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31. 광성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양향모 목사(벧종전1)
본문 : 벧전 1:3-4
제목 : 고난 중에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오늘 이렇게 좋은 날 주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린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넘칠 줄 믿습니다.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분들을 특별히 사랑하실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많이 있어도 그것을 잘 정리해서 잘 사용하지 않으면 유익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어도 그것을 잘 정리해서 우리의 삶에 적용을 시켜야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공부했습니다.
2009년 1월에 시작을 해서 거의 2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베드로전서, 후서에 기록된 귀한 말씀들을 배웠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고난 중의 소망”이라고 합니다.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산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서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승리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기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1장의 핵심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1장의 핵심은 오를 설교 제목대로 “고난 중에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입니다.
에베소서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에베소서 1:3절에도 “찬송하리로다.” 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2절에 인사말을 기록한 후 본론에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찬송하리로다.”입니다.
새로 번역된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지만 옛날 성경에는 “찬송하리로다.”가 먼저 나옵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도 찬송하리로다가 먼저 나옵니다.
찬송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1.찬송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타락한 우리 인생을 구워해 주신 목적도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느냐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구원받은 성도인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주일마다 교회에 모입니까?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여러 가지 순서들이 있습니다.
신앙고백도 하고 성시교독도 하고 성경봉독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합니다.
그 모든 순서들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여러 순서들을 은혜롭게 했다고 해도 찬송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실패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왜 삽니까?
왜 공부를 하고 왜 취직을 하고 왜 성공을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출세를 하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그 삶은 무의미한 삶입니다.
그런데 사실 당시에 이 베드로전서를 받은 성도들의 형편은 찬송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찬송도 기분이 좋거나 살아가는 형편이 좋아야 하는 것이지 사는 것 자체가 힘이 드는데 무슨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1절 말씀에 당시에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이 도시들은 당시의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 지방 즉 지금의 터키지방을 말합니다.
기독교를 개종한 유대인들이 로마황제의 박해를 피해서 이 지방에 흩어져서 나그네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네로는 시를 쓰기 위해서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것을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을 씌어서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떳떳하게 기독교인으로 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6절 말씀에 그들의 형편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라고 했습니다.
7절 말씀에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당시 성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의 시험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시험이라는 말은 시련을 말합니다.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련이 한두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였다고 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아이들 교육이나 문화생활 같은 것은 고사하고라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이 드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불로 연단을 하는 것처럼 힘이 드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에서 불법 체류자로 살면서 의식주가 보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루하루 나그네처럼 힘들게 어렵게 겨우 사는데 뭐가 좋아서 노래를 하겠으며 뭐가 감사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삶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도 그렇게 행복하고 재미있는 삶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하나 해결 하면 저기서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떠 다른 걱정거리가 생기고 어떤 문제들은 평생을 살아도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뭐가 좋아서 뭐가 기뻐서 노래나 하며 찬송이나 하며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찬송도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지 우리 같은 사람이 무슨 찬송을 하면서 살겠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생활이 넉넉하고 이 세상의 삶이 즐거울 때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슬플 때 힘들 때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찬송을 하면 그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을 보시면 다윗이 꼭 기쁘고 즐거울 때만 찬송을 한 것이 아닙니다.
슬프고 힘이 들 때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그는 노래하고 있음을 봅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할 때도 찬송시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시3:1)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시3:2) 라고 했습니다.
아들에게 배반을 당하여 왕 자리에서 쫓겨나 도망을 가면서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손가락질을 받을 때 뭐가 좋아서 하나님을 찬송할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몸에 병이 생겼을 때도 흉악한 죄를 지어서 실의에 빠져 있었을 때도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로 찬송하지 못하게 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렵고 힘이 들수록 억울한 일을 당했을수록 죄를 짓고 양심에 가책을 느낄수록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이런 어려움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이런 흉악한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이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신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듯이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도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그 길이 열릴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할 수 없는 많은 이유가 있어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어렵다 힘들다 고통스럽다고 찬송하는 일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찬송곡이 어렵다 찬송하는 음악의 장르가 마음에 안 든다. 이런 저런 것을 핑계로 찬송하는 일을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찬송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찬송해야할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찬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찬송해야 할 이유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살펴본다면 우리가 어떤 경우에든지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많은 은혜들을 바르게 알고 믿는다면 찬송하라 마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 말라고 말려도 말려도 어떻게 하든지 찬송을 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교회에 와서 가슴을 열고 입을 열고 찬송을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찬송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 말씀에 크게 두 가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할 이유는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은 소망인데 산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산 소망이라는 말은 죽은 소망이라는 말과 비교되는 말이고, 산 소망이라는 말은 거짓 소망이라는 말과 비교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과 다른 소망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이 헛된 소망이요 실체가 없는 거짓 소망이요 죽은 소망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이 죽은 소망이며 무엇이 산 소망인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바르게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진 원래의 소망은 고기를 많이 잡아서 부자가 되는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 소망은 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날 잡고 잡아도 부자가 되지 못했고 어떤 날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원도 한도 없이 많은 고기를 잡아보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배가 물에 잠기도록 많은 고기를 잡아보았는데 그렇게 이루어진 소망이 참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처음에는 잘못된 소망을 가지고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예수님께서 한자리 할 때 나도 한자리 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도 어느 날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줄 알았던 그 분이 힘도 못쓰고 잡혀서 끌려가서 비참하게 고문을 당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자신이 가졌던 소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나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자신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배반했던 자신을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의 그 음성도 들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도 그가 보았고 다시 오신다고 하신 그 약속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 소망이 무엇인줄을 알았습니다.
