손님처럼 교회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구경꾼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이라도 모두가 다 함께 서로 한 몸이 되어서 서로 맡은 바대로 서로 봉사하면서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중이떠중이 다 천국 못 보내서 애를 태우시는 분처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물론 우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마음은 크시지만 아무나 교회에 와서 그저 구경이나 하다가 천국에 가게 하시는 그런 분은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음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 감격하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살려고 애를 쓰는 참 된 성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고 복된 삶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세월을 허비하면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서로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선한 청지기처럼 서로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선한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