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29.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후 19)
본문 : 벧후 2:20-22
제목 : 다시 되돌아가지 말라.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오늘 본문 말씀에 잘못을 반복하거나 잘못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어리석음에 대한 속담 두 가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잠언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11)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말씀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속담집에 기록된 격언이라고 했습니다.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고 했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깨끗하게 씻고 나서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 인간들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죄를 깨끗이 씻은 후에 다시 죄구덩이에 빠지는 어리석은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돼지가 깨끗이 씻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 신분이나 삶의 질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엄청나게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변화를 바르게 알고 믿는다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모르고 유혹에 넘어가서 되돌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는 거짓선생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그저 시시하게 유혹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어떤 다른 교리를 만들고 학설을 만들고 사람이 좋아하게끔 그럴듯하게 해서 유혹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다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어떤 유혹이 와도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1.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라
본문 20절 말씀에 “만일 그들이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절 말씀에도 “의의 도를 안후에” 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만 안다면 또 의의 도를 바르게 안다면 그것을 알지 못하던 그 옛날 그 시절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자 알지 못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도 세상의 욕심에 너무 눈이 멀다가 보면 영원한 세상의 일을 간단하게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옛날 그 죄악된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의의 도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1)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사도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시는 일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늘 앞서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고 앞서서 행동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한 신앙고백들은 우리가 해야 할 모범적인 신앙고백들입니다.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한 고백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가르치신 후에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물을 내렸더니 두 배가 잠기도록 많은 고기가 잡히게 된 것을 보고 베드로가 한 고백이 이 고백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다 내가 최고인줄로 알고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처럼 어떤 분야에 좀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제일인 줄로 알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신앙고백은 마태복음 16:16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참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또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하시고 난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27절에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주 귀한 것 즉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저들을 구원해 주신다고 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만 남아있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사도신경을 만들어서 우리가 매주 이렇게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가 되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으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직접 보고 배웠던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신 있게 확실하게 알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실히 안다면 결코 이렇게 좋으신 예수님을 두고 다른 데로 갈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의의 도
'의의 도'는 '진리의 도' 혹은 '바른 길'과 같은 개념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른 삶을 살려고 하다가도 힘이 들어서 포기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의 목표들을 세우고 시행을 하다가 힘이 들어서 좌절을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의의 길이 불교나 유교에서처럼 고행을 하고 선을 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든다고 한다면 더러 포기할 만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의 성도들처럼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한다면 때로는 포기할 마음이 생기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의의 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너무나 쉬운 길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 후에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의무는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는 것이지 억압이나 불행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길입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죄를 짓고 나쁜 길로 가고 그래서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가 되는 길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길입니다.
이런 좋은 길을 두고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몰라서 그런다고 하겠지만 이런 진리의 길을 알면서도 가지 않고 다시 불의의 길로 간다면 개나 돼지처럼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다시 돌아가지 말라
본문 20절 말씀 중에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더러움 즉 죄에서 빠져나와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된 후에 다시 그들의 유혹에 넘어지고 세상으로 돌아가서 그 죄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 형편이 처음보다 더 악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1)교회에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우리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미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에서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격도 더 좋아지고 하는 행동도 더 선해지고 더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은 점점 퇴보하고 뒤를 돌아보고 옛날로 돌아 가버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세상이라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라면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칭찬을 받는 세상이라면
뒤를 돌아보거나 나쁜 길로 다시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사탄의 세력이 죄악을 조장하고 헛된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기가 쉽습니다.
죄를 짓든지 나쁜 짓을 하든지 돈이 많고 떵떵거리고 살면 그것이 좋은 사람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는 세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기가 쉽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래도 좀 선한 사람들은 그 선한 행동을 보면서 선하게 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이 나쁜 사람들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그 나쁜 점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더 잘되기도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면서 즐기기를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뒤를 돌아보면 조금만 그 사람들과 어울려서 놀다가 보면 쉽게 빠져들고 말게 되어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신앙생활 하셔야 합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허무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다가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영원히 멸망을 당하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신령한 복에서 세상의 복으로 돌아가지 말라.
교회를 다니다가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몸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복의 개념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구약시대의 복은 다분히 이 세상의 복이 중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장수하는 복을 받는 것이 복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받게 된다는 하나님나라를 얻는 것이 새로운 복의 핵심입니다.
세상의 물질이 복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하면서 받게 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복이고 그 나라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복들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령한 복은 무시하고 이 세상에서 누리는 복들을 사모하고 사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허황된 세상의 헛된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그렇게 화려한 삶을 살고 나서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했는데 그 헛된 세상의 쾌락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3)믿음에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
그 하나님 나라를 받는 방법도 행함이나 고행이나 선행이 아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서신서들이 하나같이 주장하는 핵심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행함을 가르쳐서 마치 구약의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꼭 그렇게 말은 하지 않지만 믿는 사람에게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마치 율법을 행함이 제일인 것처럼 가르칩니다.