산 소망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그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해 주시기 우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본문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시작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도 거듭난 사람이 되게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죽은 소망 즉 이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산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산 소망이 아닌 죽은 소망을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죽은 소망을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기를 많이 잡는 일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일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 소망이 무엇인줄 모르고 삽니다.
산 소망의 중요성을 모르고 삽니다.
이렇게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합니다.
2)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본문 4절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유업이란 말은 상속 계승 기업이란 말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썩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썩어질 것들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 썩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다 썩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받게 될 영원한 기업인 하늘나라 기업은 썩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얻을 면류관이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입니다
부활의 몸도 썩지 아니할 몸입니다
그 나라는 더럽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더럽지 않다. “ 라는 말은 ”오염되지 않은, 더렵혀지지 않은, 더러움이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아무리 바르게 착하게 살려고 해도 이 세상이 너무나 악하고 더럽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세상의 죄악에 오염이 되어서 지저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서 살 하나님의 나라는 오염이 전혀 되지 않은 깨끗한 나라이고 또 앞으로도 오염이 될 수 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쇠하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쇠하지 않는다는 말은 시들지 않는다, 약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쇠하여집니다.
청춘도 사랑도 몸도 마음도 사업도 이 지구의 모든 것들은 시들어 가고 약해져가고 변하고 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나라입니다.
영원히 변함이 없는 나라, 부도가 나거나 망하지 않는 나라, 그 나라가 우리가 받을 영원한 기업입니다.
우리가 상속을 받게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무리 좋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들어갈 수가 없다면 그림의 떡이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시험을 봐야 한다거나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한다거나 경쟁을 해서 들어가야 한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좋은 것을 주시면서도 아주 쉽게 아주 간단하게 경쟁도 없이 시험도 없이 반드시 꼭 들어가게 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동정의 여지도 없는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 대신 죽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셔서 우리도 부활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3.찬송하는 사람의 삶도 달라야 합니다.
1장 13절 이하에는 찬송하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찬송이란 교회에 와서 말로만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찬송하는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찬송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산 사람이 찬송을 기쁘게 바르게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사욕을 본받지 말라(14)
14절 말씀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의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세상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주신 하나님을 바르게 찬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 욕심을 두고 사는 사람은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잘 살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일을 하되 꼭 돈에 목적을 두고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다가 보면 돈은 따라서 오는 것입니다.
돈을 벌겠다고 남에게 나쁜 해를 끼치는 것은 사욕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4-16)
모든 행실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목적이 달라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다르다는 생각을 늘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들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뜨겁게 서로 사랑하라(22)
서로에게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원리가 이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의 눈으로 사람들을 본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미워할 사람도 없고 원망하고 불평할 사람도 없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 늘 도와주고 싶은 마음, 늘 관심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 서로 칭찬해주고 복을 빌어주는 마음 그것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찬송을 막는 이유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찬송해야만 하는 이유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은혜 그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찬송하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세상의 사욕을 본받지 말고 거룩한 사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찬송하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찬송하면서 사는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 벧전 1:3-4
제목 : 고난 중에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오늘 이렇게 좋은 날 주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드린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넘칠 줄 믿습니다.
살아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분들을 특별히 사랑하실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많이 있어도 그것을 잘 정리해서 잘 사용하지 않으면 유익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어도 그것을 잘 정리해서 우리의 삶에 적용을 시켜야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베드로전서와 베드로후서를 공부했습니다.
2009년 1월에 시작을 해서 거의 2년 동안 공부했습니다.
베드로전서, 후서에 기록된 귀한 말씀들을 배웠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정리를 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실천 방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의 주제는 “고난 중의 소망”이라고 합니다.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산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서 어렵고 힘이 들더라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승리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기록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1장의 핵심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1장의 핵심은 오를 설교 제목대로 “고난 중에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입니다.
에베소서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에베소서 1:3절에도 “찬송하리로다.” 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2절에 인사말을 기록한 후 본론에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찬송하리로다.”입니다.
새로 번역된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했지만 옛날 성경에는 “찬송하리로다.”가 먼저 나옵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도 찬송하리로다가 먼저 나옵니다.
찬송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1.찬송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타락한 우리 인생을 구워해 주신 목적도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느냐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특별히 구원받은 성도인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주일마다 교회에 모입니까?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 여러 가지 순서들이 있습니다.
신앙고백도 하고 성시교독도 하고 성경봉독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설교도 합니다.
그 모든 순서들의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여러 순서들을 은혜롭게 했다고 해도 찬송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실패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왜 삽니까?
왜 공부를 하고 왜 취직을 하고 왜 성공을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출세를 하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그 삶은 무의미한 삶입니다.
그런데 사실 당시에 이 베드로전서를 받은 성도들의 형편은 찬송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찬송도 기분이 좋거나 살아가는 형편이 좋아야 하는 것이지 사는 것 자체가 힘이 드는데 무슨 찬송이 나오겠습니까?
1절 말씀에 당시에 이 서신을 받는 사람들을 이렇게 말합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이 도시들은 당시의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소아시아 지방 즉 지금의 터키지방을 말합니다.
기독교를 개종한 유대인들이 로마황제의 박해를 피해서 이 지방에 흩어져서 나그네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네로는 시를 쓰기 위해서 로마에 불을 지르고 그것을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을 씌어서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당시의 성도들은 떳떳하게 기독교인으로 살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6절 말씀에 그들의 형편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라고 했습니다.
7절 말씀에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당시 성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의 시험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시험이라는 말은 시련을 말합니다.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련이 한두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였다고 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쉽게 되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아이들 교육이나 문화생활 같은 것은 고사하고라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이 드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불로 연단을 하는 것처럼 힘이 드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에서 불법 체류자로 살면서 의식주가 보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루하루 나그네처럼 힘들게 어렵게 겨우 사는데 뭐가 좋아서 노래를 하겠으며 뭐가 감사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부르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삶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도 그렇게 행복하고 재미있는 삶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너무나 많은 것이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하나 해결 하면 저기서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가 해결되면 떠 다른 걱정거리가 생기고 어떤 문제들은 평생을 살아도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뭐가 좋아서 뭐가 기뻐서 노래나 하며 찬송이나 하며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찬송도 여유 있는 사람이나 하지 우리 같은 사람이 무슨 찬송을 하면서 살겠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찬송은 생활이 넉넉하고 이 세상의 삶이 즐거울 때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슬플 때 힘들 때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찬송을 하면 그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큰 위로와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시편을 보시면 다윗이 꼭 기쁘고 즐거울 때만 찬송을 한 것이 아닙니다.
슬프고 힘이 들 때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그는 노래하고 있음을 봅니다.
다윗이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피할 때도 찬송시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시3:1)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시3:2) 라고 했습니다.
아들에게 배반을 당하여 왕 자리에서 쫓겨나 도망을 가면서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고 손가락질을 받을 때 뭐가 좋아서 하나님을 찬송할 마음이 생겼겠습니까?