제가 요즘 부흥하는 교회들을 보니까 철두철미하게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교회들이 부흥을 합니다.
제자훈련을 시키고 양육 반을 만들어서 교육을 통해 헌신하는 일꾼들을 많이 만드는 교회가 제정도 튼튼하고 부흥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원 뜻을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마치 내 행위가 내 충성이 신령한 복도 받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받고 새 생명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의 행함은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지 구원을 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행함을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이 은혜의 교리에서 절대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로 진리의 핵심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십자가의 복음에 바로 서 있습니다.
천국 가는 이 바른 길에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돌아간 후의 형편을 생각하라.
본문 20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면 옛날에 죄악 가운데 살았던 것보다 더 악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가 그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다른 것에 다니다가 들어가서 쉴 곳을 얻지 못해서 다시 그 사람에게로 와 보니까 그 사람의 집이 즉 그 사람의 마음이 청소도 되어 있고 수리도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사니까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죄악된 세상에 살다가 교회에 오게 되면 그래도 세상에 살 때 보다 마음도 청소가 되고 잘못된 것도 고쳐져서 착한 사람이 됩니다.
그 착한 마음에 사탄은 더 쉽게 찾아들어오고 더 악한 귀신이 들어오게 되어서 옛날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그만 둔 사람은 옛날보다 교회에 다니기 전보다 더 악해진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형편이 더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탄의 종이 되었는데 그 형편을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또 21절에는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의의 도를 잘 몰랐을 때는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좋은 의의 도 참된 지리 십자가의 복음을 안 뒤에 이 좋은 것을 저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더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르고 행한 죄도 죄가 되지만 알면서도 짓는 죄는 더 큰 죄가 될 것입니다.
알고도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사람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더욱 바르게 더욱 깊이 알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되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되돌아 간 후의 형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잊지 마시고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그 죄악 된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이 길을 가셔서 최후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 벧후 2:20-22
제목 : 다시 되돌아가지 말라.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오늘 본문 말씀에 잘못을 반복하거나 잘못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어리석음에 대한 속담 두 가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잠언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26:11)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성경말씀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속담집에 기록된 격언이라고 했습니다.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고 했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깨끗하게 씻고 나서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 인간들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죄를 깨끗이 씻은 후에 다시 죄구덩이에 빠지는 어리석은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돼지가 깨끗이 씻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그 신분이나 삶의 질이나 모든 면에 있어서 엄청나게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변화를 바르게 알고 믿는다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모르고 유혹에 넘어가서 되돌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는 거짓선생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그저 시시하게 유혹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어떤 다른 교리를 만들고 학설을 만들고 사람이 좋아하게끔 그럴듯하게 해서 유혹을 하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다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어떤 유혹이 와도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1.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라
본문 20절 말씀에 “만일 그들이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절 말씀에도 “의의 도를 안후에” 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만 안다면 또 의의 도를 바르게 안다면 그것을 알지 못하던 그 옛날 그 시절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자 알지 못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안다고 해도 세상의 욕심에 너무 눈이 멀다가 보면 영원한 세상의 일을 간단하게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옛날 그 죄악된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의의 도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1)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베드로사도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시는 일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늘 앞서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고 앞서서 행동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한 신앙고백들은 우리가 해야 할 모범적인 신앙고백들입니다.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한 고백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어부였던 시몬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가르치신 후에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물을 내렸더니 두 배가 잠기도록 많은 고기가 잡히게 된 것을 보고 베드로가 한 고백이 이 고백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다 내가 최고인줄로 알고 살고 있습니다.
특별히 베드로처럼 어떤 분야에 좀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제일인 줄로 알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 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신앙고백은 마태복음 16:16절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참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또 여러 가지 기적들을 행하시고 난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1:27절에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주 귀한 것 즉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저들을 구원해 주신다고 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만 남아있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6:68) 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사도신경을 만들어서 우리가 매주 이렇게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하려고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가 되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으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직접 보고 배웠던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너무나 자신 있게 확실하게 알고 믿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처럼 그리스도에 대해서 확실히 안다면 결코 이렇게 좋으신 예수님을 두고 다른 데로 갈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의의 도
'의의 도'는 '진리의 도' 혹은 '바른 길'과 같은 개념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른 삶을 살려고 하다가도 힘이 들어서 포기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의 목표들을 세우고 시행을 하다가 힘이 들어서 좌절을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의의 길이 불교나 유교에서처럼 고행을 하고 선을 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든다고 한다면 더러 포기할 만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의 성도들처럼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한다면 때로는 포기할 마음이 생기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의의 길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너무나 쉬운 길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된 후에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의무는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는 것이지 억압이나 불행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길입니다.