몸에 병이 생겼을 때도 흉악한 죄를 지어서 실의에 빠져 있었을 때도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로 찬송하지 못하게 할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렵고 힘이 들수록 억울한 일을 당했을수록 죄를 짓고 양심에 가책을 느낄수록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이런 어려움에서 구해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이런 흉악한 죄를 용서해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이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신라가 빌립보 감옥의 문을 찬송으로 열었듯이 우리의 모든 어려운 문제들도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그 길이 열릴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할 수 없는 많은 이유가 있어도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어렵다 힘들다 고통스럽다고 찬송하는 일을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찬송곡이 어렵다 찬송하는 음악의 장르가 마음에 안 든다. 이런 저런 것을 핑계로 찬송하는 일을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찬송은 우리의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찬송해야할 이유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찬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찬송해야 할 이유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살펴본다면 우리가 어떤 경우에든지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많은 은혜들을 바르게 알고 믿는다면 찬송하라 마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 말라고 말려도 말려도 어떻게 하든지 찬송을 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교회에 와서 가슴을 열고 입을 열고 찬송을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찬송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 말씀에 크게 두 가지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할 이유는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은 소망인데 산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산 소망이라는 말은 죽은 소망이라는 말과 비교되는 말이고, 산 소망이라는 말은 거짓 소망이라는 말과 비교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과 다른 소망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진 소망이 헛된 소망이요 실체가 없는 거짓 소망이요 죽은 소망이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망은 산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무엇이 죽은 소망이며 무엇이 산 소망인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바르게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진 원래의 소망은 고기를 많이 잡아서 부자가 되는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그 소망은 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날 잡고 잡아도 부자가 되지 못했고 어떤 날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원도 한도 없이 많은 고기를 잡아보았습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배가 물에 잠기도록 많은 고기를 잡아보았는데 그렇게 이루어진 소망이 참된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처음에는 잘못된 소망을 가지고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예수님께서 한자리 할 때 나도 한자리 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도 어느 날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줄 알았던 그 분이 힘도 못쓰고 잡혀서 끌려가서 비참하게 고문을 당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비참한 모습을 보고 자신이 가졌던 소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나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 자신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배반했던 자신을 용서해 주신다는 의미의 그 음성도 들었습니다.
하늘로 승천하시는 예수님도 그가 보았고 다시 오신다고 하신 그 약속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 소망이 무엇인줄을 알았습니다.
산 소망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그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해 주시기 우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본문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시작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도 거듭난 사람이 되게 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죽은 소망 즉 이세상의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는 산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산 소망이 아닌 죽은 소망을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죽은 소망을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기를 많이 잡는 일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는 일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 소망이 무엇인줄 모르고 삽니다.
산 소망의 중요성을 모르고 삽니다.
이렇게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합니다.
2)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본문 4절 말씀에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유업이란 말은 상속 계승 기업이란 말로 번역이 되는 말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썩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썩어질 것들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 썩습니다.
또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다 썩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받게 될 영원한 기업인 하늘나라 기업은 썩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얻을 면류관이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입니다
부활의 몸도 썩지 아니할 몸입니다
그 나라는 더럽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더럽지 않다. “ 라는 말은 ”오염되지 않은, 더렵혀지지 않은, 더러움이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아무리 바르게 착하게 살려고 해도 이 세상이 너무나 악하고 더럽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세상의 죄악에 오염이 되어서 지저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서 살 하나님의 나라는 오염이 전혀 되지 않은 깨끗한 나라이고 또 앞으로도 오염이 될 수 없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쇠하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쇠하지 않는다는 말은 시들지 않는다, 약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쇠하여집니다.
청춘도 사랑도 몸도 마음도 사업도 이 지구의 모든 것들은 시들어 가고 약해져가고 변하고 망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나라입니다.
영원히 변함이 없는 나라, 부도가 나거나 망하지 않는 나라, 그 나라가 우리가 받을 영원한 기업입니다.
우리가 상속을 받게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무리 좋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들어갈 수가 없다면 그림의 떡이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시험을 봐야 한다거나 어떤 훈련을 받아야 한다거나 경쟁을 해서 들어가야 한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좋은 것을 주시면서도 아주 쉽게 아주 간단하게 경쟁도 없이 시험도 없이 반드시 꼭 들어가게 해 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동정의 여지도 없는 우리들을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죄 대신 죽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해 주셔서 우리도 부활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3.찬송하는 사람의 삶도 달라야 합니다.
1장 13절 이하에는 찬송하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 성도들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찬송이란 교회에 와서 말로만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찬송하는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찬송하기에 합당한 사람을 산 사람이 찬송을 기쁘게 바르게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사욕을 본받지 말라(14)
14절 말씀에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의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세상의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주신 하나님을 바르게 찬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 욕심을 두고 사는 사람은 산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잘 살도록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일을 하되 꼭 돈에 목적을 두고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다가 보면 돈은 따라서 오는 것입니다.
돈을 벌겠다고 남에게 나쁜 해를 끼치는 것은 사욕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14-16)
모든 행실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목적이 달라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다르다는 생각을 늘 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를 짓는다고 할지라도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들처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뜨겁게 서로 사랑하라(22)
서로에게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원리가 이 사랑에서 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랑의 눈으로 사람들을 본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미워할 사람도 없고 원망하고 불평할 사람도 없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 늘 도와주고 싶은 마음, 늘 관심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 서로 칭찬해주고 복을 빌어주는 마음 그것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찬송을 막는 이유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찬송해야만 하는 이유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은혜 그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찬송하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세상의 사욕을 본받지 말고 거룩한 사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찬송하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뜨겁게 찬송하면서 사는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