사탄에게 속아서 죄를 짓고 나쁜 길로 가고 그래서 죄의 노예 사탄의 노예가 되는 길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길입니다.
이런 좋은 길을 두고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은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차라리 몰랐으면 몰라서 그런다고 하겠지만 이런 진리의 길을 알면서도 가지 않고 다시 불의의 길로 간다면 개나 돼지처럼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다시 돌아가지 말라
본문 20절 말씀 중에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더러움 즉 죄에서 빠져나와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로운 사람이 된 후에 다시 그들의 유혹에 넘어지고 세상으로 돌아가서 그 죄에 얽매이게 된다면 그 형편이 처음보다 더 악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1)교회에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우리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미 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에서 세상으로 다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은 점점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격도 더 좋아지고 하는 행동도 더 선해지고 더 보람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가끔은 점점 퇴보하고 뒤를 돌아보고 옛날로 돌아 가버리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세상이라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선한 세상이라면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칭찬을 받는 세상이라면
뒤를 돌아보거나 나쁜 길로 다시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사탄의 세력이 죄악을 조장하고 헛된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기가 쉽습니다.
죄를 짓든지 나쁜 짓을 하든지 돈이 많고 떵떵거리고 살면 그것이 좋은 사람 성공한 사람으로 보이는 세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기가 쉽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래도 좀 선한 사람들은 그 선한 행동을 보면서 선하게 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이 나쁜 사람들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그 나쁜 점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더 잘되기도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면서 즐기기를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조금만 뒤를 돌아보면 조금만 그 사람들과 어울려서 놀다가 보면 쉽게 빠져들고 말게 되어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신앙생활 하셔야 합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허무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하다가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고 영원히 멸망을 당하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신령한 복에서 세상의 복으로 돌아가지 말라.
교회를 다니다가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몸은 교회 안에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아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이전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가졌던 복의 개념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구약시대의 복은 다분히 이 세상의 복이 중심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장수하는 복을 받는 것이 복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받게 된다는 하나님나라를 얻는 것이 새로운 복의 핵심입니다.
세상의 물질이 복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하면서 받게 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복이고 그 나라를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복들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령한 복은 무시하고 이 세상에서 누리는 복들을 사모하고 사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허황된 세상의 헛된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그렇게 화려한 삶을 살고 나서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했는데 그 헛된 세상의 쾌락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3)믿음에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
그 하나님 나라를 받는 방법도 행함이나 고행이나 선행이 아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서신서들이 하나같이 주장하는 핵심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들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행함을 가르쳐서 마치 구약의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꼭 그렇게 말은 하지 않지만 믿는 사람에게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마치 율법을 행함이 제일인 것처럼 가르칩니다.
제가 요즘 부흥하는 교회들을 보니까 철두철미하게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교회들이 부흥을 합니다.
제자훈련을 시키고 양육 반을 만들어서 교육을 통해 헌신하는 일꾼들을 많이 만드는 교회가 제정도 튼튼하고 부흥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하나님의 원 뜻을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마치 내 행위가 내 충성이 신령한 복도 받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을 받고 새 생명을 얻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우리의 행함은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지 구원을 받는 조건이 아닙니다.
행함을 내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이 은혜의 교리에서 절대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로 진리의 핵심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십자가의 복음에 바로 서 있습니다.
천국 가는 이 바른 길에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3. 돌아간 후의 형편을 생각하라.
본문 20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면 옛날에 죄악 가운데 살았던 것보다 더 악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가 그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귀신이 다른 것에 다니다가 들어가서 쉴 곳을 얻지 못해서 다시 그 사람에게로 와 보니까 그 사람의 집이 즉 그 사람의 마음이 청소도 되어 있고 수리도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사니까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죄악된 세상에 살다가 교회에 오게 되면 그래도 세상에 살 때 보다 마음도 청소가 되고 잘못된 것도 고쳐져서 착한 사람이 됩니다.
그 착한 마음에 사탄은 더 쉽게 찾아들어오고 더 악한 귀신이 들어오게 되어서 옛날보다 더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그만 둔 사람은 옛날보다 교회에 다니기 전보다 더 악해진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형편이 더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탄의 종이 되었는데 그 형편을 말해서 뭐하겠습니까?
또 21절에는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의 도를 안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라고 했습니다.
의의 도를 잘 몰랐을 때는 몰라서 그랬다는 변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좋은 의의 도 참된 지리 십자가의 복음을 안 뒤에 이 좋은 것을 저버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더 나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르고 행한 죄도 죄가 되지만 알면서도 짓는 죄는 더 큰 죄가 될 것입니다.
알고도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사람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더욱 바르게 더욱 깊이 알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되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되돌아 간 후의 형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잊지 마시고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그 죄악 된 세상으로 되돌아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끝까지 이 길을 가셔서 최후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